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자존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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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80회 작성일 24-01-11 18:15본문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27)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이사야 62:3)
요즘 자존감에 관심 갖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자존감이야말로 비난과 모욕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존감”self-esteem은 말 그대로 자기를 존중하는 태도다. 미국의 철학자요 심리학자요 종교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맨 먼저 사용했다고 한다.
자존감과 신앙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누리며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해결 능력을 신뢰하지만, 필요할 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할 줄도 받을 줄도 안다. 우월과 열등의 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타인의 감정과 욕구도 존중하기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삼간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경향이 있다. 상습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며, 불평과 불만도 많다. 타인을 의식하기에 실수를 두려워하며 만성적으로 우유부단하다. 결정장애를 보이기도 한다. 타인의 인정이 중요하기에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권위 있는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완벽주의에 집착한다. 완벽하지 않을 때 쉽게 좌절하며 짜증을 낸다. 변덕도 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호전성도 보인다. 매사에 비관적이며 부정적이다.
자존감은 자존심과 다르다. 자존감이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의 특징이라면, 자존심은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이 체면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습성이다. 자존심은 허위의식의 한 형태이며, 에고를 드러내는 한 방식이다. 한 마디로, 자존감은 참자아(P°)의 특징이며, 자존심은 거짓자아(P²)의 특징이다.
기독교 신앙은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높이는 신앙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는 “죄인을 향해 하나님이 자존감을 부여하시는 사건”이다. 칭의론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였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기 전에 우리의 참자아(하나님의 형상)를 보신다.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참자아를 보라는 것이 바로 칭의론의 속뜻이다. 그래서 칭의를 “자존감 부여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 “죄는 어떻게 하고?”라는 물음이 뒤따를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 참자아가 깨어나 자존감이 높아지면 죄는 차츰 사라진다. 죄에 집중한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죄를 없애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길은 죄를 짓게 하는 거짓자아(옛사람, P²)를 넘어 참자아를 향하는 것이다. 어둠에 집착한다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둠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한다고 해서 어둠이 없어지지 않는다. 어둠을 없애는 것은 한 줄기 빛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면 어둠은 그 빛을 이기지 못한다.”(요 1:5)
참자아 차원에서 내가 이미 의인임을 깨닫고 자존감을 갖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참자아의 빛이 거짓자아의 어둠을 비출 때 죄는 힘을 잃는다. 의인의 빛이 죄인의 어둠을 비출 때 죄는 소멸한다. 그래서 우리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얼굴인 참자아가 깨어나고 자존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선언
성경은 자존감의 원천이다. 성경을 다독하면서도 자존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잘못 읽은 것이다. 성경은 첫째 장부터 자존감을 북돋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가장 강한 신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포로생활이라는 현실은 그들의 믿음을 산산조각냈다. 바빌론의 신들이 야훼 하나님보다 훨씬 강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고뇌와 좌절이 깊어졌고 삶의 희망도 사라졌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고뇌를 꿰뚫어 본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 1장의 형태로 읽고 있는 신앙고백을 선포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창세기 1장은 세계의 기원을 말하려는 우주론cosmology이 아니다. 지구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려는 발생학geogony도 아니다. 진화론을 논박하는 창조론의 참고문헌reference도 아니다. 창세기 1장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야훼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천명하는 신앙고백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왕보다 존귀하다고 선언하는 인권선언이다.
첫째,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창세기는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이 두 큰 빛을 만드시고, 둘 가운데서 큰 빛으로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창 1:16)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는 해・달・별들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선언함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복원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이 바빌론의 왕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창세기는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7) 바빌론 사회에서는 왕만이 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였다. 나머지는 모두 왕을 위한 종에 불과했다. 포로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아로새겼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이야말로 포로기 이스라엘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벗들은 어떤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각이 있는가? 그런 자각에서 나오는 자존감이 있는가? 혹시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포로처럼 좁은 에고(거짓자아)의 감옥에 갇혀 아옹다옹하며, 자존감 없이 살아가지는 않는가?
도토리 왕국
옛날 옛적에 도토리 왕국이 있었다. 왕국은 아주 크고 오래된 상수리나무 밑에 도읍을 정했다. 도토리 왕국의 상층부는 서구화된 세련된 도토리들이었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도토리 왕국을 경영했다. 목적의식이 분명했고 근면을 미덕으로 삼았다. 중년이 된 베이비부머 세대의 도토리들은 자기계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신의 껍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라!” 따위의 자기계발 세미나들도 많이 열렸다.
