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그날”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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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43회 작성일 24-01-11 18:12본문
그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막 13:24-25)
한 해가 끝날 무렵 우리는 대림절을 맞이한다. 대림절은 언제나 송년과 함께 시작한다. 이러한 대림 시기는 인간의 시간이 끝날 때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매우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이 구원의 시간이라면, 구원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의 종말과 함께 시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 곧 구원의 시간을 성경은 “그날”이라고 말한다.
“그날”은 언제일까? 연말일까? 까마득한 미래일까? “그날”이란 측정과 계산이 가능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욕망이 투사된 심리적인 미래의 시간도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상과 추론을 벗어난 무한한 신비이듯이, 구원의 시간인 “그날”은 계산과 예측을 벗어난 신비의 시간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날”을 모른다. 욕망은 언제나 과거에서 이어지고 현재를 장악한 결핍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기대하는 그날은 과거와 현재의 이기적 지속이며 자기중심적 연장延長일 뿐이다. 욕망하는 주체의 시간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세속의 시간 속에서 삶은 결코 “그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는다. 욕망에 물든 세속의 시간은 “그날”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하다.
“그날”을 모르기는 합리성도 마찬가지다. 합리성은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에 축적된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설명하고,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합리성은 언제나 욕망에 종속되기 때문에 합리적 주체도 욕망하는 주체처럼 자기중심적이다. 어쩌다 합리적 주체가 기획하는 미래에 타자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합리적 주체는 언제나 미완성이요 불완전한 실존일 뿐이다. 따라서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모순과 부조리를 지속하고 연장한다. 이것이 합리적 주체의 천형天刑 같은 운명이다.
합리적 주체는 언제나 미완성이요 불완전한 실존일 뿐이다. 따라서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모순과 부조리를 지속하고 연장한다. 이것이 합리적 주체의 천형 같은 운명이다.
“그날”은 인간의 욕망이나 합리성과 무관한 시간이다. 이기적인 욕망과 불완전한 합리성이 끝난 곳에서 그날은 시작된다. 아니, “그날”이 인간의 욕망과 합리성을 끝장낸다. 욕망하는 주체의 이기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합리적 주체의 불완전성을 폭로한다. 그래서 “그날”은 욕망과 합리성의 “종말”로 경험된다. 주체의 절망이나 삶의 파탄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지만 종말로 경험될 뿐이지 그날은 시간의 새로운 시작이다. 또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다. 인간의 욕망이 멈춘 곳에서 시작하는 무지의 시간, 합리성이 정지한 곳에서 시작하는 미지의 시간! “그날”은 욕망으로 성취할 수 없고, 합리성으로 기획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간”이기에 낯설고 때론 섬찟하다. 욕망과 합리성으로 알 수 없는 무지의 시간이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신비인 “그날”은 인간의 작위적 오만을 허용하지 않는 시간, 곧 “하나님이 주어主語인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주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의 에피파네이아[顯現]를 보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인간의 시간 너머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신비의 시간, 세속의 시간 이면에서 도저하게 흐르고 있는 신성한 시간을 “직관하는” 사람이다. 이때 희망이 불가능했던 절망의 시간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다.
따라서 대림절은 “그날” 곧 인간의 시간이 끝나가는 곳에서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의 아드벤투스[到來]를 기다리는 절기이다. 욕망과 합리에 뿌리내린 인간의 모든 작위가 무위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침입하는 시간이요, 주어지는 시간이요, 돌연突然한 시간인 까닭이다.
가장인, 주부인, 직장인인, 학생인, 그리스도인인, 목회자인, 아니 하나의 인간인 당신의 시간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욕망에 찌든 시간인가, 합리성으로 차가워진 시간인가? 당신의 시간은 욕망의 지속인가 합리의 연장인가?
올 한 해 당신의 삶 속엔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 “그날”이 얼마나 깃들어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그날”이 얼마나 스며있는가?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을 얼마나 허용하고 있으며, 그 시간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뜨거운 욕망을 무시하고 치열한 합리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시간, 그 거룩한 도발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는가?
