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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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07회 작성일 23-05-02 11:39본문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 2:5)
그리스도의 마음은 금은보화보다 귀하다. 그 마음을 품는 그 순간이 행복이요, 그 마음을 품는 그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기에 그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이 현존한다. 물론 그 마음을 일깨워 활성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닭이 스무날 넘게 달걀을 품어야 병아리가 부화하듯 그리스도의 마음이 살아나려면 시간과 수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마음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내 마음
마음은 삶의 외부 상황과 조건(즉, 겉사람의 생활현실)의 영향을 받아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슬프다. 삶의 목적이 사라지면 무기력해진다. 애를 써도 되는 일이 없으면 우울하다. 나이가 들거나 소외당하면 외롭다. 오해를 받으면 억울하다. 못살게 구는 사람은 밉다. 부당한 일을 겪으면 화가 난다. 이해관계가 걸리면 이기심이 발동한다. 모욕받으면 복수하고 싶다. 욕망을 드러내면 혐오스럽다. 무가치한 느낌이 들면 수치스럽다. 잘난 사람 앞에선 열등감이 든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럽다. 부러움은 시기와 질투를 일으킨다. 미래를 생각하면 막연히 불안하다. 먹고 살 일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비난을 받으면 상처를 입는다.
이처럼 내 마음에는 슬픔, 우울, 외로움, 억울함, 미움, 화, 이기심, 복수심, 모멸감, 수치심, 열등감, 부러움, 시기, 질투, 두려움, 걱정, 불안, 상처가 있다. 이런 감정들과 상처는 평생 쌓여 덩어리진다. 겉사람의 생활현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러한 심리현실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심리현실)은 거짓자아의 온상이요, 악마의 놀이터다.
겉사람의 생활현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러한 심리현실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심리현실)은 거짓자아의 온상이요, 악마의 놀이터다.
그런데 덩어리진 심리현실은 원래 없던 것이다. 실재가 아니다. 비(非)실재요 망상이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요, 주인이 아니라 객이다. 그런데 가짜가 진짜인척한다. 객(客)이 주인 행세한다. 주인이 객한테 수모를 당하는 꼴이라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편이 그렇게 어처구니없다.
삶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된다. 질서가 무너지고 규모도 사라진다. 매사에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한다. “길 잃고 떠도는 별들 같다.”(유 1:13) 애를 써도 성과가 없다.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 같고, 뿌리가 뽑힌 나무 같다.”(유 1:12)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상이 행복할 리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바울이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격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이다. 성령으로 교제하는 마음이다. 동정심과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다.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는 마음이다. 경쟁과 허영이 아니라 겸손으로 섬기는 마음이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다. 자기 일만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도 돌봐주는 넉넉한 마음이다.(빌 2:1-4)
이뿐 아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는” 마음이며,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이 높여주시기 때문에” 의식 수준과 에너지 레벨이 높은 고결한 마음이며,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권위 있는 마음이다.(빌 2:6-11)
그리스도의 마음은 생활현실에 영향받아 형성된 내적 현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정화된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천상의 빛으로 찬란해진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합일에 이른 절대 평정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정화된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천상의 빛으로 찬란해진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합일에 이른 절대 평정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도 정화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도 성령의 조명을 받아 환해진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도 하나님과 합일에 이르고 평정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금은보화보다 귀한 마음이라 한 것이다.
이 마음을 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렌즈로 삶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본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삶을 보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삶의 배열 곧 섭리를 읽는다. 그리스도의 렌즈로 사람을 보면 대하기 거북하고 껄끄러웠던 사람들도 사랑스럽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로 변형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삶과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이미 심리현실(마음)과 단단히 뒤엉켜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뒤엉켜있는 상태를 “동일시”라고 한다. 분리되지 않고 한 덩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앞에서 열거한 여러 심리상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슬픔, 우울, 외로움, 억울함, 미움, 화, 이기심, 복수심, 모멸감, 수치심, 열등감, 부러움, 시기, 질투, 두려움, 걱정, 불안, 상처와 동일시한다. 믿음을 통해 이미 지닌 그리스도의 마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활성화되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될까?