상처 입은 도토리들의 회복을 돕는 그룹 치료과정도 있었다. 그 상처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 입은 상처로서 도토리들의 원죄 같은 거였다. 도토리 껍질에 기름을 바르고 광채가 나게 해주는 스파 요법도 있었으며, 도토리의 수명과 행복을 증진하는 웰빙 세라피도 여럿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도토리학”acornology은 아주 정교해졌다. 도토리학을 모르면 지성인 축에 낄 수 없었다.
어느 날, 도토리 왕국 한복판에 울퉁불퉁하게 생긴 낯선 도토리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지나가던 새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모자도 쓰지 않고 행색이 더러운 그 도토리는 동료 도토리들에게 불쾌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상수리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더니 그 도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수리나무의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 바로 … 저, 저 나무입니다!”
세련된 도토리들은 그 도토리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도토리가 행색이 더러운 도토리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저 나무처럼 될 수 있단 말이오?” 낯선 도토리가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건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과, 그, 그리고 껍질이 깨지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미쳤군!” 도토리들은 소리 질렀다. “완전히 미쳤어! 그렇게 되면 우린 더 이상 도토리일 수 없잖아!”(Jacob Needleman, Lost Christianity)
삼위일체의 도움
도토리의 본성과 운명은 상수리나무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씨앗이 있다고.(요일 3:9)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귀인 The Aristocrat』에서 말한 것처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하나님의 씨앗은 하나님으로 자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프게도 이런 앎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저 도토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기를 쓴다. 도토리학의 전문가라고 뽐내면서 도토리 키 재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상수리나무가 될 생각은 당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 일을 하는 것일까, 저 일을 하는 것일까? 여기에 있는 것일까 저기에 가는 것일까?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여기에 있든 저기에 가든 하나님의 뜻은 상수리나무가 되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것처럼 자기를 “주님께서 지어주신 새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임을 깨닫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사 62:2-3)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결심을 한 사람을 도우실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 때마다 거듭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너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어.” “너는 도토리에 머물 존재가 아냐, 상수리나무로 클 존재야!” “너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며, 내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이야! 그 왕관을 써!”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상수리나무가 되는 길을 직접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껍질을 찢고, 소아小我를 벗고, 에고를 깨뜨리고,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자고 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버거워할 때마다 거짓자아를 해체하라고 도발할 것이다. 에고(소아)의 껍질을 깨뜨리라고 자극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신적 본성을 구현하라고 격려하고 부추기고 힘 주실 것이다. 마침내 도토리가 상수리나무가 되듯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게 하실 것이다.
- 이민재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27)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이사야 62:3)
요즘 자존감에 관심 갖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자존감이야말로 비난과 모욕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존감”self-esteem은 말 그대로 자기를 존중하는 태도다. 미국의 철학자요 심리학자요 종교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맨 먼저 사용했다고 한다.
자존감과 신앙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누리며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해결 능력을 신뢰하지만, 필요할 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할 줄도 받을 줄도 안다. 우월과 열등의 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타인의 감정과 욕구도 존중하기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삼간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경향이 있다. 상습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며, 불평과 불만도 많다. 타인을 의식하기에 실수를 두려워하며 만성적으로 우유부단하다. 결정장애를 보이기도 한다. 타인의 인정이 중요하기에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권위 있는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완벽주의에 집착한다. 완벽하지 않을 때 쉽게 좌절하며 짜증을 낸다. 변덕도 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호전성도 보인다. 매사에 비관적이며 부정적이다.
자존감은 자존심과 다르다. 자존감이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의 특징이라면, 자존심은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이 체면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습성이다. 자존심은 허위의식의 한 형태이며, 에고를 드러내는 한 방식이다. 한 마디로, 자존감은 참자아(P°)의 특징이며, 자존심은 거짓자아(P²)의 특징이다.
기독교 신앙은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높이는 신앙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는 “죄인을 향해 하나님이 자존감을 부여하시는 사건”이다. 칭의론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였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기 전에 우리의 참자아(하나님의 형상)를 보신다.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참자아를 보라는 것이 바로 칭의론의 속뜻이다. 그래서 칭의를 “자존감 부여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 “죄는 어떻게 하고?”라는 물음이 뒤따를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 참자아가 깨어나 자존감이 높아지면 죄는 차츰 사라진다. 죄에 집중한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죄를 없애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길은 죄를 짓게 하는 거짓자아(옛사람, P²)를 넘어 참자아를 향하는 것이다. 어둠에 집착한다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둠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한다고 해서 어둠이 없어지지 않는다. 어둠을 없애는 것은 한 줄기 빛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면 어둠은 그 빛을 이기지 못한다.”(요 1:5)
참자아 차원에서 내가 이미 의인임을 깨닫고 자존감을 갖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참자아의 빛이 거짓자아의 어둠을 비출 때 죄는 힘을 잃는다. 의인의 빛이 죄인의 어둠을 비출 때 죄는 소멸한다. 그래서 우리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얼굴인 참자아가 깨어나고 자존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선언
성경은 자존감의 원천이다. 성경을 다독하면서도 자존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잘못 읽은 것이다. 성경은 첫째 장부터 자존감을 북돋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가장 강한 신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포로생활이라는 현실은 그들의 믿음을 산산조각냈다. 바빌론의 신들이 야훼 하나님보다 훨씬 강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고뇌와 좌절이 깊어졌고 삶의 희망도 사라졌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고뇌를 꿰뚫어 본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 1장의 형태로 읽고 있는 신앙고백을 선포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창세기 1장은 세계의 기원을 말하려는 우주론cosmology이 아니다. 지구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려는 발생학geogony도 아니다. 진화론을 논박하는 창조론의 참고문헌reference도 아니다. 창세기 1장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야훼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천명하는 신앙고백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왕보다 존귀하다고 선언하는 인권선언이다.
