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향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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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0회 작성일 25-04-06 21:34본문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 12:3)
십자가,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자기부인과 희생의 상징이며, 고통당하는 인간들과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공감과 위로의 기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가장 급진적인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무력(無力)과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 신비의 접점이다. 십자가는 언뜻 보면 패배와 죽음의 상징이지만, 자세히 관상하면 승리와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형광봉
하지만 십자가가 처음부터 그런 고상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로마에서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도구였다. 죄수의 옷은 벗겨졌는데 이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죽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하였다. 십자가형은 최대의 모욕과 극한의 고통을 주는 처형 방식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죽음의 도구를 생명의 통로로, 저주의 상징을 은총의 기호로, 수치의 자리를 영광의 성소로 변형시킨 것이다. 이러한 의미 변환은 십자가와 관련된 것들의 의미도 긍정적으로 바꿨다. 로마 병정들의 조롱의 놀잇감에 불과했던 가시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이 되었고, 패배자의 길이었던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는 비아 글로리오사(영광의 길)로 바뀌었다.
요즘은 어떤가. 십자가는 여전히 생명의 통로이며, 구원의 기호이며, 영광의 상징인가.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향해 “죽여라, 밟아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광장의 개신교도들에게도 십자가는 여전히 은총의 통로인가. 여전히 사랑의 상징인가. 오히려 십자가는 증오와 폭력, 저주와 죽음이라는 원래의 기호로 회귀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얼마나 기막힌 가치의 전도인가. 얼마나 기괴한 몰락의 조짐인가.
이와는 달리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광장의 다른 한쪽에서 매우 신선한 의미의 변환을 경험했다. 탄핵 정국에서 “빛의 혁명”을 주도한 형광봉 말이다. 형광봉은 원래 아이돌 콘서트에서 사용되던 응원 도구였다. 형광봉은 집단적 동일시의 황홀감에 빠져 자기중심적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였다. 형광봉을 흔드는 행위는 응원의 차원을 넘어 특정 아이돌과의 연결을 신화화하는 상징적 의례였다. 이때 아이돌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우상이 되고, 형광봉은 우상을 숭배하는 광신의 제기(祭器)가 된다.
이뿐 아니라 형광봉에는 배제와 공포의 코드가 숨겨져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색깔의 형광봉을 흔들 때, 다른 색깔을 흔들거나 아예 형광봉을 흔들지 않는 사람은 동일집단에서 배제되는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 형광봉은 배제를 통한 결합이라는 근본주의의 전략과 상통한다.
그런데 계엄과 탄핵 정국은 형광봉에 극적인 의미 변환을 일으켰다. 욕망, 우상, 집단, 배제, 소외, 공포의 기호였던 형광봉의 쓰임새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이기적 욕망의 시각적 형상화였던 형광봉이 공동체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상징이 되었다. 배제와 소외의 기호가 연대와 공존의 기호로 변했다. 인기 아이돌에 대한 숭배의 도구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이뿐 아니다. 아이돌과 맹목적 동일시를 추구하던 도구가 민주적 주체를 형성하는 도구로 변했다. 우상숭배를 조장하던 도구가 불의한 권력이라는 우상을 해체하는 저항과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의미의 변환인가.
형광봉의 이러한 의미 변환을 보며 방정맞은 물음들이 꼬리를 문다. 요즘 혐오와 저주의 상징으로 타락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주술과 번영신앙을 통해 탐욕의 상징이 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율법과 교리신앙을 통해 혐오의 도구가 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집단적 맹신을 통해 광기의 기호가 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구원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십자가는 다시 구원, 은총, 사랑, 연대, 혁명, 영광의 기호로 거듭날 수 있을까?
빛의 혁명, 김규리
그날, 나사로의 집
그날, 나사로의 집에선 오랜만에 잔치가 벌어졌다. 그 집은 한동안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었다. 가장(나사로)이 죽은 날부터 말소리도 웃음소리도 사라졌었다. 그런데 그날에는 떠들썩한 말소리가, 탄성과 놀라움이 뒤섞인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이다. 그러자 사자(死者)의 집이 생명의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마르다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음식을 만드는 손은 즐겁게 춤을 추었다. 종종걸음치며 사람들의 접시를 채웠고 포도주잔을 채웠다. 그녀의 마음엔 벅찬 감사가 훌렀다. 나사로의 숨소리를 감지할 때마다 생시인가 꿈인가 했다. 마음에선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도 즐거워 보였다. 그분에게선 죽음의 권세를 이긴 생명의 후광이 밝게 빛났고, 신성한 존엄의 아우라가 은은히 풍겼다.
