(영성에세이) 영생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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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73회 작성일 24-03-18 14:32본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성경 구절일 것이다. 하여, 영생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영생을 맛보며”(찬송가 436장)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할 것이다. 영생을 맛보는 게 뭐지? 영생을 교리로는 믿어도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미 변형
어렸을 때 나는 기독교인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 천당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영생은 죽은 다음의 일이었고, “시간의 무한한 지속”을 의미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언어 사용방식을 알아가면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님은 단어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하나의 뜻에 국한시키지 않으신다. “성전”만 해도 그렇다.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46년 걸려 지은 건물이라면, 예수님에게는 사흘 만에 다시 세울 “자기 몸”이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인격으로서의 성전으로 의미가 변형된다.(요 2:21)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면서 “물”의 의미도 여러 차례 변형시키셨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은 갈증 날 때 목을 축이는 물질(우물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의 의미를 “생수”로 바꿨다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로 변형시키신다. 급기야 자신이 그 물이라고 하신다.(요 7-14) 나중에 물은 “성령”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나를 믿는 자는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요 7:38-39 )
“빵”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이 말하는 빵이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빵은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이다. 이 빵의 의미를 예수님은 “참 빵”으로 바꿨다가 “하나님의 빵”으로 변형시키더니, “내가 생명의 빵”이라면서 자신과 동일시하신다.(요 6:32, 35, 51)
예수님은 이처럼 단어를 “일의적一義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의적多義的으로” 사용하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미 변형을 통해 물질 차원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 차원을 열어 보이기 위해서다. 삶의 보이는 차원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차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거듭남과 영생
“영생”도 마찬가지다. 영생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맥락에서 나온다.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 지도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요 3:2) 니고데모의 관심은 “표징” 곧 기적에 있었다. 아마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요 2:1-11)에 대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적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관심은 다시 태어나는 것에 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예수님은 대화의 주제를 “기적에서 탄생”으로 바꾸셨는데, 이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명백해진다. 신앙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탄생이라는!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한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 3:4) 니고데모가 아는 탄생은 육체의 탄생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탄생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탄생의 의미가 육체의 탄생에서 영적 탄생으로 변형된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적인 탄생이다. 그런데 그것에 무지한 니고데모가 안타깝다. 그래서 못 박듯 말씀하신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육체의 탄생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탄생도 있다는 말씀이겠다.
이처럼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은 영적 탄생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하신 말씀이다. 영생을 이해하는 범주는 시간이 아니라 “탄생”이다! 따라서 영생은 시간의 한없는 지속이 아니라 영적 탄생을 통해 얻는 생명을 의미한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육체의 생명을 얻는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나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영적 탄생
영적 탄생이란 무엇일까? 영적 탄생은 자신의 본래 생명 즉 신적 생명을 각성할 때 경험하는 영혼의 깨어남이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육체적으로 태어난 사람의 몸에 피가 흐르듯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의 영혼엔 신성한 생명이 흐른다. 그것이 영생이다. 이 생명이 전존재를 휘돌 때 육의 욕망에서 해방되고,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유롭고 얽매임이 없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불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요 3:8) 것처럼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야말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세례받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다시 말해 자신의 신적 생명을 자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날마다 모셔야(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믿음은 신조나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신념의 마력, 또는 긍정의 힘 같은 처세술은 더욱 아니다. 삼박자 축복이나 바라봄의 법칙도 물론 아니다. 예수 없는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교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요 1:12)
예수 없는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교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요 1:12)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접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할 때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신적 생명을 자각한다. 영적으로(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 몸에 피가 흐르듯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영혼에는 하나님의(신성한) 생명이 흐른다. 우리도 세속의 집착과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로워진다. 욕망이나 감정의 얽힘에서, 인연이나 운명의 얽맴에서 해방된다.
심판?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거듭나고(영적으로 탄생하고) 영생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첫째,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3:18절a)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의 영적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은 의식의 가장 높은 차원이다. 가장 높은 것을 그보다 낮은 것이 심판할 수 없다.
또 영적 차원은 하나님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지 심판받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함으로써 영적으로 탄생한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을 누가 심판하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고전 2:15)
믿음(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신적 생명을 자극하고 그것을 각성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영적 탄생을 도우며,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육의 욕망에서 해방되게 한다. 무엇보다 거짓자아의 횡포에서 벗어나 참자아의 자유를 누리게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교회는 세속의 심판을 받고 있다. 자신의 무고함이나 남의 비리를 증명하려고 세속 법정의 심판을 앞다퉈 청구하고 있다. 세속이 거룩을, 자연이 은총을, 이성이 계시를 심판해도 유구무언이다.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다. 비참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적 탄생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에 대한 각성이 없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의 각성을 통해 작용하는 영적 생명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세속이 거룩을, 자연이 은총을, 이성이 계시를 심판해도 유구무언이다.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다. 비참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적 탄생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에 대한 각성이 없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의 각성을 통해 작용하는 영적 생명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자기의 신적 생명을 각성하지 못했으니 남의 신적 생명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배려나 친절은 불가능하다. 이때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기승을 부린다. 그렇기에 정죄와 배제의 칼을 마구 휘두른다. 퀴어 축제에서 축복기도 한 목사의 목을 망나니처럼 자르고도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아무리 구구한 변명을 하고, 법적 근거를 들이대도 기독교 복음을 말할 자격이 없다.
