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믿음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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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41회 작성일 23-10-25 16:09본문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전 1:2-3)
오늘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었다. 편지 서두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1:2) 뭐가 그리 감사했을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기”(1:8a)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1:8b)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던 것 같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체 어떤 교회였을까? 바울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믿음의 행위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행위”가 특출난 교회였다. “믿음의 행위”란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이뤄준다는 신념의 마력일까? 안 되면 되게 하라 따위의 적극적 사고방식일까? 그렇지 않다. 믿음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강한 신념과 적극성으로 하나님을 강제하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의심과 회의 속에서도 하나님이 가리키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다.
하나님이 가리키는 미지의 세계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시편 시인은 하나님이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시 97:2)고 묘사한 게 아닐까. 하나님은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인 분이기에 믿음의 사람은 그러한 하나님이 가리키는 불투명성과 불확실성의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자기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관철시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리키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향해 모험한 용기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뜻과 욕망을 성취하려는 적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철저한 수동성을 본다. 그렇다. 믿음은 의욕적인 적극성이기 이전에 겸허한 수동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가 될 정도로 에고를 버리고, 욕심을 비우고, “나의” 뜻을 꺾는 수동성이다. 이러한 수동성 안에서 아브라함은 살던 땅과 태어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예”(yes)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겸허한 수동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그렇다. 믿음은 의욕적인 적극성이기 이전에 겸허한 수동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가 될 정도로 에고를 버리고, 욕심을 비우고, “나의” 뜻을 꺾는 수동성이다. 이러한 수동성 안에서 아브라함은 살던 땅과 태어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예”(yes)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겸허한 수동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그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라고 응답한 마리아에게서도 우리는 똑같은 믿음의 본질을 본다. 맞다. 믿음은 나의 뜻에 하나님이 예스하시도록 적극적으로 떼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예스하기 위해 겸허한 수동성 안에서 순명(順命)하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겸허한 수동성의 내어맡기는 순명! 굳이 행위라고 한다면 무위(無爲)의 행위다. 그런 믿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이다.
은명교회의 관상여정은 이러한 순명의 길이었다. 겸허한 수동성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가리키는 관상기도의 영지에 발을 내디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은명교회의 길벗 한 사람 한 사람이 “재복음화” 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은명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숨빛신앙”도 공허한 이념에 그쳤을 것이다. 은명교회의 관상여정은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어두운 곳을 향한 여정이었다.
회의와 불안이 엄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확실한 그것이 하나님이 가리키는 영지임을 함께 확인하고 거듭 확인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동행한 모든 길벗에게 감사하다. 그래서 나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의 수고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를 하는 교회였다. 사랑의 수고란 무엇일까? 사랑의 반대를 알면 사랑의 수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랑의 반대는 무엇일까? 미움일까 증오일까? 복수일까 분리일까?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도 증오도 복수도 분리도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머리”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일인 까닭이다. 머리는 차이를 따진다. 이로부터 분리가 생긴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틀린 것이다. 여기에서 미움이 발생한다.
우리는 머리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학”을 논할 수 있다. 사랑의 당위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슴을 통과하지 않은 사랑, 연민과 공감에 무딘 사랑, 그것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사랑은 무력하다. 더 나아가 머리에 머물 뿐 손과 발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무용하다.
머리로 하는 사랑은 굶주린 사람에게 그림의 떡을 주는 것과 같고, 목마른 사람에게 빈 물잔을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머리로 하는 관념적인 사랑을 질타하면서 이렇게 권고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 3:17-18)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에 이런 말을 적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살전 4:9a) 그런 다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를 이렇게 묘사한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살전 4:9b)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혈연이나 가족에 한정된 사랑이 아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에 국한된 사랑도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의 범위는 넓었다. 그들의 사랑은 “온 마케도니아”를 품었다.
이런 일이 은명교회에서도 풍성하게 일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은명교회가 지향하는 “빛의 삶”이다. 은명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IMF 시절에는 “목요숨빛찬양예배”를 통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천원선교헌금”을 했다. 10년 넘게 했다. 그 헌금은 교회 재정과 상관없이 전액 한국사회의 고통받는 이웃에게 전달됐다. 관상적 예배인 떼제 형식의 “부름과들음예배”를 통해서도 같은 사역을 지속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여파로 목요 예배가 중단되면서 이 아름다운 일도 중단됐다. 아쉽다.
빛의 삶은 “숨빛인”의 마땅한 삶이다. 그렇다고 의무나 계명, 당위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빛의 삶은 관상가(기독교인)의 당연한 열매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료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은명교회의 “빛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고통받는 동료인간들을 위한 “사랑의 수고”는 새로운 형태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거창하고 큰 희생을 요구하려는 건 아니다. 오지로 떠나라고 강요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따뜻한 가슴을 갖는 것에서 시작한다. 빛의 삶은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연민과 공감에서 시작한다. 혈연과 가족을 초월한 이타적 가슴이 열릴 때 모른 척 하지 않으면 된다.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는 가난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알고 할 수 있는 만큼 도우면 된다.
