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예수기도, 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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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34회 작성일 23-05-02 11:41본문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골 3:3-4)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예수기도를 요즘 새로운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번영신앙이라는 탐욕과 수치의 옷을 벗고 변형신앙이라는 복음과 영광의 옷을 입는 데 이만한 수행도구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변형신앙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도다.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실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도할 때에 빈 말(중언부언)을 되풀이하지 말라”(마 6:7)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죄인, 자비 같은 기독론적 어휘들로만 간결하게 이뤄진 예수기도는 중언부언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골 3:3)는 생명 곧 참자아를 일깨워준다. 결국 예수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자아를 각성하는 기도요, 그리스도와함께 참자아의 사귐을 깊게 하는 기도요, 그리스도를 통해 참자아의 연대를 풍성하게 하는 기도요, 그리스도처럼 참자아를 완성하는 기도다. 그래서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기도다.
예수기도의 시작과 발전
한국교회 기도의 상징인 통성기도의 역사가 백 년 남짓하다면, 예수기도의 역사는 천오백 년이 넘는다. 통성기도는 1900년대 초반의 부흥운동 시기에―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시작됐다. 이에 비해 예수기도는 4~5세기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로부터 비롯된 기도다. 예수기도의 맥을 이은 것은 동방정교회 영성 전통이지만, 그렇다고 이 기도가 정교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수기도는 전체 “기독교의” 기도다. 사막 수도영성은 기독교 공통의 영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저자가 쓴 『순례자의 길』은 예수기도를 널리 퍼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한 젊은이는 주일 예배 때 “끊임없이(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에 깊이 감명받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은둔 수도승을 찾아가기도 하고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누구에게서도 그런 기도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노 수도승에게서 쉬지 않고 하는 기도를 배웠는데, 그 기도가 바로 예수기도였다.
순례자는 노 수도사를 영적 스승으로 모시면서 스승이 시키는 대로 수행에 정진한다. 스승은 앉아있든지 서 있든지, 누워있든지 걷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를 반복하라고 시킨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 순례자는 하루에 3,000번씩 하다가, 그다음엔 6,000번으로 늘려서 하고, 나중에는 하루에 12,000번씩 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어느 날 순례자는 기도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자 영적 스승은 이제 횟수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심장)으로 기도하라고 일러준다.
예수기도는 반복과 지속이 핵심이다. 반복과 지속을 통해 예수기도는 입술에서 정신(mind)을 거쳐 마음(heart)에 이른다. 이 과정을 19세기 러시아의 영성저술가인 운둔자 테오파네스(Theophan the Recluse)는 3단계로 구별했다.
∙1단계
구송기도의 단계. 입술로 계속 반복하는 외적 기도의 단계다.
∙2단계
집중기도의 단계. “정신은 기도에 사용된 어휘들에 집중”하며, “수행자는 그 어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3단계
정신의 기도는 마음의 기도로 변형된다. 이때 기도는 수행자의 행위가 아니라, 수행자의 존재가 된다. 즉 기도는 수행자 자신이 된다. 이때 예수기도는 “스스로 움직인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예수기도는 저절로 이뤄지며, 내면의 습관으로 자리잡아 무의식 상태에서도 노래처럼 마음에 울려 퍼진다.
현대 루마니아 정교회 수도영성의 대가인 일리에 클레오파(Illie Cleopa)는 이 과정을 더욱 세분한다. 그는 예수기도가 아홉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고 보았다. 테오파네스가 외적 기도의 단계라고 한 것을 일리에 클레오파는 ①입술의 기도 ②입의 기도 ③혀의 기도 ④소리의 기도 넷으로 나눈다. 이 단계들을 거쳐 예수기도는 ⑤정신의 기도로 발전한다. 기도수행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 정신의 기도는 ⑥마음의 기도로 변형되고, 마음의 기도는 저절로 이뤄지는 ⑦능동기도와 만물에 대한 통찰이 생기는 ⑧통찰기도를 거쳐 ⑨관상기도에 이른다. 이때 수행자는 궁극의 고요와 평정 상태인 “헤시키아”(hesychia)를 맛본다.
예수기도의 태도와 지향
기독론적 어휘들로 이루어진 예수기도를 반복할 때 수행자는 기독교의 영적 신비로 이끌려간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를 통해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골 3:4) 예수기도 수행자는 그리스도(참자아)가 자기의 생명이며, 자기가 그분(참자아)의 영광에 싸여 있음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이 미래형으로 말한 일을 현재의 신비로 경험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같은 문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그친다면 예수기도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되기 쉽다. 이때 예수기도는 기독교의 영적 신비와는 무관한 주문(呪文)으로 전락하여 또 다른 주술(기복)신앙의 온상이 되고 만다. 예수기도는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기계적인 방법도 효과적인 테크닉도 아니다. 예수기도는 하나의 방법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따라서 예수기도를 할 때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강렬한 열망과 함께 거짓자아(죄)를 벗고 참자아(생명)로 살겠다는 영적 소원이 있어야 한다.