빛
둘째, 영생을 얻은 사람, 신적 생명(아들됨)을 자각한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요 3:21) 여기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기적에서 탄생으로 주제가 바뀌었다가, 탄생은 육체의 탄생에서 영적 탄생으로 의미가 바뀌고, 영적 탄생은 영생으로 의미가 확장되더니 마침내 빛에 대한 담론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가 대화의 종착점이다.
“빛”이야말로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다. 밤은 “표징”[기적]을 구하는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은유다. 예수님도 인정했듯이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으로서 율법에 정통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밤”이었다. 영적 탄생에 대해서도, 신적 생명의 각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허탈하게 반문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것도 모르느냐?”
오늘날 우리가 그렇다. 영적 탄생이 아니라 기적을 추구하며, 율법과 도덕을 앞세워 정죄를 일삼지만, 신적 생명의 각성(거듭남 또는 영적 탄생)에는 무지하다. 영생도 죽은 다음에 있을 시간의 지속으로 알지 신적 생명을 각성할 때 활성화되는 새로운 생명임을 모른다. 영생에 관한 담론(교리, 설교)은 있어도 실재(경험, 현실)는 없는 한국교회야말로 영적으로 캄캄한 밤이다.
영생에 관한 담론(교리, 설교)은 있어도 실재(경험, 현실)는 없는 한국교회야말로 영적으로 캄캄한 밤이다.
니고데모가 영적인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다. 예수님은 “참 빛”(요 1:9)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우리는 그 “빛으로 나아간다.”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빛을 깨닫는다. 토머스 머튼이 생애 말년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미 빛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빛이다. 남은 일은 자신이 빛임을 자각하면서 빛 속에서, 빛으로 사는 것이다. 생기있게, 미소를 띠고, 유머를 잃지 않고, 명랑하고 유쾌하게 사는 것이다. 생의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배려와 친절을 베풀면서 덕을 행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빛이 난다.
이뿐일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의 신적 생명을 각성하고, 영생(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빛임을 자각한 사람은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후 4:8-9)
- 이민재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성경 구절일 것이다. 하여, 영생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영생을 맛보며”(찬송가 436장)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할 것이다. 영생을 맛보는 게 뭐지? 영생을 교리로는 믿어도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미 변형
어렸을 때 나는 기독교인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 천당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영생은 죽은 다음의 일이었고, “시간의 무한한 지속”을 의미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언어 사용방식을 알아가면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님은 단어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하나의 뜻에 국한시키지 않으신다. “성전”만 해도 그렇다.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46년 걸려 지은 건물이라면, 예수님에게는 사흘 만에 다시 세울 “자기 몸”이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인격으로서의 성전으로 의미가 변형된다.(요 2:21)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면서 “물”의 의미도 여러 차례 변형시키셨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은 갈증 날 때 목을 축이는 물질(우물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의 의미를 “생수”로 바꿨다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로 변형시키신다. 급기야 자신이 그 물이라고 하신다.(요 7-14) 나중에 물은 “성령”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나를 믿는 자는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요 7:38-39 )
“빵”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이 말하는 빵이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빵은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이다. 이 빵의 의미를 예수님은 “참 빵”으로 바꿨다가 “하나님의 빵”으로 변형시키더니, “내가 생명의 빵”이라면서 자신과 동일시하신다.(요 6:32, 35, 51)
예수님은 이처럼 단어를 “일의적一義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의적多義的으로” 사용하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미 변형을 통해 물질 차원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 차원을 열어 보이기 위해서다. 삶의 보이는 차원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차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거듭남과 영생
“영생”도 마찬가지다. 영생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맥락에서 나온다.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 지도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요 3:2) 니고데모의 관심은 “표징” 곧 기적에 있었다. 아마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요 2:1-11)에 대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적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관심은 다시 태어나는 것에 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예수님은 대화의 주제를 “기적에서 탄생”으로 바꾸셨는데, 이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명백해진다. 신앙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탄생이라는!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한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 3:4) 니고데모가 아는 탄생은 육체의 탄생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탄생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탄생의 의미가 육체의 탄생에서 영적 탄생으로 변형된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적인 탄생이다. 그런데 그것에 무지한 니고데모가 안타깝다. 그래서 못 박듯 말씀하신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육체의 탄생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탄생도 있다는 말씀이겠다.