희망의 인내
셋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교회였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희망은 “기대”(expectation)가 아니다. 기대의 중심은 나이기 때문이다. 기대는 내가 욕망하는 것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자녀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성도들에 대해 갖는 것은 이러한 기대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의 자궁이다. 기대가 욕망하는 대로 이뤄지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희망(Hope)은 다르다. 희망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희망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믿음에서 태어난다. 희망을 낳는 자궁은 믿음인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희망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믿음을 잃었다가 회복했을 때 “너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 15:6)라는 하나님의 미래(약속)를 다시 희망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한 기대가 무너진 곳에서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실,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희망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원동력이다.
기대는 쉽게 무너진다. 삶이란 기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과정인 것 같다. 목회야말로 기대가 끊임없이 무너지는 과정이다. 어떨 땐 하나님이 인간적인 기대를 무너뜨리시려고 작정하고 나선 것 같은 때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희망이다. 기대가 무너진 곳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관상적 시선 말이다.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행복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닫힌 문만 너무 오래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행복의 문을 보지 못한다.
인간이 기대했던 “하나의 행복의 문”이 닫혔을 때, 하나님이 여시는 또 “다른 행복의 문”을 보는 것, 이것이 희망이다. 이런 희망을 지닌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은명교회는, 그리고 나는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몸서리치도록 쓰리고 아팠지만, 그 경험은 보약이었다. 관상기도라는 기도의 신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거짓자아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참자아의 진실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눈으로 희망을 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평생 받은 은총 중에서 가장 큰 은총이었다. 정말이지 자유롭고 충만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은총이었다!
하니, 벗들, 꾸준히 관상수련에 정진하라. 침묵을 배워라. “하나님의 친구인 침묵”(요한 클리마쿠스)과 사귀어라.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십자가의 성 요한)인 침묵을 익혀라. 깊은 침묵 속에서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포근한 침묵 속에서 머리로만 사랑을 논하는지 따뜻한 가슴을 품고 있는지 분별하라. 경건한 침묵 속에서 나의 기대에 눈이 멀었는지 하나님의 미래를 희망하는지 분별하라.
침묵은 겸허한 수동성과 순명이라는 순수한 믿음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침묵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라는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여정을 완성할 것이다. 침묵은 인간의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틔울 것이다. 모든 생명이 침묵 속에서 자라듯,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희망의 인내”는 침묵이라는 우주적 신성의 자궁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은명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지면 좋겠다. 숨빛신앙과 재복음화가 한국교회의 새로운 지향이 되면 좋겠다. 이 아름다운 일에 또 한 번 우리를 초대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이 초대에 함께 참여한 길벗 여러분께 감사를!
- 이민재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전 1:2-3)
오늘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었다. 편지 서두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1:2) 뭐가 그리 감사했을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기”(1:8a)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1:8b)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던 것 같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체 어떤 교회였을까? 바울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믿음의 행위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행위”가 특출난 교회였다. “믿음의 행위”란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이뤄준다는 신념의 마력일까? 안 되면 되게 하라 따위의 적극적 사고방식일까? 그렇지 않다. 믿음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강한 신념과 적극성으로 하나님을 강제하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의심과 회의 속에서도 하나님이 가리키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다.
하나님이 가리키는 미지의 세계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시편 시인은 하나님이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시 97:2)고 묘사한 게 아닐까. 하나님은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인 분이기에 믿음의 사람은 그러한 하나님이 가리키는 불투명성과 불확실성의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자기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관철시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리키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향해 모험한 용기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뜻과 욕망을 성취하려는 적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철저한 수동성을 본다. 그렇다. 믿음은 의욕적인 적극성이기 이전에 겸허한 수동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가 될 정도로 에고를 버리고, 욕심을 비우고, “나의” 뜻을 꺾는 수동성이다. 이러한 수동성 안에서 아브라함은 살던 땅과 태어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예”(yes)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겸허한 수동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그렇다. 믿음은 의욕적인 적극성이기 이전에 겸허한 수동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가 될 정도로 에고를 버리고, 욕심을 비우고, “나의” 뜻을 꺾는 수동성이다. 이러한 수동성 안에서 아브라함은 살던 땅과 태어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예”(yes)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겸허한 수동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그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라고 응답한 마리아에게서도 우리는 똑같은 믿음의 본질을 본다. 맞다. 믿음은 나의 뜻에 하나님이 예스하시도록 적극적으로 떼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예스하기 위해 겸허한 수동성 안에서 순명(順命)하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겸허한 수동성의 내어맡기는 순명! 굳이 행위라고 한다면 무위(無爲)의 행위다. 그런 믿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이다.
은명교회의 관상여정은 이러한 순명의 길이었다. 겸허한 수동성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가리키는 관상기도의 영지에 발을 내디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은명교회의 길벗 한 사람 한 사람이 “재복음화” 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은명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숨빛신앙”도 공허한 이념에 그쳤을 것이다. 은명교회의 관상여정은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어두운 곳을 향한 여정이었다.