예수기도는 하나의 방법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따라서 예수기도를 할 때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강렬한 열망과 함께 거짓자아(죄)를 벗고 참자아(생명)로 살겠다는 영적 소원이 있어야 한다.
기도의 궁극 지향도 중요하다. 지향이 있는 수행과 지향이 없는 수행의 차이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지향이 분명한 예수기도 수행이 “신화”(神化)의 기쁨에 이르게 한다면, 지향이 모호한 기계적인 반복은 의식을 멍하게 할 뿐이다. 『예수 이름의 능력』의 저자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는 예수기도의 목적(지향)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바치시는 [중보]기도와 점점 같아지는 것, 우리의 생명이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고, 우리의 호흡이 우주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 되는 것, 하여, 교부들이 ‘테오시스’(theosis)라고 묘사한 ‘신화’(神化)에 이르는 것.”
예수기도의 목적은 셋처럼 보인다. 첫째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가 같아지는 것, 둘째, 우리의 생명과 그분의 생명이 하나 되는 것, 셋째, “신화”에 이르는 것. 하지만 예수기도의 궁극 목적은 “신화”(神化)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지고, 우리의 생명이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는 것은 신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예수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그리스도의 기도로 변형시킨다. 욕망에서 나오는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요 17:11,21-23) 해달라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질 때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며,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과 하나 된다. 그렇게 우리는 신화의 길을 걷는다.
예수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그리스도의 기도로 변형시킨다. 욕망에서 나오는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요 17:11,21-23) 해달라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질 때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며,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과 하나 된다. 그렇게 우리는 신화의 길을 걷는다.
“신화”는 번영신앙에 취한 한국교회에는 매우 낯선 말이지만 지극히 성서적인 요청이다. 신화의 이상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주어진 명령이기도 하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벧후 1:3-4)기 위함이라면서 신화를 요청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설교의 문맥에서 신화를 요청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신화”를 향한 갈망과 신화를 이뤄가는 현실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세리나 이방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화”는 이루기 어려운 이상처럼 보인다. 신화라는 말 자체가 버거울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본질상 육적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본질상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려는 것 자체가 교만 아닌가.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처럼 되려고”(창 3:5) 했기 때문 아닌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한 것이 사탄(뱀)이라면, 신화는 사탄의 유혹 아닌가.
언뜻 생각하면 그렇지만 신화 교리의 핵심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도 아니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신화는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나 독일 제3제국의 히틀러 같은 권력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 우상화 프로젝트가 아니다. 신화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믿고, 사랑하고, 닮고, 따르는 것에 있다. 신화는 인간의 지식과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
따라서 신화는 “믿음의 길”이다. 이때의 믿음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신념의 마력이나 긍정의 힘 같은 게 아니다. 신화와 관련된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맺기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인 까닭이다. 이때 우리 안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 또는 속사람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존재의 차원이 깨어난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때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고, 우리의 호흡은 성령의 숨결과 하나 된다.
하지만 거듭남으로는 부족하다. 갓 태어난 생명이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다워질 수 없듯이,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도 성장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다워질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속사람을 강건케 하라”(엡 3:16)고 한 것인데,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과정이 바로 신화의 과정이다.
하지만 거듭남으로는 부족하다. 갓 태어난 생명이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다워질 수 없듯이,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도 성장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다워질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속사람을 강건케 하라”(엡 3:16)고 한 것인데,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과정이 바로 신화의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은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습”이라고 말한 지난날의 생활방식 또는 욕망-프로그램이 뼛속 깊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예수기도 수행이다. 예수기도 수행은 옛사람의 욕망-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새사람의 신화-프로그램을 새기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옛사람의 욕망-프로그램(구습)은 삭제되며, 자신이 존재의 부정성과 삶의 마성(魔性)에 지배를 받은 죄인임을 인정하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탄원할 때 새사람의 신화-프로그램이 깔리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기도는 하나의 방법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예수기도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구습(죄)에 물든 거짓자아를 벗겠다는 열망과 함께 시작하는 영적 모험이다. 이 모험은 위험하지만 위대하다. 때로는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죄, 구습, 과거의 패턴, 욕망-프로그램, 거짓자아 등)을 벗겨내고 삭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신화의 신비를 일상의 현실로 경험할 것이기에 위대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 이민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예수기도를 요즘 새로운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번영신앙이라는 탐욕과 수치의 옷을 벗고 변형신앙이라는 복음과 영광의 옷을 입는 데 이만한 수행도구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변형신앙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도다.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실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도할 때에 빈 말(중언부언)을 되풀이하지 말라”(마 6:7)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죄인, 자비 같은 기독론적 어휘들로만 간결하게 이뤄진 예수기도는 중언부언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골 3:3)는 생명 곧 참자아를 일깨워준다. 결국 예수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자아를 각성하는 기도요, 그리스도와함께 참자아의 사귐을 깊게 하는 기도요, 그리스도를 통해 참자아의 연대를 풍성하게 하는 기도요, 그리스도처럼 참자아를 완성하는 기도다. 그래서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기도다.
