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십자가, 직접성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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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5-04-17 10:44본문
해는 빛을 잃고,
성전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누가복음 23:45)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을 해는 빛을 잃고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곧이어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막이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내밀한 곳으로 하나님이 직접 현존하시는 장소였다. 휘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벽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종교적 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제사장이나 성전이라는 매개 구조 없이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직접성으로의 초대
십자가는 신앙 유형을 “간접유형”(mediated type)에서 “직접유형”(immediate type)으로 바꾼 혁명적 사건이다! “휘장”이 상징하는 모든 형태의 중재 구조는 십자가에서 해체되었다. 이 고요하고 무심한 나무 앞에서 신앙의 모든 중개, 매개, 간접성이 무너진다. 제사도, 성전도, 제도도, 경건해 보이는 어떤 중재 구조도 설 자리를 잃는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통로”를 만들었다. 형식적인 제사라는 통로, 권위적인 제사장이라는 통로, 경직된 율법이라는 통로를 만들었다. 그 통로들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통로들을 지날수록 제사는 번거로웠고, 제사장은 권위적이었고, 율법은 짐스러웠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직접 보라!” 하나님은 지성소에 갇혀있지 않고 “바깥”으로 나오셨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 제사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비아 돌로로사의 끝자락,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라.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아무 매개 없이, 중재자나 대리자 없이 나타나셨다. 알몸으로, 찢어진 몸으로, 피 흘리는 몸으로 나타나셨다. 내 몸처럼 살아 있는 몸으로, 내 몸처럼 죽을 몸으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나의 생처럼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그러나 나의 꿈처럼 순수하고 아릅답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몸으로 직접 다가오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십자가에서 너를 직접 사랑했다. 그러니 너도 나를 직접 사랑하여라. 나는 다른 무엇을 통한, 다른 누구를 거친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직접 사랑을, 너의 지금 사랑을, 너의 홀로 사랑을 원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저 아름다운 직접성의 영성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던 모든 종교장치를 해체한다. 십자가의 영성은 맨몸으로 날 것으로 십자가에서 부서지고 피 흘리신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는 영성이다. 이 바라봄은 거북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바라봄 속에서 내 영혼은 깨어나고, 나의 에고는 깨어진다. 하여, 십자가의 영성은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단순하게 응답한다. “아멘, 주님!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나이다. 내 몸을 주님께 바치나이다.”
직접성의 영성이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맨얼굴을 나의 순종의 맨가슴으로 모셔들이는 영성이다. 그 얼굴은 침묵 속에서 그윽하게 나를 바라본다. 가장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장 나중까지 기다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도 사랑의 침묵 속에서 그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본다. 이때 눈빛과 눈빛의 서로-만남은 기도가 된다. 하여, 가장 수치스러운 장소인 십자가는 가장 아름다운 성소로 변형된다. 말이 아닌 존재의 기도. 설명이 아닌 현존의 기도. 중개 없는 직접 사랑의 기도!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기도이며 가장 뜨거운 관상인 것이다.
직접성의 영성이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맨얼굴을 나의 순종의 맨가슴으로 모셔들이는 영성이다. 그 얼굴은 침묵 속에서 그윽하게 나를 바라본다. 가장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장 나중까지 기다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도 사랑의 침묵 속에서 그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본다. 이때 눈빛과 눈빛의 서로-만남은 기도가 된다.
이러한 십자가를 바라보는 기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 자신이 대리자 없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 맡길 수 있는 존재임을! 나는 마침내 영혼의 심연에서 감돌던 한마디 말을 꺼낸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면 충분합니다.”
신앙의 두 유형
제사 중심의 유대교는 전형적인 “간접유형” 신앙이다. 이와는 달리 십자가 중심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직접유형” 신앙이다. 직접성을 상실할 때 기독교는 “기독성”을 상실한다. 중세 말기의 기독교가 그랬다. 간접유형 신앙을 정교하고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였으며, 사제들은 각종 성사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한다. 신자는 사제라는 대리자를 통해야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다.