그때, 마리아가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는 나드 향유가 들려있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본 것도 잠시, 그다음에 벌어진 일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아가 갑자기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더니 자기 머리털로 닦는 것이었다.(요 12:3)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룟 유다의 말처럼 노동자의 일 년 치 임금에 맞먹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귀한 것을 허비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머리털로 발을 닦는 광경은 경악스러웠다.
유대 문화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은 은밀함과 정절의 상징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 행태는 간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기 머리털로 남자의 발을 닦는 행위는 상대가 아무리 예수님이어도 당시의 관습과 금기를 깨뜨리는 파격(破格)의 파격이었다. 이뿐 아니라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여자 주인이 남자 손님의 발을 닦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향유
하지만 통념의 비늘을 벗어버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상황이 보인다. 체면과 금기를 넘어선 마리아의 사랑이 보인다.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행위에서는 극도의 겸손과 자기 낮춤이 보인다. 이러한 낮춤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한”(빌 2:6) 그리스도와 닮았다. 그렇기에 어느 신학자(틸리히)가 “거룩한 낭비”라고 표현한 마리아의 행위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가룟 유다가,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다며 마리아를 책망했을 때, 예수님은 “그대로 두어라”고 하시며 마리아 편을 들어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있다. “향유” 말이다. 사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향유다. 향유가 없었다면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도, 겸손과 자기 낮춤도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유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또 다른 의미가 읽힌다.
향유는 아주 값진 물질이다. 삼백 데나리온 곧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할 정도로. 그런데 그 향유가 예수의 발에 아낌없이 부어졌다. 샌들을 신었어도 먼지와 얼룩으로 더러워졌을 그 발에. 그런데 그 향유 덕분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요 12:3)
벗들은 향유에서 무엇을 또는 누구를 연상하는가? 예, 수, 님! 예수님이야말로 향유처럼 존귀한 분으로, 자기 피를 죄와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아낌없이 쏟으신 분이다. 그럼으로써 구원의 향기를 인류의 “온 집안”에 가득 채우신 분이다. 맞다, 예수님은 향유의 삶을 사셨다. 아니 스스로 향유이셨다! 비아 크루치스(Via Crucis) 곧 십자가의 길은 향유이신 예수님이 사랑의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붓는 여정이었다. 하여 인류 역사는 다시 희망을, 다시 구원을 노래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야말로 향유처럼 존귀한 분으로, 자기 피를 죄와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아낌없이 쏟으신 분이다. 그럼으로써 구원의 향기를 인류의 “온 집안”에 가득 채우신 분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사순절에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가 향유의 삶을 살아갈 차례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참자아를 깨달은 존귀한 우리, 이제는 참자아의 향유를 죄와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쏟아부어야 한다. 일상이라는 “온 집안에” 참자아의 향유 냄새를 가득 채워야 한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의미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타락한 십자가를 다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자아의 향유를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쏟아붓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응답
지난 금요일 우리는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들었다. 많은 국민들이 환호했고 기뻐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와 민주주의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대한민국의 정의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정의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하여 정의의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심을 느꼈다.
지난 넉 달 동안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광장에서 폭력을 선동하며 탄핵 반대를 외쳤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그런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시국기도회는 끊임없이 열렸었다. 새해에 접어들면서 나도 매일 이렇게 기도했다.
무심 예수 그리스도
참자아의 원형이시여
자기 뜻 꺾어 하늘 뜻 받든이여
(중략)
역사에 깃든 섭리 보게 하시며
일상에 스미는 은혜 맛보게 하소서
이제껏 고생한 생활현실 환히
웃게 하소서 빛나게 하소서
마침내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다. 첫째, 하나님은 역사에 깃든 섭리를 보게 하셨다. 대한민국 최고 재판관들의 지성과 양심, 양식과 상식을 통해 불법과 위헌을 단죄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살려주셨고 정의를 구현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셨다.
