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탕자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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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35회 작성일 25-04-06 21:33본문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눅 15:22, 24b)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에는 다양한 주제가 들어있다. 불완전한 회개와 완전한 회개, 하나님 사랑의 본질,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 등이 그렇다.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춰 그를 변호하거나 비판할 수도 있다.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작은아들의 삶은 네 시기로, 곧 가출 이전, 가출 이후, 귀향 과정, 귀향 이후로 구분된다. 이러한 작은아들의 삶은 인간의 성장과 신앙 발달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가출 이전
작은아들이 가출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정보를 성경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챙기려 한 점과 귀향했을 때 환대받는 모습(좋은 옷, 신발, 반지, 잔치 등) 에서 이 집이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아들은 풍요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일방적인 내리사랑을 충분히 의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도 그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간접적으로(mediatedly) 충족되었을 것이다. 직접성(immediacy)을 결여할 때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누군가에 의해 “중재되고”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삶은 풍요 속에서도 결핍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결핍은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행복이 있으리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직접성(immediacy)을 결여할 때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누군가에 의해 “중재되고”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삶은 풍요 속에서도 결핍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결핍은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행복이 있으리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본문 중에서-
작은아들의 가출 이전의 삶은 폴 틸리히가 말한 타율적 삶(heteronomy)에 가깝다. 아버지의 집에서 편안하게 살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주어진 규범과 전통과 규율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어느 날 작은아들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충동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풍요 속의 불만에서 분출하는 “어떤” 행복에 대한 막연한 욕망을 더는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안 했으면 좋았을 말,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라는 말을 뱉었고, 며칠 뒤 “제 것을 다 챙겨서” 집을 떠났다. 배은망덕해 보이지만, 최초의 주체적인 결단이었다. 독립과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뗀 것이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며, 그렇기에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가출 이후
가출한 이후 시기는 작은아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한 시기이다. 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스스로 단절하는 모험이었다. 아버지의 품(또는 간섭)에서 벗어난 그는 자유를 맘껏 누리며 자신의 욕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쓰고 아렸다. 순간적 쾌락 이후에 밀려오는 공허는 견디기 어려웠다. 기근과 가난에 찌들어가는 삶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뒤범벅되고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소외감도 컸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외, 형을 비롯한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품꾼들을 비롯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등.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다. 자초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돈 있을 때 모여든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았을 때는 소외감에 배신감이 더해져 더 처참했다. 그런 소외감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경우가 달랐다. 자기를 찾겠다고 집을 떠났지만, 자기를 찾기는커녕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밀려올 때는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작은아들의 가출 이후 시기는 타락과 방황의 시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은아들은 생애 최초로 자기 의지와 자기판단에 따라 자기의 삶을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경험을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에게 이건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했고,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아닌 것인지”를! 그것도 스스로, 주체적으로, 직접적으로(immediately)! 이러한 실패를 통해 그는 비로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단계가 바로 틸리히가 말하는 자율적 단계의 삶(autonomy)이다. 작은아들은 이제 외부에서 (타율적으로) 부과된 규율과 전통에서 벗어나 자기의 삶을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선택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래야만 자기만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신성한 뿌리를 망각할 때 자율적 삶은 결핍 공허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작은아들은 이러한 실존적 궁지를 구체적으로 직접 생생하게 경험했다. 하지만 성장하려면 이러한 자율적 삶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신성한 뿌리를 망각할 때 자율적 삶은 결핍 공허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작은아들은 이러한 실존적 궁지를 구체적으로 직접 생생하게 경험했다. 하지만 성장하려면 이러한 자율적 삶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본문 중에서-
물론 자율적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율의 가면을 쓴 또 다른 타율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율적 삶을 선택한 사람을 말릴 수도 없다.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귀향
작은아들은 실패를 처절하게 겪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눅 15:17) 자신의 실상을 정확하게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새로운 도약을 가능하게 한, 구체적으로 말해 귀향을 가능하게 한 내적 동력이었다. 다음과 같은 작은아들의 독백에는 성숙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들어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눅 15:17-19)
첫째, “실존적 각성.”(Existential Awakening)
작은아들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그는 두 가지 위기를 깨달았다. 하나는 “정체성의 위기”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위기”이다. 작은아들은 자신을 품꾼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며, 삶이 한계상황에 다다랐음을 직감한다. 욕망을 따라 선택한 삶의 결과를 생생하게 깨닫는다. 하지만 정체성의 위기와 삶의 위기에 대한 실존적 각성은 진정한 자기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한 실존적 결단의 디딤돌이 되었다.
