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기도의 기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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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45회 작성일 23-10-25 16:06본문
기도할 때 사람과 천사의 본성은 똑같아진다. 기도는 야만적인 짐승에서 분리하여 우리를 천사와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침묵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는 천사처럼 살고, 천사의 지위를 얻고, 천사처럼 행동하고, 천사의 영예와 천사의 품위와 천사의 지혜와 천사의 신중함을 갖추게 될 것이다.
(크리소스토무스)
기하학은 도형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다. 도형을 만드는 최소 단위는 점(點)이다. 점이 이동한 궤적이 선(線)이며, 선이 이동한 궤적이 면(面)이다. 면이 이동한 궤적을 통해 삼차원의 입체(立體)가 생긴다. 점에서 선이, 선에서 면이, 면에서 입체가 생기는 것처럼, 기도도 기하학적으로 발달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도의 점이 기도의 선으로, 기도의 선이 기도의 면으로, 기도의 면이 기도의 입체로 발달한다. 물론 이것은 비유다.
기도의 점點
나는 수십 년 동안 만물이 잠든 새벽에 기도의 점을 찍어왔다. 향심기도를 수련하면서부터는 저녁에도 기도의 점을 찍고 있다. 될 수 있는 한 열두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으려고 한다. 영적 여정은 기도의 점을 찍는 것과 함께 시작한다. 따라서 기도의 점을 찍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삶을 향한 혁명이기도 하다.
기도의 점을 찍을 때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처음에 시간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부터 삼십 분 이상 하겠다고 욕심냈다가는 며칠 못가서 중단하게 된다. 십 분도 좋고 오 분도 좋고, 정 바쁘면 일이 분도 좋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기도의 점을 찍는 습관을 들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 눈치가 보인다면 화장실도 좋다. 화장실처럼 기도하기에 좋은 골방은 없다. 요즘 화장실은 옛날같이 냄새나고 더럽지도 않아 얼마든지 훌륭한 기도처가 될 수 있다.
기도의 점을 찍어라.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기도에서 떠나는 것은 물고기를 물에서 꺼내는 것과 같다. 물고기에겐 물이 생명이듯이 사람에겐 기도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헤엄치듯 기도를 통해 우리는 공중을 통과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크산토풀로스)
처음엔 아침이든 저녁이든 가장 기도하기 좋은 시간을 택해 기도의 점을 찍다가, 어느 정도 습관이 되면 열두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어라. 시작이 반이다. 수레바퀴는 처음에 돌리기 어렵지 일단 돌아가기 시작하면 저절로 돌아간다.
기도의 선線
열두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으라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기도의 “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도의 선이 이어진다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는 뜻이다.
기도의 마음이 지속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기도 욕구가 더 생긴다. 아침기도의 효력이 끝나는 점심때쯤 한 번 더 기도의 점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때는 여섯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게 되니 기도의 선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하루에 세 번 기도의 점을 찍으면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온갖 일들에 부대끼면서 온종일 기도의 마음을 유지하기란 매우 힘들다. 기도를 하루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은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몸에 밴 과거의 생활습관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구습”(舊習)이라고 말한 것, 즉 과거의 생활패턴이다. 토머스 키팅은 이것을 “행복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작용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따른다. 혁명군은 언제나 진압군과 싸워야 한다. “규칙적인 기도”라는 삶의 혁명을 시작한 사람도 과거의 습관과 싸워야 한다. 과거의 습관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과거의 습관과 싸워 이겨야 새로운 기도의 습관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해서 기도의 선이 이어지고, 기도의 마음이 유지된다면 이때부터 크고 작은 변화들이 시작된다. 거친 감정이 부드러워지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생각이 가닥을 잡으며, 어수선한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이뿐 아니다. 온갖 창조적인 영감과 통찰이 샘솟는다. 집중력도 높아지고 의욕도 강해진다. 이런 상태로 일을 하면 능률도 훨씬 오른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참자아(속사람)가 깨어나는 것이다!