둘째, 일상에 스미는 은혜를 맛보게 하셨다. 탄핵이 인용되었을 때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제 편히 잠잘 수 있겠다고.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셨다.
셋째, 이제껏 고생한 생활현실이 마침내 환히 웃게 하셨다.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시민이 내란 불면증에 시달리며, 눈비 찬바람 맞으며 광장에서 고생했는가. 마침내 우리는 시편 시인과 함께 노래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일을 하셨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시 126:3)
그러고 보니 그들이 향유였다! 진리의 편에 서고, 정의의 편에 섰던 무명의 시민들, 그들이 2025년 대한민국의 향유였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향유를, 돈이라는 향유를, 정성이라는 향유를, 갈망이라는 향유를, 개인의 행복이라는 향유를 계엄과 내란으로 더러워진 대한민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 향유들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민주주의를 살렸고, 정의를 구현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향유였다! 진리의 편에 서고, 정의의 편에 섰던 무명의 시민들, 그들이 2025년 대한민국의 향유였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향유를, 돈이라는 향유를, 정성이라는 향유를, 갈망이라는 향유를, 개인의 행복이라는 향유를 계엄과 내란으로 더러워진 대한민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수많은 향유들 중에서 나는 어떤 향유를 잊을 수 없다. 눈발 날리는 혹한에서도 며칠씩 밤을 새우며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온몸으로 기도했던 이름 없는 향유를.
십자가가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면 도리가 없다. 향유가 되어 향유를 쏟는 일 외에는. 우리의 “온 집안”을 참자아의 향기로 가득 채우는 일 외에는. 그렇다면 십자가는 다시 구원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급진적인 표현으로, 자기부인과 희생의 형상으로 재창조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감과 위로의 기호로, 무력(無力)과 은총이 만나는 신비의 접점으로, 마침내 승리와 부활의 상징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타락한 십자가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구원과 함께 한국교회도 구원받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는 마음에 찬송이 울려퍼진다.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586장)
- 이민재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 12:3)
십자가,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자기부인과 희생의 상징이며, 고통당하는 인간들과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공감과 위로의 기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가장 급진적인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무력(無力)과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 신비의 접점이다. 십자가는 언뜻 보면 패배와 죽음의 상징이지만, 자세히 관상하면 승리와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형광봉
하지만 십자가가 처음부터 그런 고상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로마에서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도구였다. 죄수의 옷은 벗겨졌는데 이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죽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하였다. 십자가형은 최대의 모욕과 극한의 고통을 주는 처형 방식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죽음의 도구를 생명의 통로로, 저주의 상징을 은총의 기호로, 수치의 자리를 영광의 성소로 변형시킨 것이다. 이러한 의미 변환은 십자가와 관련된 것들의 의미도 긍정적으로 바꿨다. 로마 병정들의 조롱의 놀잇감에 불과했던 가시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이 되었고, 패배자의 길이었던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는 비아 글로리오사(영광의 길)로 바뀌었다.
요즘은 어떤가. 십자가는 여전히 생명의 통로이며, 구원의 기호이며, 영광의 상징인가.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향해 “죽여라, 밟아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광장의 개신교도들에게도 십자가는 여전히 은총의 통로인가. 여전히 사랑의 상징인가. 오히려 십자가는 증오와 폭력, 저주와 죽음이라는 원래의 기호로 회귀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얼마나 기막힌 가치의 전도인가. 얼마나 기괴한 몰락의 조짐인가.
이와는 달리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광장의 다른 한쪽에서 매우 신선한 의미의 변환을 경험했다. 탄핵 정국에서 “빛의 혁명”을 주도한 형광봉 말이다. 형광봉은 원래 아이돌 콘서트에서 사용되던 응원 도구였다. 형광봉은 집단적 동일시의 황홀감에 빠져 자기중심적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였다. 형광봉을 흔드는 행위는 응원의 차원을 넘어 특정 아이돌과의 연결을 신화화하는 상징적 의례였다. 이때 아이돌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우상이 되고, 형광봉은 우상을 숭배하는 광신의 제기(祭器)가 된다.