간접신앙의 극단적 왜곡이 바로 면죄부 판매다. 죄의 용서조차 금전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성인 숭배 역시 간접유형 신앙의 하나다. 성인들의 “전구”(轉求, 중보기도)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전통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이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유보하거나 지연시켰다. 또 중세 기독교는 성경에 대한 개별적 해석을 금지했다. 교회의 공식 해석을 통해서만, 즉 “교도권”(Magisterium)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도권도 신앙의 중개 체계로 전형적인 간접유형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의 간접 구조는 신앙 공동체의 질서와 통일성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자의적 성서해석과 이단이 난무하던 상황에서 교회는 “중보적 장치”들을 통해 신앙의 타락을 막았고, 자의적 해석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했다. 그러나 신앙의 간접 구조는 “개인의 직접적 하나님 경험”을 크게 제약했으며, 제도적 권위에 순응하는 미성숙한 신앙과 성직자에 의존하는 대리신앙을 초래했다.
이러한 간접유형 신앙에 대한 저항이 종교개혁이었다. 루터는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다”라고 선언하며,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성경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것도 신자가 직접 성경을 읽고 하나님 앞에 직접 서게 하려는 시도였다.
루터가 강조한 종교개혁의 삼대 원리는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고 선언하면서 공로(선행, 면죄부)라는 구원의 중개 장치를 비판한다.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은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선언하면서 교황이나 교도권, 성인이나 전통이라는 중개 장치를 비판한다.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은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임을 선언하면서 은총을 독점한 교회라는 중개 장치를 비판한다.
이러한 간접유형 신앙에 대한 저항이 종교개혁이었다....루터가 강조한 종교개혁의 삼대 원리는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신앙은 이제 더는 대리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직접 단독자로 서는 것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제도를 고치는 일이 아니었다. 신앙의 구조를 매개 구조에서 직접 구조로 바꾸는 일이었다. 교황이나 사제나 교권이나 교회나 전통이나 성인이나 면죄부를 거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신앙은 이제 더는 대리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직접 단독자로 서는 것이 되었다.
새로운 종교개혁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금 중세 기독교와 유사해졌다. 간접유형의 신앙 구조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설교 중심, 교리 중심, 교단 중심, 제도 중심의 신앙 유형으로 변질되면서 신앙의 직접성과 주체성을 강조했던 개신교 초기의 이상을 잃어버렸다.
한국 개신교는 이 구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를 구분함으로써 성직자 중심의 권위 구조를 강화했다. 평신도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고, 유명 목회자의 설교 영상이나 설교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타율적으로 말씀을 수용한다. 말씀을 직접 깨닫지도 체험하지도 못하는 종속된 신앙 구조가 굳어지고 말았다. 신앙은 목회자를 통해서만 성장하는 타율적 구조로 굳어졌다.
이러한 간접유형 신앙은 교리수호나 이단방지라는 명분으로 더욱 강화된다. 평신도의 자율적 경험과 해석은 억압되고, 성령의 조명보다 제도와 권위를 절대화하는 분위기가 조장된다. 그 결과 개신교는 루터가 비판했던 중세 말 기독교처럼 위계적 구조에 안주하고 말았다. 심지어 목회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급으로 여기는 우상화와 절대화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이것은 루터가 거부했던 교황 우상화나 교도권 절대화와 다르지 않다.
정작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신앙의 간접 구조에서 벗어나려고 치열하게 노렸했다. 평신도의 성경 읽기를 장려했고, 라틴어 미사 대신 모국어 미사를 도입했으며, 전례 안에서 신자의 능동적 참여와 주체적 응답을 강조했다.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응답하는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카리스마적 기도, 침묵과 고요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관상기도 등은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었다.
반면 개신교는 정교한 제도와 프로그램은 만들었지만,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서 직접” 만나는 영적 감각은 퇴화하고 있다. 교회는 종교활동을 소비하는 영적 서비스 센터가 되었고, 신앙은 “내가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가 믿으라는 하나님”으로 대체되었다. 종교개혁이 열어놓은 직접성의 문은 이렇게 다시 제도적・형식적・간접적 신앙 구조에 의해 닫히고 말았다.
이런 개신교 상황은 “새로운 종교개혁”(Second Reformation)을 요청한다. 교리나 조직의 개편이 아니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어떤 매개도 허락하지 않는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는 개혁말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여정이다.