예수기도의 시작과 발전
한국교회 기도의 상징인 통성기도의 역사가 백 년 남짓하다면, 예수기도의 역사는 천오백 년이 넘는다. 통성기도는 1900년대 초반의 부흥운동 시기에―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시작됐다. 이에 비해 예수기도는 4~5세기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로부터 비롯된 기도다. 예수기도의 맥을 이은 것은 동방정교회 영성 전통이지만, 그렇다고 이 기도가 정교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수기도는 전체 “기독교의” 기도다. 사막 수도영성은 기독교 공통의 영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저자가 쓴 『순례자의 길』은 예수기도를 널리 퍼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한 젊은이는 주일 예배 때 “끊임없이(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에 깊이 감명받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은둔 수도승을 찾아가기도 하고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누구에게서도 그런 기도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노 수도승에게서 쉬지 않고 하는 기도를 배웠는데, 그 기도가 바로 예수기도였다.
순례자는 노 수도사를 영적 스승으로 모시면서 스승이 시키는 대로 수행에 정진한다. 스승은 앉아있든지 서 있든지, 누워있든지 걷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를 반복하라고 시킨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 순례자는 하루에 3,000번씩 하다가, 그다음엔 6,000번으로 늘려서 하고, 나중에는 하루에 12,000번씩 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어느 날 순례자는 기도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자 영적 스승은 이제 횟수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심장)으로 기도하라고 일러준다.
예수기도는 반복과 지속이 핵심이다. 반복과 지속을 통해 예수기도는 입술에서 정신(mind)을 거쳐 마음(heart)에 이른다. 이 과정을 19세기 러시아의 영성저술가인 운둔자 테오파네스(Theophan the Recluse)는 3단계로 구별했다.
∙1단계
구송기도의 단계. 입술로 계속 반복하는 외적 기도의 단계다.
∙2단계
집중기도의 단계. “정신은 기도에 사용된 어휘들에 집중”하며, “수행자는 그 어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3단계
정신의 기도는 마음의 기도로 변형된다. 이때 기도는 수행자의 행위가 아니라, 수행자의 존재가 된다. 즉 기도는 수행자 자신이 된다. 이때 예수기도는 “스스로 움직인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예수기도는 저절로 이뤄지며, 내면의 습관으로 자리잡아 무의식 상태에서도 노래처럼 마음에 울려 퍼진다.
현대 루마니아 정교회 수도영성의 대가인 일리에 클레오파(Illie Cleopa)는 이 과정을 더욱 세분한다. 그는 예수기도가 아홉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고 보았다. 테오파네스가 외적 기도의 단계라고 한 것을 일리에 클레오파는 ①입술의 기도 ②입의 기도 ③혀의 기도 ④소리의 기도 넷으로 나눈다. 이 단계들을 거쳐 예수기도는 ⑤정신의 기도로 발전한다. 기도수행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 정신의 기도는 ⑥마음의 기도로 변형되고, 마음의 기도는 저절로 이뤄지는 ⑦능동기도와 만물에 대한 통찰이 생기는 ⑧통찰기도를 거쳐 ⑨관상기도에 이른다. 이때 수행자는 궁극의 고요와 평정 상태인 “헤시키아”(hesychia)를 맛본다.
예수기도의 태도와 지향
기독론적 어휘들로 이루어진 예수기도를 반복할 때 수행자는 기독교의 영적 신비로 이끌려간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를 통해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골 3:4) 예수기도 수행자는 그리스도(참자아)가 자기의 생명이며, 자기가 그분(참자아)의 영광에 싸여 있음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이 미래형으로 말한 일을 현재의 신비로 경험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같은 문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그친다면 예수기도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되기 쉽다. 이때 예수기도는 기독교의 영적 신비와는 무관한 주문(呪文)으로 전락하여 또 다른 주술(기복)신앙의 온상이 되고 만다. 예수기도는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기계적인 방법도 효과적인 테크닉도 아니다. 예수기도는 하나의 방법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따라서 예수기도를 할 때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강렬한 열망과 함께 거짓자아(죄)를 벗고 참자아(생명)로 살겠다는 영적 소원이 있어야 한다.