첫째,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창세기는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이 두 큰 빛을 만드시고, 둘 가운데서 큰 빛으로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창 1:16)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는 해・달・별들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선언함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복원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이 바빌론의 왕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창세기는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7) 바빌론 사회에서는 왕만이 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였다. 나머지는 모두 왕을 위한 종에 불과했다. 포로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아로새겼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이야말로 포로기 이스라엘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벗들은 어떤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각이 있는가? 그런 자각에서 나오는 자존감이 있는가? 혹시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포로처럼 좁은 에고(거짓자아)의 감옥에 갇혀 아옹다옹하며, 자존감 없이 살아가지는 않는가?
도토리 왕국
옛날 옛적에 도토리 왕국이 있었다. 왕국은 아주 크고 오래된 상수리나무 밑에 도읍을 정했다. 도토리 왕국의 상층부는 서구화된 세련된 도토리들이었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도토리 왕국을 경영했다. 목적의식이 분명했고 근면을 미덕으로 삼았다. 중년이 된 베이비부머 세대의 도토리들은 자기계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신의 껍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라!” 따위의 자기계발 세미나들도 많이 열렸다.
상처 입은 도토리들의 회복을 돕는 그룹 치료과정도 있었다. 그 상처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 입은 상처로서 도토리들의 원죄 같은 거였다. 도토리 껍질에 기름을 바르고 광채가 나게 해주는 스파 요법도 있었으며, 도토리의 수명과 행복을 증진하는 웰빙 세라피도 여럿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도토리학”acornology은 아주 정교해졌다. 도토리학을 모르면 지성인 축에 낄 수 없었다.
어느 날, 도토리 왕국 한복판에 울퉁불퉁하게 생긴 낯선 도토리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지나가던 새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모자도 쓰지 않고 행색이 더러운 그 도토리는 동료 도토리들에게 불쾌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상수리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더니 그 도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수리나무의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 바로 … 저, 저 나무입니다!”
세련된 도토리들은 그 도토리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도토리가 행색이 더러운 도토리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저 나무처럼 될 수 있단 말이오?” 낯선 도토리가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건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과, 그, 그리고 껍질이 깨지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미쳤군!” 도토리들은 소리 질렀다. “완전히 미쳤어! 그렇게 되면 우린 더 이상 도토리일 수 없잖아!”(Jacob Needleman, Lost Christianity)
삼위일체의 도움
도토리의 본성과 운명은 상수리나무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씨앗이 있다고.(요일 3:9)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귀인 The Aristocrat』에서 말한 것처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하나님의 씨앗은 하나님으로 자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프게도 이런 앎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저 도토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기를 쓴다. 도토리학의 전문가라고 뽐내면서 도토리 키 재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상수리나무가 될 생각은 당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 일을 하는 것일까, 저 일을 하는 것일까? 여기에 있는 것일까 저기에 가는 것일까?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여기에 있든 저기에 가든 하나님의 뜻은 상수리나무가 되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것처럼 자기를 “주님께서 지어주신 새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임을 깨닫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사 62:2-3)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결심을 한 사람을 도우실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 때마다 거듭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너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어.” “너는 도토리에 머물 존재가 아냐, 상수리나무로 클 존재야!” “너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며, 내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이야! 그 왕관을 써!”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상수리나무가 되는 길을 직접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껍질을 찢고, 소아小我를 벗고, 에고를 깨뜨리고,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자고 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버거워할 때마다 거짓자아를 해체하라고 도발할 것이다. 에고(소아)의 껍질을 깨뜨리라고 자극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신적 본성을 구현하라고 격려하고 부추기고 힘 주실 것이다. 마침내 도토리가 상수리나무가 되듯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게 하실 것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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