- 이민재
성전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누가복음 23:45)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을 해는 빛을 잃고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곧이어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막이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내밀한 곳으로 하나님이 직접 현존하시는 장소였다. 휘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벽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종교적 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제사장이나 성전이라는 매개 구조 없이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직접성으로의 초대
십자가는 신앙 유형을 “간접유형”(mediated type)에서 “직접유형”(immediate type)으로 바꾼 혁명적 사건이다! “휘장”이 상징하는 모든 형태의 중재 구조는 십자가에서 해체되었다. 이 고요하고 무심한 나무 앞에서 신앙의 모든 중개, 매개, 간접성이 무너진다. 제사도, 성전도, 제도도, 경건해 보이는 어떤 중재 구조도 설 자리를 잃는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통로”를 만들었다. 형식적인 제사라는 통로, 권위적인 제사장이라는 통로, 경직된 율법이라는 통로를 만들었다. 그 통로들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통로들을 지날수록 제사는 번거로웠고, 제사장은 권위적이었고, 율법은 짐스러웠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직접 보라!” 하나님은 지성소에 갇혀있지 않고 “바깥”으로 나오셨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 제사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비아 돌로로사의 끝자락,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라.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아무 매개 없이, 중재자나 대리자 없이 나타나셨다. 알몸으로, 찢어진 몸으로, 피 흘리는 몸으로 나타나셨다. 내 몸처럼 살아 있는 몸으로, 내 몸처럼 죽을 몸으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나의 생처럼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그러나 나의 꿈처럼 순수하고 아릅답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몸으로 직접 다가오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십자가에서 너를 직접 사랑했다. 그러니 너도 나를 직접 사랑하여라. 나는 다른 무엇을 통한, 다른 누구를 거친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직접 사랑을, 너의 지금 사랑을, 너의 홀로 사랑을 원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저 아름다운 직접성의 영성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던 모든 종교장치를 해체한다. 십자가의 영성은 맨몸으로 날 것으로 십자가에서 부서지고 피 흘리신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는 영성이다. 이 바라봄은 거북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바라봄 속에서 내 영혼은 깨어나고, 나의 에고는 깨어진다. 하여, 십자가의 영성은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단순하게 응답한다. “아멘, 주님!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나이다. 내 몸을 주님께 바치나이다.”
직접성의 영성이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맨얼굴을 나의 순종의 맨가슴으로 모셔들이는 영성이다. 그 얼굴은 침묵 속에서 그윽하게 나를 바라본다. 가장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장 나중까지 기다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도 사랑의 침묵 속에서 그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본다. 이때 눈빛과 눈빛의 서로-만남은 기도가 된다. 하여, 가장 수치스러운 장소인 십자가는 가장 아름다운 성소로 변형된다. 말이 아닌 존재의 기도. 설명이 아닌 현존의 기도. 중개 없는 직접 사랑의 기도!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기도이며 가장 뜨거운 관상인 것이다.
직접성의 영성이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맨얼굴을 나의 순종의 맨가슴으로 모셔들이는 영성이다. 그 얼굴은 침묵 속에서 그윽하게 나를 바라본다. 가장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장 나중까지 기다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도 사랑의 침묵 속에서 그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본다. 이때 눈빛과 눈빛의 서로-만남은 기도가 된다.
이러한 십자가를 바라보는 기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 자신이 대리자 없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 맡길 수 있는 존재임을! 나는 마침내 영혼의 심연에서 감돌던 한마디 말을 꺼낸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면 충분합니다.”
신앙의 두 유형
제사 중심의 유대교는 전형적인 “간접유형” 신앙이다. 이와는 달리 십자가 중심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직접유형” 신앙이다. 직접성을 상실할 때 기독교는 “기독성”을 상실한다. 중세 말기의 기독교가 그랬다. 간접유형 신앙을 정교하고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였으며, 사제들은 각종 성사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한다. 신자는 사제라는 대리자를 통해야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다.