당신이 희망하고 기획하는 새해는 인간의 시간인가 하나님의 시간인가? 욕망의 지속인가 합리의 연장인가? 욕망을 실현하려는 합리인가, 합리를 빙자한 욕망의 실현인가?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주어인가, 하나님이 주어인가? 당신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합리성을 깡그리 무너뜨리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때, “그날”을 받아들일 용의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이 희망하고 기획하는 새해는 인간의 시간인가 하나님의 시간인가?
당신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합리성을 깡그리 무너뜨리며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때, “그날”을 받아들일 용의와 용기가 있는가?
신앙은 장난이 아니다. 목검 승부가 아니라 진검 승부다. 모세의 삶을 보라. 세속의 시간이 멈춘 곳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됐다. 이집트 왕자라는 욕망하는 주체와 동족의 싸움을 말리려는 합리적인 주체가 해체된 곳에서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그날” 곧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이 시작됐다. 해방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마리아를 보라. 마리아의 삶 속에 침입한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은 끔찍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전해준 “그날”은 경악스러웠다.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눅 1:31) 이것은 크리스마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순진한 시골 소녀의 소박한 욕망을 짓밟고 평범한 합리성을 부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눅 1:34)라는 합리적 물음을 넘어서는 낯선 삶의 신비로 마리아를 이끌었다.
대림절은 이런 어두운, 두려운, 떨리는, 낯선 신비를 영적 의식 수준에서 직관하고, 기다리는 때다. 그러기 위해 삶을 물 들이고 있는 욕망하는 주체의 시간을 잠시 멈추는 때다. 삶 속에서 쉬지 않고 작동하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을 일단 정지하는 때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세속의 시간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하나님이 주어主語인 시간을 받드는 때다.
“그날”에 일어나는 일들은 고통스럽다. 익숙한 몸짓을 멈추고, 몸에 밴 습관을 중단하고, 편안한 루틴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이 삶에서 드러나려면 중지해야 하고, 그만두어야 하고, 멈춰야 하는 삶의 습관들이 많다. 금연, 금주, 금식, 금색禁色, 금독禁讀, 금청禁聽, 금촉禁觸 따위… 이런 것들을 중단하려면 중독 상태에서 벗어날 때처럼 금단현상을 겪어야 한다. 해서 보통 의지로는 중단이 불가능하다.
스스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상황을 통해서 하시기도 한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욕망하는 주체의 시간뿐이었고, 욕망을 포장하고 미화하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뿐이었다. 욕망하는 주체와 합리적 주체는 끈끈하게 달라붙어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오는 것을 옹벽처럼 차단하고 있었다.
나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직관하며 기다리는 깨어있는 시간은 없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욕망하는 것과 내가 기획하는 것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종말”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막 13:24)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모두 무너졌고, 사라졌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욕망하는 것과 내가 기획하는 것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종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관상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은혜 중의 은혜였다!(요 1:16) 하나님은 자기중심적 욕망의 수렁에서 나를 건지셨고, 불완전한 합리성의 감옥에서 나를 해방하셨다. 마침내 나는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막 13:26)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매일 관상기도를 할 때마다 경험하는 현실이다. 생각이라는 구름을 타고 인자 곧 참자아가 보름달처럼 둥실 나타나는 경이로운 현실 말이다. 이때 나는 새로워진다. 나다워진다. 비로소 내가 된다.
이뿐 아니다. 관상 여정을 꾸준히 걸었더니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으셨다.”(막 13:27) 관상 여정은 생각하지도 못한 천사들을 만나는 여정이다. 벗들이 그렇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새로운 천사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은 더욱 무르익을 것이며, 구원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날”이 언제 도래할지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 갑자기 왔을 때 잠자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다, “그날”은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 관상 수련에 정진하면서 깨어있어야 한다. 욕망을 비우고 머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직관이 깨어나고, 의식이 상승하고, 영적 의식이 형성된다. “그날” 곧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아니, 모든 시간이 하나님이 주어인 “그날”로 변형된다. 삶은 신비를 계시하고 은총의 문을 연다. 순종이 즐겁고 순명이 행복하다.