기도의 면面
기도의 점을 찍고, 기도의 선이 이어지면 기도의 “면”이 생긴다. 점이나 선에 비교할 때 면은 엄청나게 큰 도형이다. 따라서 기도의 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기도의 분량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기도의 면이 만들어지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면”을 보게 된다.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면만 보지 않고 이면을 본다. 정면만 보지 않고 측면을 본다. 일면만 보지 않고 양면을 보며, 외면만 보지 않고 내면을 본다. 이처럼 이면, 측면, 양면, 내면을 보기에 사람을 입체적으로 보고, 삶을 전체적으로 본다. 참자아가 보이고 영성현실이 보인다. 참자아를 볼 때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해방되며, 영성현실을 볼 때 절망스러운 삶 속에서 희망이 싹튼다.
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시종이 두려워하자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 시종의 눈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왕하 6:17) 그러자 시종은 불 말과 불 수레가 자기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현실 곧 영성현실을 본 것이다. 그때 시종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삶은 결코 일면적이지도 표면적이지도 않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삶은 다면적이며 심층적이다. 삶의 “다면”과 “심층”을 보면 겉으로 보이는 시련과 고통 너머에서 은총과 의미를 발견한다. 섭리의 차원을 보면서 삶의 신비를 깨닫는다.
기도의 입체立體
기도의 입체라는 것은 기도가 삶 전체에 스며들 정도로 풍성한 경지를 일컫는다. 기도의 분량,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일상의 모든 것을 덮을 정도로 넘친다. 하여, 기도가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 관계와 일 속을 쉬지 않고 흐른다. 기도가 흐르는 삶을 생각해 보라. 기도가 이끄는 관계를 생각해 보라. 기도가 만드는 일을 생각해 보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온갖 충만으로 충만한”(엡 3:19) 삶 아니겠는가.
기도의 점을 찍는 것이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의 선을 잇는 것이 규칙적으로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며, 기도의 면을 만드는 것이 기도하는 눈으로 곧 하나님의 눈으로 삶의 이면과 내면을 보는 것이라면, “기도의 입체가 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모든” 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사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는 뜻이다. 이때 삶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삶이 된다.
이렇게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면 “현존인지 감수성”이 깨어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성사적 감수성”이 깨어나 삼라만상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중보적 상상력”이 깨어나 내가 거대한 중보기도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감을 깨닫는다. 이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발견한다. 심지어 불행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앖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1-13)
예술 중의 예술
기독교 교부들은 기도를 예술에 비유했다. 기도는 “예술 중의 예술”이다. 기도는 사람과 삶을 새롭게 조형(造形)한다. 새로운 사람을 빚고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기도만한 예술이 없다. 돌로 조각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을 새롭게 빚는 것이 더 심오하고,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삶을 새롭게 그리는 것이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가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기도만큼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도 없다. 기도는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하늘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고급 옷이나 화장품이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주기도 하지만, 기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옷이나 화장품은 겉을 꾸며주지만 기도는 영혼을 고결하게 하고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을 단장해주기 때문이다.
또 기도하는 사람에게서는 신성한 아우라가 풍긴다. 그래서 성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할 때 사람과 천사의 본성은 똑같아진다. 기도는 야만적인 짐승에서 분리하여 우리를 천사와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침묵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는 천사처럼 살고, 천사의 지위를 얻고, 천사처럼 행동하고, 천사의 영예와 천사의 품위와 천사의 지혜와 천사의 신중함을 갖추게 될 것이다.
기도는 짐승 같은 인간을 천사 같은 존재로 만든다.
