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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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58회 작성일 24-07-24 10:15본문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 2:2-3)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골 2:5)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
(마 12:6)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골 2:5)바울은 골로새교회 길벗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편지 앞부분에서 “깨달음에서 생기는 충만한 확신의 모든 풍요에 이르라”(골 2:2b) 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깨달음”과 관련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길벗들이 뭔가 깨닫기를, 그 깨달음을 확신하기를, 그 확신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대체 뭘 깨닫기를 바라는 걸까?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골 2:3)을,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신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나의 경우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는 무엇일까. 다음의 사진에는 내가 깨달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들어 있다. 이 사진에서 약간 초췌해 보이는 남자는 뭔가를 바라본다. 남자 뒤에는 빛나는 지구가 있고, 그 배후에 밤하늘(우주)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인다.
이 사진은 남자가 줌zoom으로 강의할 때 사용하는 배경 사진이다. 남자는 줌에서 제공하는 여러 배경 사진 중에서 하필이면 왜 이 사진을 골랐을까? 마음이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왜 마음이 끌렸을까? 이 사진은 남자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사진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어느 날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남자는 물론 나다. 이 한 장의 사진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나의 깨달음이 들어있다. 이 사진에서 나를 찾아보라고 한다면 벗들은 안경을 쓴 초췌한 나를 가리킬 것이다. 맞다. 그건 나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나일 뿐, 나의 전부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나의 “겉사람”일 뿐이다.
나는 이 사진을 내면화해본다. 그러면 내 안에 내면의 우주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내면의 우주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빛으로 둘러싸인 지구가 상징하는 내가 보인다. 순수와 진실을 갈망하는 내가 보인다. 연민과 공감을 표현하는 내가 보인다. 용납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내가 보인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기까지 하다. 그게 나의 참자아다. 나의 참자아는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뿐 아니다. 지구 뒤에 우주가 무한하게 펼쳐진 것처럼 내 참자아의 배후에도 무한한 신비(어둠)이신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 무한한 어둠 안에는 무수한 별들이 떠 있다. 별들은 온갖 시련 속에서 믿음을 지킨 참된 신앙인들이다. 사도들, 교부들, 사막의 수도사들, 신비가들, 성인들, 종교개혁자들, 의인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골 1:22)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골 1:28) 되기 위하여 분투한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참자아 상태에서 복음적 가치를 실천하려고 애쓴 사람들이다. 벗들도 이 별들 중 하나일 것이다.
또 별들은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이 섬긴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안토니우스의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 성 베네딕트의 하나님, 에크하르트의 하나님,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 루터의 하나님, 웨슬리의 하나님, 본회퍼의 하나님.... 벗들이 경험한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리고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선물들과 완전한 은사들”(약 1:17), 지혜, 지식, 사랑, 자비, 정의, 평화, 위로, 친절, 용서, 경건 같은 것들이다. 그 수많은 하나님과 은총의 별들을 무한한 “어둠-하나님”이 품고 있다. 어둠-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하나다. 그래서 어둠-하나님을 “하나-님” 또는 “일자”一者, the One, Oneness라고도 한다.
지혜와 지식의 보화
사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다. 나는 겉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의 참자아를 직관할 때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며, 우주를 담을 만큼 큰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런 존재의 진실을 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통해 배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겉사람이 전부인 줄 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서 보여주는 사회적 자아(엄마, 아빠, 아들, 딸, 남편, 아내, 선생님, 학생, 교장, 교감, 교수, 평사원, 대리, 과장, 부장, 사장, 박사, 의사, 검사, 판사, 목사)가 자기인 줄 안다. 그것은 페르소나일 뿐이다. 물론 생활현실(생존세계)에서 페르소나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는 빛나는 지구가 상징하는 참자아 즉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잠깐 지구에 대해 묵상해보자. 지구는 원래 아름다운 곳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 “좋다, 좋다!”를 연발하셨을까.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는 “매우 좋다!”고 탄성을 지르기까지 하셨다. 그런데 요즘 지구의 형편은 말이 아니다. 기후 위기로 몸살을 앓고,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대기 오염은 심해지고, 토양은 황폐화되고, 바다는 각종 쓰레기와 방사능 폐수로 오염되고, 물 부족과 식량 부족이 심화되고,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창궐하고, 폭염과 폭설과 가뭄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존재의 형편이 그렇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참 본성 즉 참자아다. 그런데 참자아를 각성하고 거기에 뿌리내린 삶을 살지 않으니 거짓자아가 극성을 부린다. 거짓자아는 행복의 나라여야 할 삶을 악마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짓자아의 자기중심성(이기심과 탐심)이야말로 지구와 인류가 당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빛나는 지구를 회복하려면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이 출현해야 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더 늦으면 안 된다!