예수기도는 하나의 방법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따라서 예수기도를 할 때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강렬한 열망과 함께 거짓자아(죄)를 벗고 참자아(생명)로 살겠다는 영적 소원이 있어야 한다.
기도의 궁극 지향도 중요하다. 지향이 있는 수행과 지향이 없는 수행의 차이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지향이 분명한 예수기도 수행이 “신화”(神化)의 기쁨에 이르게 한다면, 지향이 모호한 기계적인 반복은 의식을 멍하게 할 뿐이다. 『예수 이름의 능력』의 저자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는 예수기도의 목적(지향)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바치시는 [중보]기도와 점점 같아지는 것, 우리의 생명이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고, 우리의 호흡이 우주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 되는 것, 하여, 교부들이 ‘테오시스’(theosis)라고 묘사한 ‘신화’(神化)에 이르는 것.”
예수기도의 목적은 셋처럼 보인다. 첫째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가 같아지는 것, 둘째, 우리의 생명과 그분의 생명이 하나 되는 것, 셋째, “신화”에 이르는 것. 하지만 예수기도의 궁극 목적은 “신화”(神化)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지고, 우리의 생명이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는 것은 신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예수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그리스도의 기도로 변형시킨다. 욕망에서 나오는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요 17:11,21-23) 해달라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질 때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며,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과 하나 된다. 그렇게 우리는 신화의 길을 걷는다.
예수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그리스도의 기도로 변형시킨다. 욕망에서 나오는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요 17:11,21-23) 해달라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질 때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며,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과 하나 된다. 그렇게 우리는 신화의 길을 걷는다.
“신화”는 번영신앙에 취한 한국교회에는 매우 낯선 말이지만 지극히 성서적인 요청이다. 신화의 이상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주어진 명령이기도 하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벧후 1:3-4)기 위함이라면서 신화를 요청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설교의 문맥에서 신화를 요청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신화”를 향한 갈망과 신화를 이뤄가는 현실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세리나 이방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화”는 이루기 어려운 이상처럼 보인다. 신화라는 말 자체가 버거울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본질상 육적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본질상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려는 것 자체가 교만 아닌가.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처럼 되려고”(창 3:5) 했기 때문 아닌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한 것이 사탄(뱀)이라면, 신화는 사탄의 유혹 아닌가.
언뜻 생각하면 그렇지만 신화 교리의 핵심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도 아니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신화는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나 독일 제3제국의 히틀러 같은 권력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 우상화 프로젝트가 아니다. 신화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믿고, 사랑하고, 닮고, 따르는 것에 있다. 신화는 인간의 지식과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
따라서 신화는 “믿음의 길”이다. 이때의 믿음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신념의 마력이나 긍정의 힘 같은 게 아니다. 신화와 관련된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맺기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인 까닭이다. 이때 우리 안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 또는 속사람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존재의 차원이 깨어난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때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생명과 하나 되고, 우리의 호흡은 성령의 숨결과 하나 된다.
하지만 거듭남으로는 부족하다. 갓 태어난 생명이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다워질 수 없듯이,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도 성장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다워질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속사람을 강건케 하라”(엡 3:16)고 한 것인데,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과정이 바로 신화의 과정이다.
하지만 거듭남으로는 부족하다. 갓 태어난 생명이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다워질 수 없듯이,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도 성장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다워질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속사람을 강건케 하라”(엡 3:16)고 한 것인데,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과정이 바로 신화의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은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습”이라고 말한 지난날의 생활방식 또는 욕망-프로그램이 뼛속 깊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예수기도 수행이다. 예수기도 수행은 옛사람의 욕망-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새사람의 신화-프로그램을 새기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옛사람의 욕망-프로그램(구습)은 삭제되며, 자신이 존재의 부정성과 삶의 마성(魔性)에 지배를 받은 죄인임을 인정하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탄원할 때 새사람의 신화-프로그램이 깔리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기도는 하나의 방법이기 이전에 정신이다. 예수기도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구습(죄)에 물든 거짓자아를 벗겠다는 열망과 함께 시작하는 영적 모험이다. 이 모험은 위험하지만 위대하다. 때로는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죄, 구습, 과거의 패턴, 욕망-프로그램, 거짓자아 등)을 벗겨내고 삭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신화의 신비를 일상의 현실로 경험할 것이기에 위대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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