이뿐 아니라 형광봉에는 배제와 공포의 코드가 숨겨져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색깔의 형광봉을 흔들 때, 다른 색깔을 흔들거나 아예 형광봉을 흔들지 않는 사람은 동일집단에서 배제되는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 형광봉은 배제를 통한 결합이라는 근본주의의 전략과 상통한다.
그런데 계엄과 탄핵 정국은 형광봉에 극적인 의미 변환을 일으켰다. 욕망, 우상, 집단, 배제, 소외, 공포의 기호였던 형광봉의 쓰임새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이기적 욕망의 시각적 형상화였던 형광봉이 공동체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상징이 되었다. 배제와 소외의 기호가 연대와 공존의 기호로 변했다. 인기 아이돌에 대한 숭배의 도구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이뿐 아니다. 아이돌과 맹목적 동일시를 추구하던 도구가 민주적 주체를 형성하는 도구로 변했다. 우상숭배를 조장하던 도구가 불의한 권력이라는 우상을 해체하는 저항과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의미의 변환인가.
형광봉의 이러한 의미 변환을 보며 방정맞은 물음들이 꼬리를 문다. 요즘 혐오와 저주의 상징으로 타락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주술과 번영신앙을 통해 탐욕의 상징이 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율법과 교리신앙을 통해 혐오의 도구가 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집단적 맹신을 통해 광기의 기호가 된 십자가에 희망이 있을까? 구원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십자가는 다시 구원, 은총, 사랑, 연대, 혁명, 영광의 기호로 거듭날 수 있을까?
빛의 혁명, 김규리
그날, 나사로의 집
그날, 나사로의 집에선 오랜만에 잔치가 벌어졌다. 그 집은 한동안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었다. 가장(나사로)이 죽은 날부터 말소리도 웃음소리도 사라졌었다. 그런데 그날에는 떠들썩한 말소리가, 탄성과 놀라움이 뒤섞인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이다. 그러자 사자(死者)의 집이 생명의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마르다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음식을 만드는 손은 즐겁게 춤을 추었다. 종종걸음치며 사람들의 접시를 채웠고 포도주잔을 채웠다. 그녀의 마음엔 벅찬 감사가 훌렀다. 나사로의 숨소리를 감지할 때마다 생시인가 꿈인가 했다. 마음에선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도 즐거워 보였다. 그분에게선 죽음의 권세를 이긴 생명의 후광이 밝게 빛났고, 신성한 존엄의 아우라가 은은히 풍겼다.
그때, 마리아가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는 나드 향유가 들려있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본 것도 잠시, 그다음에 벌어진 일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아가 갑자기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더니 자기 머리털로 닦는 것이었다.(요 12:3)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룟 유다의 말처럼 노동자의 일 년 치 임금에 맞먹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귀한 것을 허비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머리털로 발을 닦는 광경은 경악스러웠다.
유대 문화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은 은밀함과 정절의 상징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 행태는 간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기 머리털로 남자의 발을 닦는 행위는 상대가 아무리 예수님이어도 당시의 관습과 금기를 깨뜨리는 파격(破格)의 파격이었다. 이뿐 아니라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여자 주인이 남자 손님의 발을 닦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향유
하지만 통념의 비늘을 벗어버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상황이 보인다. 체면과 금기를 넘어선 마리아의 사랑이 보인다.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행위에서는 극도의 겸손과 자기 낮춤이 보인다. 이러한 낮춤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한”(빌 2:6) 그리스도와 닮았다. 그렇기에 어느 신학자(틸리히)가 “거룩한 낭비”라고 표현한 마리아의 행위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가룟 유다가,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다며 마리아를 책망했을 때, 예수님은 “그대로 두어라”고 하시며 마리아 편을 들어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있다. “향유” 말이다. 사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향유다. 향유가 없었다면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도, 겸손과 자기 낮춤도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유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또 다른 의미가 읽힌다.