두려움에 빠진 로라
『침묵수업』(마틴 레어드)에 두려움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로라 수녀 이야기가 나온다. 로라는 수도원에서 10년 정도 지냈을 때 다른 수녀와 언쟁을 벌이고 나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두 사람은 수도원의 규칙을 특정 상황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둘은 매번 부딪혔고, 그때마다 말다툼으로 번졌다. “그 여자”(언제부턴가 상대 수녀는 그 여자가 되어있었다)는 로라를 질릴 정도로 몰아붙였다. 로라는 점점 밀리는 것 같았고, 그 여자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 갈등이 깊어지자 두려움이 로라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수도공동체에는 이런 규칙이 있었다. “그 누구도 고요한 마음에서 당신을 끌어내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기도 생활과 주의 집중을 잘할 수 있도록 침묵하라는 단순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로라는 이 규칙을 그 여자를 피하고, 그 여자와 말을 섞지 않는 데 악용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성한 침묵을 사람을 회피하기 위한 냉랭한 침묵으로 변질시켰다. 로라는 진실을 회피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회피할수록 두려움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회피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라의 두려움은 칡넝쿨처럼 자랐다. 로라는 수도공동체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자 로라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고, 침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북극곰의 선물
로라는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심리치료사는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라고 했다. 북극곰 대하듯 두려움을 대하라고 했다. 에스키모에게 북극곰은 위협적인 존재다. 북극곰은 종종 사람들을 해친다. 그러나 북극곰은 에스키모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해주는 동물이기도 하며, 종교적으로도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북극곰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은 성인(成人)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에스키모 말로 북극곰을 “토나르수크”(Tonarsuk)라고 하는데 이것은 “힘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북극곰은 위협이면서도 내면의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에스키모는 북극곰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내면의 힘을 길렀다. 그래서 북극곰은 선물이었다.
심리치료사는 로라에게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두려움에 이름을 붙여보라고 한 것이다. 로라는 두려움에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려움에 이름을 붙이자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북극곰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로라는 프란시스를 바라보는 훈련을 꾸준히 했다. 그러자 두려움과 뒤엉켜있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두려움을 무서워하지 않는 법에 점차 익숙해졌다. 동일시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려움과 씨름하면서 로라는 관상기도 수련을 시작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알아차릴 때마다 기도낱말(거룩한 단어)로 돌아갔다. 새로운 내면의 습관이 형성되자 내적 침묵과 고요가 깊어졌고, 두려움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라는 두려움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두려움을 바라보면서 침묵 속에서 현존할 수 있었다. 두려움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로라는 더 이상 두려움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두려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실재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먹구름 뒤에 숨어있던 보름달처럼 나타났다. 생활현실 이면에 있는,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이었다. 영성현실을 알아차리자 새로운 의식의 차원이 열렸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빛나고 있었다.
두려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실재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먹구름 뒤에 숨어있던 보름달처럼 나타났다. 생활현실 이면에 있는,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이었다. 영성현실을 알아차리자 새로운 의식의 차원이 열렸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차리자 로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두려움은 깊은 침묵과 고요함 속에 머물러 기도하는 기회가 되었다. 둘째, 두려움은 마음을 휘젓는 공포에서 침묵의 통로로 변했다. 셋째, 두려움은 정복해야 할 적에서 깊은 침묵으로 이끄는 친구가 되었다. 넷째, 관상 수련을 통해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서 은총의 통로로 변형됐다.
벗, 그대의 북극곰은 무엇인가? 그대를 힘들게 하는 감정 상태는 무엇인가?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주시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그것과의 동일시에서 차츰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관상수련을 일상생활의 루틴으로 만들어라. 동일시의 틈이 벌어지는 만큼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드러날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하나님과 합일한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 마음으로 사는 당신이 바로 천국이다.