- 이민재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막 13:24-25)
한 해가 끝날 무렵 우리는 대림절을 맞이한다. 대림절은 언제나 송년과 함께 시작한다. 이러한 대림 시기는 인간의 시간이 끝날 때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매우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이 구원의 시간이라면, 구원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의 종말과 함께 시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 곧 구원의 시간을 성경은 “그날”이라고 말한다.
“그날”은 언제일까? 연말일까? 까마득한 미래일까? “그날”이란 측정과 계산이 가능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욕망이 투사된 심리적인 미래의 시간도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상과 추론을 벗어난 무한한 신비이듯이, 구원의 시간인 “그날”은 계산과 예측을 벗어난 신비의 시간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날”을 모른다. 욕망은 언제나 과거에서 이어지고 현재를 장악한 결핍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기대하는 그날은 과거와 현재의 이기적 지속이며 자기중심적 연장延長일 뿐이다. 욕망하는 주체의 시간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세속의 시간 속에서 삶은 결코 “그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는다. 욕망에 물든 세속의 시간은 “그날”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하다.
“그날”을 모르기는 합리성도 마찬가지다. 합리성은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에 축적된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설명하고,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합리성은 언제나 욕망에 종속되기 때문에 합리적 주체도 욕망하는 주체처럼 자기중심적이다. 어쩌다 합리적 주체가 기획하는 미래에 타자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합리적 주체는 언제나 미완성이요 불완전한 실존일 뿐이다. 따라서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모순과 부조리를 지속하고 연장한다. 이것이 합리적 주체의 천형天刑 같은 운명이다.
합리적 주체는 언제나 미완성이요 불완전한 실존일 뿐이다. 따라서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모순과 부조리를 지속하고 연장한다. 이것이 합리적 주체의 천형 같은 운명이다.
“그날”은 인간의 욕망이나 합리성과 무관한 시간이다. 이기적인 욕망과 불완전한 합리성이 끝난 곳에서 그날은 시작된다. 아니, “그날”이 인간의 욕망과 합리성을 끝장낸다. 욕망하는 주체의 이기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합리적 주체의 불완전성을 폭로한다. 그래서 “그날”은 욕망과 합리성의 “종말”로 경험된다. 주체의 절망이나 삶의 파탄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지만 종말로 경험될 뿐이지 그날은 시간의 새로운 시작이다. 또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다. 인간의 욕망이 멈춘 곳에서 시작하는 무지의 시간, 합리성이 정지한 곳에서 시작하는 미지의 시간! “그날”은 욕망으로 성취할 수 없고, 합리성으로 기획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간”이기에 낯설고 때론 섬찟하다. 욕망과 합리성으로 알 수 없는 무지의 시간이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신비인 “그날”은 인간의 작위적 오만을 허용하지 않는 시간, 곧 “하나님이 주어主語인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주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의 에피파네이아[顯現]를 보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인간의 시간 너머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신비의 시간, 세속의 시간 이면에서 도저하게 흐르고 있는 신성한 시간을 “직관하는” 사람이다. 이때 희망이 불가능했던 절망의 시간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다.
따라서 대림절은 “그날” 곧 인간의 시간이 끝나가는 곳에서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의 아드벤투스[到來]를 기다리는 절기이다. 욕망과 합리에 뿌리내린 인간의 모든 작위가 무위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침입하는 시간이요, 주어지는 시간이요, 돌연突然한 시간인 까닭이다.
가장인, 주부인, 직장인인, 학생인, 그리스도인인, 목회자인, 아니 하나의 인간인 당신의 시간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욕망에 찌든 시간인가, 합리성으로 차가워진 시간인가? 당신의 시간은 욕망의 지속인가 합리의 연장인가?
올 한 해 당신의 삶 속엔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 “그날”이 얼마나 깃들어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그날”이 얼마나 스며있는가?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을 얼마나 허용하고 있으며, 그 시간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뜨거운 욕망을 무시하고 치열한 합리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시간, 그 거룩한 도발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는가?
