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현존과 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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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02회 작성일 23-08-16 12:11본문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45:5)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나무를 보는 눈
나무를 보는 여러 개의 눈이 있다. 첫 번째는 “몸의 눈” 즉 육안이다. 육안으로는 주로 나무의 겉모습을 본다. 나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무를 그릴 수도 있고 나무에 대한 노래나 시를 지을 수도 있다. 이때 나무는 향유의 대상이다.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도 있다. 이때 나무는 이용의 대상이다. 나무로 목재를 만들어 팔 수도 있다. 이때 나무는 소비의 대상이다. “몸눈”은 나무를 보더라도 인간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나무를 본다. 주로 겉모습을 보며 부분을 본다.
나무를 보는 두 번째 눈은 “머리의 눈”이다. 머리의 눈은 분석하는 눈이다. 과학이 이를 도와준다. 과학은 현미경이라는 또 다른 눈을 인간에게 제공하여 몸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게 한다. 이용・소비・향유의 대상이었던 나무는 연구 대상이 된다. 관찰과 분석을 통해 “머리눈”은 몸눈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본다. 나무의 화학적 성분이나 광합성을 통한 생장 과정도 본다. 몸눈이 겉을 본다면 머리눈은 속도 본다. 몸눈이 부분을 본다면 머리눈은 세부를 본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머리눈은 나무에게서 개별성(고유성)을 삭제한다.
나무를 보는 세 번째 눈은 “마음의 눈”Eye of Heart이다. 머리에 갇힌 눈이 아니라 열린 가슴으로 보는 눈이다. 마음의 눈으로 나무를 보면 한 그루의 나무도 뿌리를 통해 생명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이 보인다. 북한산의 나무는 로키산맥의 나무와 대지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뿐 아니다. 나무는 나무끼리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한 인간과도 연결되어 있다. 나무 한 그루는 그 자체로 생명 세계의 일부다. 내가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나무도 유일무이한 생명이다. 몸눈이 부분을 보고, 머리눈이 세부를 본다면, “마음눈”은 전체를 본다. 몸눈이 나무를 이용・소비・향유의 대상으로 보고, 머리눈이 나무를 연구・탐구・분석의 대상으로 본다면, 가슴눈은 나무를 직관하면서 나무 한 그루를 통해 생명세계 전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직관으로 보면 나무 한 그루에는 온 우주가 들어있다.
한 그루의 나무는 대지를 통해 생명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플립〉Flipped이라는 영화가 있다. 줄리라는 여자아이와 브라이스라는 남자아이가 사랑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리의 아빠는 화가인데 어느 날 줄리에게 풍경화 그리는 법을 들려준다. “항상 전체 풍경을 봐야 해. 그림은 단지 부분들이 합쳐진 게 아니야.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비추는 태양은 그냥 한 줌의 빛일 뿐이지만, 그 모든 게 함께 어우러지면 마법이 되거든. 부분이 모여 아름다운 전체를 이루는 거지.”
하지만 줄리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분이니 전체니 하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줄리는 동네에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 올라간다. 그곳에서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을 보았을 때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무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던 날, ‘부분이 모여 아름다운 전체를 이룬다’는 아빠 말씀이 비로소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왔다.”
그날부터 줄리는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줄리의 “주변을 보는 눈”이 바뀌기 시작한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새집을 지으려는 주인은 줄리에게 전체를 보는 눈을 열어준 플라타너스 나무를 잘라내려고 한다. 그럴 수 없다며 줄리는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틴다. 줄리에겐 나무가 소비의 대상이나 이용 대상이나 향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탐구와 분석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생명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무는 잘리고 만다.
신성의 눈
네 번째 눈이 있다. 나는 이것을 “신성의 눈”이라고 부르고 싶다. 신성의 눈은 겉도 보고 속도 본다. 대강大綱도 보고 세부도 본다. 부분도 보고 전체도 본다. 무엇보다 모든 것 속에서 신성을 보고 성스러움을 본다.
이 눈이 바로 지난 주에 말한 “관상적 시선”이다. 관상적 시선은 관상 상태에서 열리는 눈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열리는 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물 때 열리는 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 때 성령의 감동으로 열리는 눈이다. 이 눈은 몸눈도 아니고, 머리눈도 아니고, 가슴눈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눈이며,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보는 하나님의 눈이다. 이 눈은 단순히 “신성한 눈”sacred eye 또는 “거룩한 눈”holy eye이 아니라 “신성의 눈”eye of Godhead이다. 신성이 주체인 눈이다. 하나님이 주체인 눈, 곧 하나님의 눈이다. 이 눈은 겉과 속, 대강과 세부, 부분과 전체를 보면서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본다. 당연히 나무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본다.