회의와 불안이 엄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확실한 그것이 하나님이 가리키는 영지임을 함께 확인하고 거듭 확인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동행한 모든 길벗에게 감사하다. 그래서 나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의 수고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를 하는 교회였다. 사랑의 수고란 무엇일까? 사랑의 반대를 알면 사랑의 수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랑의 반대는 무엇일까? 미움일까 증오일까? 복수일까 분리일까?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도 증오도 복수도 분리도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머리”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일인 까닭이다. 머리는 차이를 따진다. 이로부터 분리가 생긴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틀린 것이다. 여기에서 미움이 발생한다.
우리는 머리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학”을 논할 수 있다. 사랑의 당위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슴을 통과하지 않은 사랑, 연민과 공감에 무딘 사랑, 그것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사랑은 무력하다. 더 나아가 머리에 머물 뿐 손과 발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무용하다.
머리로 하는 사랑은 굶주린 사람에게 그림의 떡을 주는 것과 같고, 목마른 사람에게 빈 물잔을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머리로 하는 관념적인 사랑을 질타하면서 이렇게 권고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 3:17-18)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에 이런 말을 적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살전 4:9a) 그런 다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를 이렇게 묘사한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살전 4:9b)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혈연이나 가족에 한정된 사랑이 아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에 국한된 사랑도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의 범위는 넓었다. 그들의 사랑은 “온 마케도니아”를 품었다.
이런 일이 은명교회에서도 풍성하게 일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은명교회가 지향하는 “빛의 삶”이다. 은명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IMF 시절에는 “목요숨빛찬양예배”를 통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천원선교헌금”을 했다. 10년 넘게 했다. 그 헌금은 교회 재정과 상관없이 전액 한국사회의 고통받는 이웃에게 전달됐다. 관상적 예배인 떼제 형식의 “부름과들음예배”를 통해서도 같은 사역을 지속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여파로 목요 예배가 중단되면서 이 아름다운 일도 중단됐다. 아쉽다.
빛의 삶은 “숨빛인”의 마땅한 삶이다. 그렇다고 의무나 계명, 당위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빛의 삶은 관상가(기독교인)의 당연한 열매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료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은명교회의 “빛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고통받는 동료인간들을 위한 “사랑의 수고”는 새로운 형태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거창하고 큰 희생을 요구하려는 건 아니다. 오지로 떠나라고 강요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따뜻한 가슴을 갖는 것에서 시작한다. 빛의 삶은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연민과 공감에서 시작한다. 혈연과 가족을 초월한 이타적 가슴이 열릴 때 모른 척 하지 않으면 된다.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는 가난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알고 할 수 있는 만큼 도우면 된다.
희망의 인내
셋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교회였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희망은 “기대”(expectation)가 아니다. 기대의 중심은 나이기 때문이다. 기대는 내가 욕망하는 것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자녀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성도들에 대해 갖는 것은 이러한 기대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의 자궁이다. 기대가 욕망하는 대로 이뤄지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희망(Hope)은 다르다. 희망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희망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믿음에서 태어난다. 희망을 낳는 자궁은 믿음인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희망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믿음을 잃었다가 회복했을 때 “너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 15:6)라는 하나님의 미래(약속)를 다시 희망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한 기대가 무너진 곳에서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실,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희망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원동력이다.
기대는 쉽게 무너진다. 삶이란 기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과정인 것 같다. 목회야말로 기대가 끊임없이 무너지는 과정이다. 어떨 땐 하나님이 인간적인 기대를 무너뜨리시려고 작정하고 나선 것 같은 때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희망이다. 기대가 무너진 곳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관상적 시선 말이다.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행복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닫힌 문만 너무 오래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행복의 문을 보지 못한다.
인간이 기대했던 “하나의 행복의 문”이 닫혔을 때, 하나님이 여시는 또 “다른 행복의 문”을 보는 것, 이것이 희망이다. 이런 희망을 지닌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은명교회는, 그리고 나는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몸서리치도록 쓰리고 아팠지만, 그 경험은 보약이었다. 관상기도라는 기도의 신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거짓자아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참자아의 진실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눈으로 희망을 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평생 받은 은총 중에서 가장 큰 은총이었다. 정말이지 자유롭고 충만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은총이었다!
하니, 벗들, 꾸준히 관상수련에 정진하라. 침묵을 배워라. “하나님의 친구인 침묵”(요한 클리마쿠스)과 사귀어라.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십자가의 성 요한)인 침묵을 익혀라. 깊은 침묵 속에서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포근한 침묵 속에서 머리로만 사랑을 논하는지 따뜻한 가슴을 품고 있는지 분별하라. 경건한 침묵 속에서 나의 기대에 눈이 멀었는지 하나님의 미래를 희망하는지 분별하라.
침묵은 겸허한 수동성과 순명이라는 순수한 믿음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침묵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라는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여정을 완성할 것이다. 침묵은 인간의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틔울 것이다. 모든 생명이 침묵 속에서 자라듯,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희망의 인내”는 침묵이라는 우주적 신성의 자궁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은명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지면 좋겠다. 숨빛신앙과 재복음화가 한국교회의 새로운 지향이 되면 좋겠다. 이 아름다운 일에 또 한 번 우리를 초대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이 초대에 함께 참여한 길벗 여러분께 감사를!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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