둘째, “자기객관화.”(Self-objectificaion)
작은아들은 실존적 각성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자기객관화는 성숙한 인격의 필수 자질이다. 자기객관화를 통해 작은아들은 욕망에 지배받는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고, 막연한 환상과 엄정한 현실 사이의 간격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희망적이게도 작은아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한다. 성숙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셋째, “진정한 겸손.”(True Humility)
작은아들은 자신의 실상과 삶의 상황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인정을 통해 욕망 중심의 행복 추구가 실패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고백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눅 15:19) 작은아들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죄의 자각이다. 또 작은 아들은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한다. 이것은 열등감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라 진정한 겸손이다. 솔직한 자기 인식이야말로 겸손의 시작인 까닭이다. 겸손은 용기 있는 자기 긍정이며, 인격 성숙과 삶의 완성을 향한 아름다운 출발점이다.
귀향 이후
실존적 각성과 자기객관화, 그리고 진정한 겸손에 이른 작은아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현실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 작은아들은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을 꺼낸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중간에 말을 끊는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을 맺기도 전에. 아버지는 서두르며 종들에게 말한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23)
작은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는다. 과거에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하여 의식조차 못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명료하게 의식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회개”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었다. 회개는 아버지를 만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냥-용서”였다. 아버지의 존재 용서 자체였다. 회개가 아니라, 돌아옴, 귀향, 그것이면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회개”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었다. 회개는 아버지를 만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냥-용서”였다. 아버지의 존재 용서 자체였다. 회개가 아니라, 돌아옴, 귀향, 그것이면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였다.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명예로운 신분을 회복시킨다. 아버지는 “반지도 끼워준다.” 아들이라는 신분과 함께 상속권을 회복시킨다. 아버지는 “신”도 신겨준다. 자유인의 존엄을 회복시킨다.
추측하건대, 아버지의 집에서 작은아들은 욕망 중심에서 가치 중심(아버지의 뜻)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다. 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참자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독립적인 주체인 동시에 성숙한 주체로서 아버지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낭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단계는 틸리히가 말한 신율적 삶(theonomy)에 해당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율적 삶은 “자신의 신성한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다.” 신율적 삶은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타율적으로) 지키려고 애쓰지 않고, 스스로(자율적으로) 따른다. 신율적 삶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창조성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한다. 이때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또 인간의 “자기-망각의 응시”와 하나님의 “자기-증여의 응시” 속에서 사랑은 깊어지고 충만해진다. 이러한 사랑의 깊이와 충만에서 타자를 향한 섬김과 대속의 동력이 샘솟는다. 마침내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고전 9:19)를 실현한다.
- 이민재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눅 15:22, 24b)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에는 다양한 주제가 들어있다. 불완전한 회개와 완전한 회개, 하나님 사랑의 본질,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 등이 그렇다.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춰 그를 변호하거나 비판할 수도 있다.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작은아들의 삶은 네 시기로, 곧 가출 이전, 가출 이후, 귀향 과정, 귀향 이후로 구분된다. 이러한 작은아들의 삶은 인간의 성장과 신앙 발달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가출 이전
작은아들이 가출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정보를 성경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챙기려 한 점과 귀향했을 때 환대받는 모습(좋은 옷, 신발, 반지, 잔치 등) 에서 이 집이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아들은 풍요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일방적인 내리사랑을 충분히 의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도 그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간접적으로(mediatedly) 충족되었을 것이다. 직접성(immediacy)을 결여할 때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누군가에 의해 “중재되고”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삶은 풍요 속에서도 결핍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결핍은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행복이 있으리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직접성(immediacy)을 결여할 때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누군가에 의해 “중재되고”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삶은 풍요 속에서도 결핍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결핍은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행복이 있으리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본문 중에서-
작은아들의 가출 이전의 삶은 폴 틸리히가 말한 타율적 삶(heteronomy)에 가깝다. 아버지의 집에서 편안하게 살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주어진 규범과 전통과 규율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어느 날 작은아들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충동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풍요 속의 불만에서 분출하는 “어떤” 행복에 대한 막연한 욕망을 더는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안 했으면 좋았을 말,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라는 말을 뱉었고, 며칠 뒤 “제 것을 다 챙겨서” 집을 떠났다. 배은망덕해 보이지만, 최초의 주체적인 결단이었다. 독립과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뗀 것이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며, 그렇기에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가출 이후