삶이란 “선택의 누적분累積分”이다. 다시 말해 선택한 것이 쌓여 인격을 빚고 운명을 짓는다. 그러니 날마다 세속의 쾌락을 선택한 사람의 삶과 기도를 선택한 사람의 삶이 어떨지를 생각해 보라! 기도를 선택해서 날마나 기도의 점을 찍고, 기도의 선을 잇고, 기도의 면을 만들고, 기도의 입체가 된 사람의 삶과 허구한 날 육체의 쾌락과 재미를 쫓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 이민재
(크리소스토무스)
기하학은 도형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다. 도형을 만드는 최소 단위는 점(點)이다. 점이 이동한 궤적이 선(線)이며, 선이 이동한 궤적이 면(面)이다. 면이 이동한 궤적을 통해 삼차원의 입체(立體)가 생긴다. 점에서 선이, 선에서 면이, 면에서 입체가 생기는 것처럼, 기도도 기하학적으로 발달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도의 점이 기도의 선으로, 기도의 선이 기도의 면으로, 기도의 면이 기도의 입체로 발달한다. 물론 이것은 비유다.
기도의 점點
나는 수십 년 동안 만물이 잠든 새벽에 기도의 점을 찍어왔다. 향심기도를 수련하면서부터는 저녁에도 기도의 점을 찍고 있다. 될 수 있는 한 열두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으려고 한다. 영적 여정은 기도의 점을 찍는 것과 함께 시작한다. 따라서 기도의 점을 찍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삶을 향한 혁명이기도 하다.
기도의 점을 찍을 때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처음에 시간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부터 삼십 분 이상 하겠다고 욕심냈다가는 며칠 못가서 중단하게 된다. 십 분도 좋고 오 분도 좋고, 정 바쁘면 일이 분도 좋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기도의 점을 찍는 습관을 들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 눈치가 보인다면 화장실도 좋다. 화장실처럼 기도하기에 좋은 골방은 없다. 요즘 화장실은 옛날같이 냄새나고 더럽지도 않아 얼마든지 훌륭한 기도처가 될 수 있다.
기도의 점을 찍어라.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기도에서 떠나는 것은 물고기를 물에서 꺼내는 것과 같다. 물고기에겐 물이 생명이듯이 사람에겐 기도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헤엄치듯 기도를 통해 우리는 공중을 통과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크산토풀로스)
처음엔 아침이든 저녁이든 가장 기도하기 좋은 시간을 택해 기도의 점을 찍다가, 어느 정도 습관이 되면 열두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어라. 시작이 반이다. 수레바퀴는 처음에 돌리기 어렵지 일단 돌아가기 시작하면 저절로 돌아간다.
기도의 선線
열두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으라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기도의 “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도의 선이 이어진다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는 뜻이다.
기도의 마음이 지속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기도 욕구가 더 생긴다. 아침기도의 효력이 끝나는 점심때쯤 한 번 더 기도의 점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때는 여섯 시간 간격으로 기도의 점을 찍게 되니 기도의 선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하루에 세 번 기도의 점을 찍으면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온갖 일들에 부대끼면서 온종일 기도의 마음을 유지하기란 매우 힘들다. 기도를 하루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은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몸에 밴 과거의 생활습관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구습”(舊習)이라고 말한 것, 즉 과거의 생활패턴이다. 토머스 키팅은 이것을 “행복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작용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따른다. 혁명군은 언제나 진압군과 싸워야 한다. “규칙적인 기도”라는 삶의 혁명을 시작한 사람도 과거의 습관과 싸워야 한다. 과거의 습관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과거의 습관과 싸워 이겨야 새로운 기도의 습관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해서 기도의 선이 이어지고, 기도의 마음이 유지된다면 이때부터 크고 작은 변화들이 시작된다. 거친 감정이 부드러워지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생각이 가닥을 잡으며, 어수선한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이뿐 아니다. 온갖 창조적인 영감과 통찰이 샘솟는다. 집중력도 높아지고 의욕도 강해진다. 이런 상태로 일을 하면 능률도 훨씬 오른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참자아(속사람)가 깨어나는 것이다!