- 이민재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 2:5)
그리스도의 마음은 금은보화보다 귀하다. 그 마음을 품는 그 순간이 행복이요, 그 마음을 품는 그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기에 그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이 현존한다. 물론 그 마음을 일깨워 활성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닭이 스무날 넘게 달걀을 품어야 병아리가 부화하듯 그리스도의 마음이 살아나려면 시간과 수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마음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내 마음
마음은 삶의 외부 상황과 조건(즉, 겉사람의 생활현실)의 영향을 받아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슬프다. 삶의 목적이 사라지면 무기력해진다. 애를 써도 되는 일이 없으면 우울하다. 나이가 들거나 소외당하면 외롭다. 오해를 받으면 억울하다. 못살게 구는 사람은 밉다. 부당한 일을 겪으면 화가 난다. 이해관계가 걸리면 이기심이 발동한다. 모욕받으면 복수하고 싶다. 욕망을 드러내면 혐오스럽다. 무가치한 느낌이 들면 수치스럽다. 잘난 사람 앞에선 열등감이 든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럽다. 부러움은 시기와 질투를 일으킨다. 미래를 생각하면 막연히 불안하다. 먹고 살 일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비난을 받으면 상처를 입는다.
이처럼 내 마음에는 슬픔, 우울, 외로움, 억울함, 미움, 화, 이기심, 복수심, 모멸감, 수치심, 열등감, 부러움, 시기, 질투, 두려움, 걱정, 불안, 상처가 있다. 이런 감정들과 상처는 평생 쌓여 덩어리진다. 겉사람의 생활현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러한 심리현실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심리현실)은 거짓자아의 온상이요, 악마의 놀이터다.
겉사람의 생활현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러한 심리현실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심리현실)은 거짓자아의 온상이요, 악마의 놀이터다.
그런데 덩어리진 심리현실은 원래 없던 것이다. 실재가 아니다. 비(非)실재요 망상이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요, 주인이 아니라 객이다. 그런데 가짜가 진짜인척한다. 객(客)이 주인 행세한다. 주인이 객한테 수모를 당하는 꼴이라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편이 그렇게 어처구니없다.
삶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된다. 질서가 무너지고 규모도 사라진다. 매사에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한다. “길 잃고 떠도는 별들 같다.”(유 1:13) 애를 써도 성과가 없다.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 같고, 뿌리가 뽑힌 나무 같다.”(유 1:12)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상이 행복할 리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바울이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격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이다. 성령으로 교제하는 마음이다. 동정심과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다.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는 마음이다. 경쟁과 허영이 아니라 겸손으로 섬기는 마음이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다. 자기 일만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도 돌봐주는 넉넉한 마음이다.(빌 2:1-4)
이뿐 아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는” 마음이며,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이 높여주시기 때문에” 의식 수준과 에너지 레벨이 높은 고결한 마음이며,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권위 있는 마음이다.(빌 2:6-11)
그리스도의 마음은 생활현실에 영향받아 형성된 내적 현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정화된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천상의 빛으로 찬란해진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합일에 이른 절대 평정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정화된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천상의 빛으로 찬란해진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합일에 이른 절대 평정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도 정화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도 성령의 조명을 받아 환해진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도 하나님과 합일에 이르고 평정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금은보화보다 귀한 마음이라 한 것이다.
이 마음을 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렌즈로 삶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본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삶을 보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삶의 배열 곧 섭리를 읽는다. 그리스도의 렌즈로 사람을 보면 대하기 거북하고 껄끄러웠던 사람들도 사랑스럽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로 변형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삶과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이미 심리현실(마음)과 단단히 뒤엉켜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뒤엉켜있는 상태를 “동일시”라고 한다. 분리되지 않고 한 덩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앞에서 열거한 여러 심리상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슬픔, 우울, 외로움, 억울함, 미움, 화, 이기심, 복수심, 모멸감, 수치심, 열등감, 부러움, 시기, 질투, 두려움, 걱정, 불안, 상처와 동일시한다. 믿음을 통해 이미 지닌 그리스도의 마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활성화되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될까?