따라서 빛나는 지구를 회복하려면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이 출현해야 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더 늦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하나님이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을 통해 다스리시는 세계다. 간단히 말해 참자아의 정치학이 구현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치셨던 것이다. “회개하라!”고.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참자아로 전향하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몸소-하나님 나라”auto-basileia였다. 예수님은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한 사람이며, 참자아의 바탕이요 배후인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된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완성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참자아의 원형”archetype of true self이라고 부른다. 미움과 증오가 난무하고, 배제와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에 사랑, 자비, 용납, 평화를 선포했다. 아니 그 자신 사랑과 자비, 용납과 평화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졌고, 십자가에서 참자아의 정치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다. 하지만 “모든”이라는 형용사가 마음에 걸린다. 이러한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모든” 지혜와 지식이라는 표현은 과하지 않은가? 아니다, “모든”이 맞다. 왜냐하면 참자아를 각성하고, 그것에 뿌리내리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무엇이 진짜이며 가짜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진실이며 위선인지 분별한다. 분별이 이뤄지면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돈, 시간, 힘, 감정 따위)를 소모하지 않는다. 거짓자아에 기반한 삶에 소모되던 막대한 에너지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쓰인다.
발굴되기를 바라는 보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를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얻는 것이다.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는 것이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알짬이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성공, 출세, 번영, 합격, 치유, 부흥, 성장 같은 것에 더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기도도 젯밥을 얻으려는 기도 일색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에크하르트의 말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청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런 요청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까? 왜 여러분은 참자아를 각성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소유한 보물을 찾지 못합니까?(에크하르트, “하나님의 사랑”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는 믿음이다. 자신의 참자아와 함께 무한 광활한 신비의 하나님을 깨닫는 믿음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나도, 그분처럼, “성전보다 큰 이”(마 12:5)가 된다. 나무와 돌로 지어진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스러운 성전임을 깨닫는다. “요나보다 큰 이”(마 12:41)가 된다. 요나의 기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한 일상의 기적 속에서 살아간다. “솔로몬보다 큰 이”(마 12:42)가 된다. 솔로몬이 입은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형된다. 참자아의 광휘에 휩싸여, 무한한 신비이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넓고 깊은 사랑의 겨워!
이 깨달음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다. 오 아름다운 지혜여, 신성한 지식이여! 오,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스승,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여!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감격한 내 마음에 기도가 메아리친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 이민재
(골 2:2-3)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골 2:5)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
(마 12:6)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골 2:5)바울은 골로새교회 길벗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편지 앞부분에서 “깨달음에서 생기는 충만한 확신의 모든 풍요에 이르라”(골 2:2b) 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깨달음”과 관련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길벗들이 뭔가 깨닫기를, 그 깨달음을 확신하기를, 그 확신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대체 뭘 깨닫기를 바라는 걸까?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골 2:3)을,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신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나의 경우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는 무엇일까. 다음의 사진에는 내가 깨달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들어 있다. 이 사진에서 약간 초췌해 보이는 남자는 뭔가를 바라본다. 남자 뒤에는 빛나는 지구가 있고, 그 배후에 밤하늘(우주)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인다.
이 사진은 남자가 줌zoom으로 강의할 때 사용하는 배경 사진이다. 남자는 줌에서 제공하는 여러 배경 사진 중에서 하필이면 왜 이 사진을 골랐을까? 마음이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왜 마음이 끌렸을까? 이 사진은 남자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사진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어느 날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남자는 물론 나다. 이 한 장의 사진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나의 깨달음이 들어있다. 이 사진에서 나를 찾아보라고 한다면 벗들은 안경을 쓴 초췌한 나를 가리킬 것이다. 맞다. 그건 나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나일 뿐, 나의 전부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나의 “겉사람”일 뿐이다.
나는 이 사진을 내면화해본다. 그러면 내 안에 내면의 우주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내면의 우주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빛으로 둘러싸인 지구가 상징하는 내가 보인다. 순수와 진실을 갈망하는 내가 보인다. 연민과 공감을 표현하는 내가 보인다. 용납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내가 보인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기까지 하다. 그게 나의 참자아다. 나의 참자아는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뿐 아니다. 지구 뒤에 우주가 무한하게 펼쳐진 것처럼 내 참자아의 배후에도 무한한 신비(어둠)이신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 무한한 어둠 안에는 무수한 별들이 떠 있다. 별들은 온갖 시련 속에서 믿음을 지킨 참된 신앙인들이다. 사도들, 교부들, 사막의 수도사들, 신비가들, 성인들, 종교개혁자들, 의인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골 1:22)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골 1:28) 되기 위하여 분투한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참자아 상태에서 복음적 가치를 실천하려고 애쓴 사람들이다. 벗들도 이 별들 중 하나일 것이다.