향유는 아주 값진 물질이다. 삼백 데나리온 곧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할 정도로. 그런데 그 향유가 예수의 발에 아낌없이 부어졌다. 샌들을 신었어도 먼지와 얼룩으로 더러워졌을 그 발에. 그런데 그 향유 덕분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요 12:3)
벗들은 향유에서 무엇을 또는 누구를 연상하는가? 예, 수, 님! 예수님이야말로 향유처럼 존귀한 분으로, 자기 피를 죄와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아낌없이 쏟으신 분이다. 그럼으로써 구원의 향기를 인류의 “온 집안”에 가득 채우신 분이다. 맞다, 예수님은 향유의 삶을 사셨다. 아니 스스로 향유이셨다! 비아 크루치스(Via Crucis) 곧 십자가의 길은 향유이신 예수님이 사랑의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붓는 여정이었다. 하여 인류 역사는 다시 희망을, 다시 구원을 노래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야말로 향유처럼 존귀한 분으로, 자기 피를 죄와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아낌없이 쏟으신 분이다. 그럼으로써 구원의 향기를 인류의 “온 집안”에 가득 채우신 분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사순절에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가 향유의 삶을 살아갈 차례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참자아를 깨달은 존귀한 우리, 이제는 참자아의 향유를 죄와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쏟아부어야 한다. 일상이라는 “온 집안에” 참자아의 향유 냄새를 가득 채워야 한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의미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타락한 십자가를 다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자아의 향유를 불의로 얼룩진 역사의 제단에 쏟아붓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응답
지난 금요일 우리는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들었다. 많은 국민들이 환호했고 기뻐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와 민주주의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대한민국의 정의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정의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하여 정의의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심을 느꼈다.
지난 넉 달 동안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광장에서 폭력을 선동하며 탄핵 반대를 외쳤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그런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시국기도회는 끊임없이 열렸었다. 새해에 접어들면서 나도 매일 이렇게 기도했다.
무심 예수 그리스도
참자아의 원형이시여
자기 뜻 꺾어 하늘 뜻 받든이여
(중략)
역사에 깃든 섭리 보게 하시며
일상에 스미는 은혜 맛보게 하소서
이제껏 고생한 생활현실 환히
웃게 하소서 빛나게 하소서
마침내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다. 첫째, 하나님은 역사에 깃든 섭리를 보게 하셨다. 대한민국 최고 재판관들의 지성과 양심, 양식과 상식을 통해 불법과 위헌을 단죄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살려주셨고 정의를 구현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셨다.
둘째, 일상에 스미는 은혜를 맛보게 하셨다. 탄핵이 인용되었을 때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제 편히 잠잘 수 있겠다고.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셨다.
셋째, 이제껏 고생한 생활현실이 마침내 환히 웃게 하셨다.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시민이 내란 불면증에 시달리며, 눈비 찬바람 맞으며 광장에서 고생했는가. 마침내 우리는 시편 시인과 함께 노래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일을 하셨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시 126:3)
그러고 보니 그들이 향유였다! 진리의 편에 서고, 정의의 편에 섰던 무명의 시민들, 그들이 2025년 대한민국의 향유였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향유를, 돈이라는 향유를, 정성이라는 향유를, 갈망이라는 향유를, 개인의 행복이라는 향유를 계엄과 내란으로 더러워진 대한민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 향유들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민주주의를 살렸고, 정의를 구현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향유였다! 진리의 편에 서고, 정의의 편에 섰던 무명의 시민들, 그들이 2025년 대한민국의 향유였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향유를, 돈이라는 향유를, 정성이라는 향유를, 갈망이라는 향유를, 개인의 행복이라는 향유를 계엄과 내란으로 더러워진 대한민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수많은 향유들 중에서 나는 어떤 향유를 잊을 수 없다. 눈발 날리는 혹한에서도 며칠씩 밤을 새우며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온몸으로 기도했던 이름 없는 향유를.
십자가가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면 도리가 없다. 향유가 되어 향유를 쏟는 일 외에는. 우리의 “온 집안”을 참자아의 향기로 가득 채우는 일 외에는. 그렇다면 십자가는 다시 구원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급진적인 표현으로, 자기부인과 희생의 형상으로 재창조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감과 위로의 기호로, 무력(無力)과 은총이 만나는 신비의 접점으로, 마침내 승리와 부활의 상징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타락한 십자가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구원과 함께 한국교회도 구원받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는 마음에 찬송이 울려퍼진다.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586장)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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