이처럼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은 영적 탄생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하신 말씀이다. 영생을 이해하는 범주는 시간이 아니라 “탄생”이다! 따라서 영생은 시간의 한없는 지속이 아니라 영적 탄생을 통해 얻는 생명을 의미한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육체의 생명을 얻는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나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영적 탄생
영적 탄생이란 무엇일까? 영적 탄생은 자신의 본래 생명 즉 신적 생명을 각성할 때 경험하는 영혼의 깨어남이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육체적으로 태어난 사람의 몸에 피가 흐르듯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의 영혼엔 신성한 생명이 흐른다. 그것이 영생이다. 이 생명이 전존재를 휘돌 때 육의 욕망에서 해방되고,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유롭고 얽매임이 없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불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요 3:8) 것처럼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야말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세례받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다시 말해 자신의 신적 생명을 자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날마다 모셔야(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믿음은 신조나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신념의 마력, 또는 긍정의 힘 같은 처세술은 더욱 아니다. 삼박자 축복이나 바라봄의 법칙도 물론 아니다. 예수 없는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교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요 1:12)
예수 없는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교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요 1:12)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접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할 때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신적 생명을 자각한다. 영적으로(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 몸에 피가 흐르듯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영혼에는 하나님의(신성한) 생명이 흐른다. 우리도 세속의 집착과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로워진다. 욕망이나 감정의 얽힘에서, 인연이나 운명의 얽맴에서 해방된다.
심판?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거듭나고(영적으로 탄생하고) 영생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첫째,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3:18절a)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의 영적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은 의식의 가장 높은 차원이다. 가장 높은 것을 그보다 낮은 것이 심판할 수 없다.
또 영적 차원은 하나님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지 심판받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함으로써 영적으로 탄생한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을 누가 심판하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고전 2:15)
믿음(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신적 생명을 자극하고 그것을 각성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영적 탄생을 도우며,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육의 욕망에서 해방되게 한다. 무엇보다 거짓자아의 횡포에서 벗어나 참자아의 자유를 누리게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교회는 세속의 심판을 받고 있다. 자신의 무고함이나 남의 비리를 증명하려고 세속 법정의 심판을 앞다퉈 청구하고 있다. 세속이 거룩을, 자연이 은총을, 이성이 계시를 심판해도 유구무언이다.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다. 비참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적 탄생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에 대한 각성이 없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의 각성을 통해 작용하는 영적 생명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세속이 거룩을, 자연이 은총을, 이성이 계시를 심판해도 유구무언이다.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다. 비참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적 탄생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에 대한 각성이 없기 때문이다. 신적 생명의 각성을 통해 작용하는 영적 생명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자기의 신적 생명을 각성하지 못했으니 남의 신적 생명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배려나 친절은 불가능하다. 이때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기승을 부린다. 그렇기에 정죄와 배제의 칼을 마구 휘두른다. 퀴어 축제에서 축복기도 한 목사의 목을 망나니처럼 자르고도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아무리 구구한 변명을 하고, 법적 근거를 들이대도 기독교 복음을 말할 자격이 없다.
빛
둘째, 영생을 얻은 사람, 신적 생명(아들됨)을 자각한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요 3:21) 여기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기적에서 탄생으로 주제가 바뀌었다가, 탄생은 육체의 탄생에서 영적 탄생으로 의미가 바뀌고, 영적 탄생은 영생으로 의미가 확장되더니 마침내 빛에 대한 담론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가 대화의 종착점이다.
“빛”이야말로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다. 밤은 “표징”[기적]을 구하는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은유다. 예수님도 인정했듯이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으로서 율법에 정통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밤”이었다. 영적 탄생에 대해서도, 신적 생명의 각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허탈하게 반문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것도 모르느냐?”
오늘날 우리가 그렇다. 영적 탄생이 아니라 기적을 추구하며, 율법과 도덕을 앞세워 정죄를 일삼지만, 신적 생명의 각성(거듭남 또는 영적 탄생)에는 무지하다. 영생도 죽은 다음에 있을 시간의 지속으로 알지 신적 생명을 각성할 때 활성화되는 새로운 생명임을 모른다. 영생에 관한 담론(교리, 설교)은 있어도 실재(경험, 현실)는 없는 한국교회야말로 영적으로 캄캄한 밤이다.
영생에 관한 담론(교리, 설교)은 있어도 실재(경험, 현실)는 없는 한국교회야말로 영적으로 캄캄한 밤이다.
니고데모가 영적인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다. 예수님은 “참 빛”(요 1:9)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우리는 그 “빛으로 나아간다.”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빛을 깨닫는다. 토머스 머튼이 생애 말년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미 빛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빛이다. 남은 일은 자신이 빛임을 자각하면서 빛 속에서, 빛으로 사는 것이다. 생기있게, 미소를 띠고, 유머를 잃지 않고, 명랑하고 유쾌하게 사는 것이다. 생의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배려와 친절을 베풀면서 덕을 행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빛이 난다.
이뿐일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의 신적 생명을 각성하고, 영생(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빛임을 자각한 사람은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후 4:8-9)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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