가출한 이후 시기는 작은아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한 시기이다. 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스스로 단절하는 모험이었다. 아버지의 품(또는 간섭)에서 벗어난 그는 자유를 맘껏 누리며 자신의 욕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쓰고 아렸다. 순간적 쾌락 이후에 밀려오는 공허는 견디기 어려웠다. 기근과 가난에 찌들어가는 삶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뒤범벅되고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소외감도 컸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외, 형을 비롯한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품꾼들을 비롯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등.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다. 자초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돈 있을 때 모여든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았을 때는 소외감에 배신감이 더해져 더 처참했다. 그런 소외감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경우가 달랐다. 자기를 찾겠다고 집을 떠났지만, 자기를 찾기는커녕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밀려올 때는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작은아들의 가출 이후 시기는 타락과 방황의 시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은아들은 생애 최초로 자기 의지와 자기판단에 따라 자기의 삶을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경험을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에게 이건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했고,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아닌 것인지”를! 그것도 스스로, 주체적으로, 직접적으로(immediately)! 이러한 실패를 통해 그는 비로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단계가 바로 틸리히가 말하는 자율적 단계의 삶(autonomy)이다. 작은아들은 이제 외부에서 (타율적으로) 부과된 규율과 전통에서 벗어나 자기의 삶을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선택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래야만 자기만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신성한 뿌리를 망각할 때 자율적 삶은 결핍 공허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작은아들은 이러한 실존적 궁지를 구체적으로 직접 생생하게 경험했다. 하지만 성장하려면 이러한 자율적 삶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신성한 뿌리를 망각할 때 자율적 삶은 결핍 공허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작은아들은 이러한 실존적 궁지를 구체적으로 직접 생생하게 경험했다. 하지만 성장하려면 이러한 자율적 삶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본문 중에서-
물론 자율적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율의 가면을 쓴 또 다른 타율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율적 삶을 선택한 사람을 말릴 수도 없다.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귀향
작은아들은 실패를 처절하게 겪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눅 15:17) 자신의 실상을 정확하게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새로운 도약을 가능하게 한, 구체적으로 말해 귀향을 가능하게 한 내적 동력이었다. 다음과 같은 작은아들의 독백에는 성숙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들어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눅 15:17-19)
첫째, “실존적 각성.”(Existential Awakening)
작은아들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그는 두 가지 위기를 깨달았다. 하나는 “정체성의 위기”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위기”이다. 작은아들은 자신을 품꾼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며, 삶이 한계상황에 다다랐음을 직감한다. 욕망을 따라 선택한 삶의 결과를 생생하게 깨닫는다. 하지만 정체성의 위기와 삶의 위기에 대한 실존적 각성은 진정한 자기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한 실존적 결단의 디딤돌이 되었다.
둘째, “자기객관화.”(Self-objectificaion)
작은아들은 실존적 각성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자기객관화는 성숙한 인격의 필수 자질이다. 자기객관화를 통해 작은아들은 욕망에 지배받는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고, 막연한 환상과 엄정한 현실 사이의 간격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희망적이게도 작은아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한다. 성숙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셋째, “진정한 겸손.”(True Humility)
작은아들은 자신의 실상과 삶의 상황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인정을 통해 욕망 중심의 행복 추구가 실패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고백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눅 15:19) 작은아들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죄의 자각이다. 또 작은 아들은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한다. 이것은 열등감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라 진정한 겸손이다. 솔직한 자기 인식이야말로 겸손의 시작인 까닭이다. 겸손은 용기 있는 자기 긍정이며, 인격 성숙과 삶의 완성을 향한 아름다운 출발점이다.
귀향 이후
실존적 각성과 자기객관화, 그리고 진정한 겸손에 이른 작은아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현실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 작은아들은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을 꺼낸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중간에 말을 끊는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을 맺기도 전에. 아버지는 서두르며 종들에게 말한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23)
작은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는다. 과거에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하여 의식조차 못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명료하게 의식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회개”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었다. 회개는 아버지를 만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냥-용서”였다. 아버지의 존재 용서 자체였다. 회개가 아니라, 돌아옴, 귀향, 그것이면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회개”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었다. 회개는 아버지를 만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냥-용서”였다. 아버지의 존재 용서 자체였다. 회개가 아니라, 돌아옴, 귀향, 그것이면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였다.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명예로운 신분을 회복시킨다. 아버지는 “반지도 끼워준다.” 아들이라는 신분과 함께 상속권을 회복시킨다. 아버지는 “신”도 신겨준다. 자유인의 존엄을 회복시킨다.
추측하건대, 아버지의 집에서 작은아들은 욕망 중심에서 가치 중심(아버지의 뜻)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다. 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참자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독립적인 주체인 동시에 성숙한 주체로서 아버지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낭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단계는 틸리히가 말한 신율적 삶(theonomy)에 해당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율적 삶은 “자신의 신성한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다.” 신율적 삶은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타율적으로) 지키려고 애쓰지 않고, 스스로(자율적으로) 따른다. 신율적 삶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창조성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한다. 이때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또 인간의 “자기-망각의 응시”와 하나님의 “자기-증여의 응시” 속에서 사랑은 깊어지고 충만해진다. 이러한 사랑의 깊이와 충만에서 타자를 향한 섬김과 대속의 동력이 샘솟는다. 마침내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고전 9:19)를 실현한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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