또 별들은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이 섬긴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안토니우스의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 성 베네딕트의 하나님, 에크하르트의 하나님,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 루터의 하나님, 웨슬리의 하나님, 본회퍼의 하나님.... 벗들이 경험한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리고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선물들과 완전한 은사들”(약 1:17), 지혜, 지식, 사랑, 자비, 정의, 평화, 위로, 친절, 용서, 경건 같은 것들이다. 그 수많은 하나님과 은총의 별들을 무한한 “어둠-하나님”이 품고 있다. 어둠-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하나다. 그래서 어둠-하나님을 “하나-님” 또는 “일자”一者, the One, Oneness라고도 한다.
지혜와 지식의 보화
사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다. 나는 겉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의 참자아를 직관할 때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며, 우주를 담을 만큼 큰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런 존재의 진실을 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통해 배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겉사람이 전부인 줄 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서 보여주는 사회적 자아(엄마, 아빠, 아들, 딸, 남편, 아내, 선생님, 학생, 교장, 교감, 교수, 평사원, 대리, 과장, 부장, 사장, 박사, 의사, 검사, 판사, 목사)가 자기인 줄 안다. 그것은 페르소나일 뿐이다. 물론 생활현실(생존세계)에서 페르소나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는 빛나는 지구가 상징하는 참자아 즉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잠깐 지구에 대해 묵상해보자. 지구는 원래 아름다운 곳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 “좋다, 좋다!”를 연발하셨을까.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는 “매우 좋다!”고 탄성을 지르기까지 하셨다. 그런데 요즘 지구의 형편은 말이 아니다. 기후 위기로 몸살을 앓고,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대기 오염은 심해지고, 토양은 황폐화되고, 바다는 각종 쓰레기와 방사능 폐수로 오염되고, 물 부족과 식량 부족이 심화되고,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창궐하고, 폭염과 폭설과 가뭄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존재의 형편이 그렇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참 본성 즉 참자아다. 그런데 참자아를 각성하고 거기에 뿌리내린 삶을 살지 않으니 거짓자아가 극성을 부린다. 거짓자아는 행복의 나라여야 할 삶을 악마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짓자아의 자기중심성(이기심과 탐심)이야말로 지구와 인류가 당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빛나는 지구를 회복하려면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이 출현해야 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더 늦으면 안 된다!
따라서 빛나는 지구를 회복하려면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이 출현해야 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더 늦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하나님이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들을 통해 다스리시는 세계다. 간단히 말해 참자아의 정치학이 구현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치셨던 것이다. “회개하라!”고.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참자아로 전향하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몸소-하나님 나라”auto-basileia였다. 예수님은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한 사람이며, 참자아의 바탕이요 배후인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된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완성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참자아의 원형”archetype of true self이라고 부른다. 미움과 증오가 난무하고, 배제와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에 사랑, 자비, 용납, 평화를 선포했다. 아니 그 자신 사랑과 자비, 용납과 평화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졌고, 십자가에서 참자아의 정치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다. 하지만 “모든”이라는 형용사가 마음에 걸린다. 이러한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모든” 지혜와 지식이라는 표현은 과하지 않은가? 아니다, “모든”이 맞다. 왜냐하면 참자아를 각성하고, 그것에 뿌리내리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무엇이 진짜이며 가짜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진실이며 위선인지 분별한다. 분별이 이뤄지면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돈, 시간, 힘, 감정 따위)를 소모하지 않는다. 거짓자아에 기반한 삶에 소모되던 막대한 에너지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쓰인다.
발굴되기를 바라는 보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를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얻는 것이다.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는 것이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알짬이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성공, 출세, 번영, 합격, 치유, 부흥, 성장 같은 것에 더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기도도 젯밥을 얻으려는 기도 일색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에크하르트의 말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청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런 요청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까? 왜 여러분은 참자아를 각성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소유한 보물을 찾지 못합니까?(에크하르트, “하나님의 사랑”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는 믿음이다. 자신의 참자아와 함께 무한 광활한 신비의 하나님을 깨닫는 믿음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나도, 그분처럼, “성전보다 큰 이”(마 12:5)가 된다. 나무와 돌로 지어진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스러운 성전임을 깨닫는다. “요나보다 큰 이”(마 12:41)가 된다. 요나의 기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한 일상의 기적 속에서 살아간다. “솔로몬보다 큰 이”(마 12:42)가 된다. 솔로몬이 입은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형된다. 참자아의 광휘에 휩싸여, 무한한 신비이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넓고 깊은 사랑의 겨워!
이 깨달음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다. 오 아름다운 지혜여, 신성한 지식이여! 오,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스승,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여!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감격한 내 마음에 기도가 메아리친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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