당신이 희망하고 기획하는 새해는 인간의 시간인가 하나님의 시간인가? 욕망의 지속인가 합리의 연장인가? 욕망을 실현하려는 합리인가, 합리를 빙자한 욕망의 실현인가?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주어인가, 하나님이 주어인가? 당신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합리성을 깡그리 무너뜨리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때, “그날”을 받아들일 용의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이 희망하고 기획하는 새해는 인간의 시간인가 하나님의 시간인가?
당신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합리성을 깡그리 무너뜨리며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때, “그날”을 받아들일 용의와 용기가 있는가?
신앙은 장난이 아니다. 목검 승부가 아니라 진검 승부다. 모세의 삶을 보라. 세속의 시간이 멈춘 곳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됐다. 이집트 왕자라는 욕망하는 주체와 동족의 싸움을 말리려는 합리적인 주체가 해체된 곳에서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그날” 곧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이 시작됐다. 해방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마리아를 보라. 마리아의 삶 속에 침입한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은 끔찍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전해준 “그날”은 경악스러웠다.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눅 1:31) 이것은 크리스마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순진한 시골 소녀의 소박한 욕망을 짓밟고 평범한 합리성을 부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눅 1:34)라는 합리적 물음을 넘어서는 낯선 삶의 신비로 마리아를 이끌었다.
대림절은 이런 어두운, 두려운, 떨리는, 낯선 신비를 영적 의식 수준에서 직관하고, 기다리는 때다. 그러기 위해 삶을 물 들이고 있는 욕망하는 주체의 시간을 잠시 멈추는 때다. 삶 속에서 쉬지 않고 작동하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을 일단 정지하는 때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세속의 시간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하나님이 주어主語인 시간을 받드는 때다.
“그날”에 일어나는 일들은 고통스럽다. 익숙한 몸짓을 멈추고, 몸에 밴 습관을 중단하고, 편안한 루틴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이 삶에서 드러나려면 중지해야 하고, 그만두어야 하고, 멈춰야 하는 삶의 습관들이 많다. 금연, 금주, 금식, 금색禁色, 금독禁讀, 금청禁聽, 금촉禁觸 따위… 이런 것들을 중단하려면 중독 상태에서 벗어날 때처럼 금단현상을 겪어야 한다. 해서 보통 의지로는 중단이 불가능하다.
스스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상황을 통해서 하시기도 한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욕망하는 주체의 시간뿐이었고, 욕망을 포장하고 미화하는 합리적 주체의 시간뿐이었다. 욕망하는 주체와 합리적 주체는 끈끈하게 달라붙어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오는 것을 옹벽처럼 차단하고 있었다.
나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직관하며 기다리는 깨어있는 시간은 없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욕망하는 것과 내가 기획하는 것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종말”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막 13:24)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모두 무너졌고, 사라졌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욕망하는 것과 내가 기획하는 것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종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관상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은혜 중의 은혜였다!(요 1:16) 하나님은 자기중심적 욕망의 수렁에서 나를 건지셨고, 불완전한 합리성의 감옥에서 나를 해방하셨다. 마침내 나는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막 13:26)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매일 관상기도를 할 때마다 경험하는 현실이다. 생각이라는 구름을 타고 인자 곧 참자아가 보름달처럼 둥실 나타나는 경이로운 현실 말이다. 이때 나는 새로워진다. 나다워진다. 비로소 내가 된다.
이뿐 아니다. 관상 여정을 꾸준히 걸었더니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으셨다.”(막 13:27) 관상 여정은 생각하지도 못한 천사들을 만나는 여정이다. 벗들이 그렇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새로운 천사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은 더욱 무르익을 것이며, 구원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날”이 언제 도래할지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 갑자기 왔을 때 잠자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다, “그날”은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 관상 수련에 정진하면서 깨어있어야 한다. 욕망을 비우고 머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직관이 깨어나고, 의식이 상승하고, 영적 의식이 형성된다. “그날” 곧 하나님이 주어인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아니, 모든 시간이 하나님이 주어인 “그날”로 변형된다. 삶은 신비를 계시하고 은총의 문을 연다. 순종이 즐겁고 순명이 행복하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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