간접신앙의 극단적 왜곡이 바로 면죄부 판매다. 죄의 용서조차 금전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성인 숭배 역시 간접유형 신앙의 하나다. 성인들의 “전구”(轉求, 중보기도)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전통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이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유보하거나 지연시켰다. 또 중세 기독교는 성경에 대한 개별적 해석을 금지했다. 교회의 공식 해석을 통해서만, 즉 “교도권”(Magisterium)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도권도 신앙의 중개 체계로 전형적인 간접유형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의 간접 구조는 신앙 공동체의 질서와 통일성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자의적 성서해석과 이단이 난무하던 상황에서 교회는 “중보적 장치”들을 통해 신앙의 타락을 막았고, 자의적 해석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했다. 그러나 신앙의 간접 구조는 “개인의 직접적 하나님 경험”을 크게 제약했으며, 제도적 권위에 순응하는 미성숙한 신앙과 성직자에 의존하는 대리신앙을 초래했다.
이러한 간접유형 신앙에 대한 저항이 종교개혁이었다. 루터는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다”라고 선언하며,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성경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것도 신자가 직접 성경을 읽고 하나님 앞에 직접 서게 하려는 시도였다.
루터가 강조한 종교개혁의 삼대 원리는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고 선언하면서 공로(선행, 면죄부)라는 구원의 중개 장치를 비판한다.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은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선언하면서 교황이나 교도권, 성인이나 전통이라는 중개 장치를 비판한다.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은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임을 선언하면서 은총을 독점한 교회라는 중개 장치를 비판한다.
이러한 간접유형 신앙에 대한 저항이 종교개혁이었다....루터가 강조한 종교개혁의 삼대 원리는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신앙은 이제 더는 대리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직접 단독자로 서는 것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제도를 고치는 일이 아니었다. 신앙의 구조를 매개 구조에서 직접 구조로 바꾸는 일이었다. 교황이나 사제나 교권이나 교회나 전통이나 성인이나 면죄부를 거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신앙은 이제 더는 대리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직접 단독자로 서는 것이 되었다.
새로운 종교개혁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금 중세 기독교와 유사해졌다. 간접유형의 신앙 구조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설교 중심, 교리 중심, 교단 중심, 제도 중심의 신앙 유형으로 변질되면서 신앙의 직접성과 주체성을 강조했던 개신교 초기의 이상을 잃어버렸다.
한국 개신교는 이 구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를 구분함으로써 성직자 중심의 권위 구조를 강화했다. 평신도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고, 유명 목회자의 설교 영상이나 설교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타율적으로 말씀을 수용한다. 말씀을 직접 깨닫지도 체험하지도 못하는 종속된 신앙 구조가 굳어지고 말았다. 신앙은 목회자를 통해서만 성장하는 타율적 구조로 굳어졌다.
이러한 간접유형 신앙은 교리수호나 이단방지라는 명분으로 더욱 강화된다. 평신도의 자율적 경험과 해석은 억압되고, 성령의 조명보다 제도와 권위를 절대화하는 분위기가 조장된다. 그 결과 개신교는 루터가 비판했던 중세 말 기독교처럼 위계적 구조에 안주하고 말았다. 심지어 목회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급으로 여기는 우상화와 절대화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이것은 루터가 거부했던 교황 우상화나 교도권 절대화와 다르지 않다.
정작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신앙의 간접 구조에서 벗어나려고 치열하게 노렸했다. 평신도의 성경 읽기를 장려했고, 라틴어 미사 대신 모국어 미사를 도입했으며, 전례 안에서 신자의 능동적 참여와 주체적 응답을 강조했다.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응답하는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카리스마적 기도, 침묵과 고요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관상기도 등은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었다.
반면 개신교는 정교한 제도와 프로그램은 만들었지만,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서 직접” 만나는 영적 감각은 퇴화하고 있다. 교회는 종교활동을 소비하는 영적 서비스 센터가 되었고, 신앙은 “내가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가 믿으라는 하나님”으로 대체되었다. 종교개혁이 열어놓은 직접성의 문은 이렇게 다시 제도적・형식적・간접적 신앙 구조에 의해 닫히고 말았다.
이런 개신교 상황은 “새로운 종교개혁”(Second Reformation)을 요청한다. 교리나 조직의 개편이 아니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어떤 매개도 허락하지 않는 신앙의 직접성을 회복하는 개혁말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여정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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