기도의 면面
기도의 점을 찍고, 기도의 선이 이어지면 기도의 “면”이 생긴다. 점이나 선에 비교할 때 면은 엄청나게 큰 도형이다. 따라서 기도의 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기도의 분량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기도의 면이 만들어지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면”을 보게 된다.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면만 보지 않고 이면을 본다. 정면만 보지 않고 측면을 본다. 일면만 보지 않고 양면을 보며, 외면만 보지 않고 내면을 본다. 이처럼 이면, 측면, 양면, 내면을 보기에 사람을 입체적으로 보고, 삶을 전체적으로 본다. 참자아가 보이고 영성현실이 보인다. 참자아를 볼 때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해방되며, 영성현실을 볼 때 절망스러운 삶 속에서 희망이 싹튼다.
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시종이 두려워하자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 시종의 눈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왕하 6:17) 그러자 시종은 불 말과 불 수레가 자기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현실 곧 영성현실을 본 것이다. 그때 시종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삶은 결코 일면적이지도 표면적이지도 않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삶은 다면적이며 심층적이다. 삶의 “다면”과 “심층”을 보면 겉으로 보이는 시련과 고통 너머에서 은총과 의미를 발견한다. 섭리의 차원을 보면서 삶의 신비를 깨닫는다.
기도의 입체立體
기도의 입체라는 것은 기도가 삶 전체에 스며들 정도로 풍성한 경지를 일컫는다. 기도의 분량,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일상의 모든 것을 덮을 정도로 넘친다. 하여, 기도가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 관계와 일 속을 쉬지 않고 흐른다. 기도가 흐르는 삶을 생각해 보라. 기도가 이끄는 관계를 생각해 보라. 기도가 만드는 일을 생각해 보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온갖 충만으로 충만한”(엡 3:19) 삶 아니겠는가.
기도의 점을 찍는 것이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의 선을 잇는 것이 규칙적으로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며, 기도의 면을 만드는 것이 기도하는 눈으로 곧 하나님의 눈으로 삶의 이면과 내면을 보는 것이라면, “기도의 입체가 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모든” 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사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는 뜻이다. 이때 삶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삶이 된다.
이렇게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면 “현존인지 감수성”이 깨어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성사적 감수성”이 깨어나 삼라만상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중보적 상상력”이 깨어나 내가 거대한 중보기도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감을 깨닫는다. 이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발견한다. 심지어 불행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앖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1-13)
예술 중의 예술
기독교 교부들은 기도를 예술에 비유했다. 기도는 “예술 중의 예술”이다. 기도는 사람과 삶을 새롭게 조형(造形)한다. 새로운 사람을 빚고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기도만한 예술이 없다. 돌로 조각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을 새롭게 빚는 것이 더 심오하고,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삶을 새롭게 그리는 것이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가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기도만큼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도 없다. 기도는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하늘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고급 옷이나 화장품이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주기도 하지만, 기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옷이나 화장품은 겉을 꾸며주지만 기도는 영혼을 고결하게 하고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을 단장해주기 때문이다.
또 기도하는 사람에게서는 신성한 아우라가 풍긴다. 그래서 성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할 때 사람과 천사의 본성은 똑같아진다. 기도는 야만적인 짐승에서 분리하여 우리를 천사와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침묵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는 천사처럼 살고, 천사의 지위를 얻고, 천사처럼 행동하고, 천사의 영예와 천사의 품위와 천사의 지혜와 천사의 신중함을 갖추게 될 것이다.
기도는 짐승 같은 인간을 천사 같은 존재로 만든다.
삶이란 “선택의 누적분累積分”이다. 다시 말해 선택한 것이 쌓여 인격을 빚고 운명을 짓는다. 그러니 날마다 세속의 쾌락을 선택한 사람의 삶과 기도를 선택한 사람의 삶이 어떨지를 생각해 보라! 기도를 선택해서 날마나 기도의 점을 찍고, 기도의 선을 잇고, 기도의 면을 만들고, 기도의 입체가 된 사람의 삶과 허구한 날 육체의 쾌락과 재미를 쫓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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