두려움에 빠진 로라
『침묵수업』(마틴 레어드)에 두려움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로라 수녀 이야기가 나온다. 로라는 수도원에서 10년 정도 지냈을 때 다른 수녀와 언쟁을 벌이고 나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두 사람은 수도원의 규칙을 특정 상황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둘은 매번 부딪혔고, 그때마다 말다툼으로 번졌다. “그 여자”(언제부턴가 상대 수녀는 그 여자가 되어있었다)는 로라를 질릴 정도로 몰아붙였다. 로라는 점점 밀리는 것 같았고, 그 여자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 갈등이 깊어지자 두려움이 로라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수도공동체에는 이런 규칙이 있었다. “그 누구도 고요한 마음에서 당신을 끌어내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기도 생활과 주의 집중을 잘할 수 있도록 침묵하라는 단순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로라는 이 규칙을 그 여자를 피하고, 그 여자와 말을 섞지 않는 데 악용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성한 침묵을 사람을 회피하기 위한 냉랭한 침묵으로 변질시켰다. 로라는 진실을 회피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회피할수록 두려움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회피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라의 두려움은 칡넝쿨처럼 자랐다. 로라는 수도공동체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자 로라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고, 침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북극곰의 선물
로라는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심리치료사는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라고 했다. 북극곰 대하듯 두려움을 대하라고 했다. 에스키모에게 북극곰은 위협적인 존재다. 북극곰은 종종 사람들을 해친다. 그러나 북극곰은 에스키모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해주는 동물이기도 하며, 종교적으로도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북극곰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은 성인(成人)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에스키모 말로 북극곰을 “토나르수크”(Tonarsuk)라고 하는데 이것은 “힘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북극곰은 위협이면서도 내면의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에스키모는 북극곰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내면의 힘을 길렀다. 그래서 북극곰은 선물이었다.
심리치료사는 로라에게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두려움에 이름을 붙여보라고 한 것이다. 로라는 두려움에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려움에 이름을 붙이자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북극곰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로라는 프란시스를 바라보는 훈련을 꾸준히 했다. 그러자 두려움과 뒤엉켜있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두려움을 무서워하지 않는 법에 점차 익숙해졌다. 동일시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려움과 씨름하면서 로라는 관상기도 수련을 시작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알아차릴 때마다 기도낱말(거룩한 단어)로 돌아갔다. 새로운 내면의 습관이 형성되자 내적 침묵과 고요가 깊어졌고, 두려움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라는 두려움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두려움을 바라보면서 침묵 속에서 현존할 수 있었다. 두려움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로라는 더 이상 두려움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두려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실재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먹구름 뒤에 숨어있던 보름달처럼 나타났다. 생활현실 이면에 있는,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이었다. 영성현실을 알아차리자 새로운 의식의 차원이 열렸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빛나고 있었다.
두려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실재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먹구름 뒤에 숨어있던 보름달처럼 나타났다. 생활현실 이면에 있는,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이었다. 영성현실을 알아차리자 새로운 의식의 차원이 열렸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차리자 로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두려움은 깊은 침묵과 고요함 속에 머물러 기도하는 기회가 되었다. 둘째, 두려움은 마음을 휘젓는 공포에서 침묵의 통로로 변했다. 셋째, 두려움은 정복해야 할 적에서 깊은 침묵으로 이끄는 친구가 되었다. 넷째, 관상 수련을 통해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서 은총의 통로로 변형됐다.
벗, 그대의 북극곰은 무엇인가? 그대를 힘들게 하는 감정 상태는 무엇인가?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주시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그것과의 동일시에서 차츰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관상수련을 일상생활의 루틴으로 만들어라. 동일시의 틈이 벌어지는 만큼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드러날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하나님과 합일한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 마음으로 사는 당신이 바로 천국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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