이 눈이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말하는 “안식일의 눈”이다. “[대상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린 눈”, “대상으로부터 그것이 창조되는 날의 고요의 흔적을 되살려내는” 눈! “태초에 조물주가 세상을 보았을 법한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보기에 좋은” 눈, 인간을 욕망의 도구나 쓰다가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 어떤 굴종도 강요할 수 없는 무한으로(레비나스) 보는 눈!
이 눈이 기적을 일으킨다. 이 눈으로 볼 때 “나”는 더 이상 문제투성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이 눈으로 볼 때 “너”는 더 이상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소울프렌드가 된다. 삶은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이 넘실거리는 고해苦海가 아니라 신비와 신성이 충만한 섭리의 바다로 경험된다. 모든 순간에 섭리, 곧 “신성한 삶의 배열”을 알아차리게 되는 삶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요셉이 그랬다. 관상적 시선 곧 신성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보았을 때 그의 기구한 운명은 은총의 여정으로 변형되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4-5)
승복, 승복, 승복
그러면 어떻게 하면 “신성의 눈”을 얻을 수 있을까? “승복”承服에 답이 있다. 이번 피정에서 받은 은혜중에 빛나는 것은 “승복”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었다. 피정에서 돌아온 다음 날 한 길벗이 보내온 “피정참여기”가 계기였다. 길벗은 이런 말로 시작했다.
어제 피정에 다녀와서 지금 저는 울고 있습니다. 이 늙은 사람이 컴퓨터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자판이 흐릿하고 글자가 어른거립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길벗은 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모양이다. 그 깨달음의 감동이 첫 문장에서부터 물씬 풍겼다. 길벗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까? 길벗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근래에 저의 최대 관심사는 관상기도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인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민재 목사님이 읽고 번역해보라며 기도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Finding God『하나님 만나기』라는 책인데, 기도 방법에 관한 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Prayer『기도』라는 책인데, 다양한 기도의 내용에 관한 책입니다. (…) 두 책을 번역하고 나서 든 생각은 기도가 크게 “간구기도”와 “관상기도”로 나눠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간구기도에 관한 대목을 읽을 때는 간구기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관상기도에 관한 대목을 읽을 때는 관상기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기도』의 마지막 장인 “기도의 본질”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교제’하는 것”이라면서 “이 교제는 승복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정의합니다. “아, 이거야!” 하는 깨달음과 함께 “현존-승복-교제”라는 세 개념이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제”의 전! 아름다웠습니다. 그게 기도였습니다.
그 후로 저는 무엇보다 “승복”이라는 말에 도취됐습니다. 간구기도와 관상기도를 승복에 비춰보았습니다. 결론은 이랬습니다. “간구기도는 승복과 무관하다, 아니 역행한다. 관상기도에서는 승복이 중요하다, 아니 본질이다.” 나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현존과 승복”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길벗은 기도 공부와 수행을 통해 기도가 “하나님의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제의 전”임을 스스로 터득했다. 정말 핵심을 찌르는 아름다운 정의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길벗은 “현존”과 함께 “승복”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기도가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제의 전임을 깨달았을 때 길벗은 곳곳에서 현존과 승복을 알아차렸다.
피정의 집을 향하면서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습니다.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피정의집〉. 이름이 왜 이렇게 복잡해, 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그 이름에서 현존과 승복이 보였습니다. “스승 예수”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보았고, “제자 수녀회”에서 수녀님들의 승복을 보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바위에 새겨진 “한적한 곳에서 함께 좀 쉬자”라는 말씀을 보았을 때, 여기에서도 현존과 승복이 보였습니다. “한적한 곳에서”는 현존이었고, “함께 좀 쉬자”는 승복이었습니다. 특히 “좀 쉬자”에서 예수님도 승복하심을 알았고, 이 쉼은 죽음에 이르는 승복과 연결되었습니다. 오, 위대한 현존이여! 오, 아름다운 승복이여!
길벗은 승복에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았다. 하여,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위대한 현존이여! 오, 아름다운 승복이여!” 이 길벗에게서 현존과 승복에 대한 알아차림은 피정 내내 계속되었다.
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향심기도〉를 하면서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을 살며시 올려놓았습니다. 현존과 승복은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은 제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입니다.) 〈예수기도〉 할 때도 현존과 승복을 느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는 대목은 현존이었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대목은 승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존기도〉야말로 “현존과 승복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앞에서 나를 인도하십니다”에서 현존을 경험했고, “주님을 사랑합니다”에서 승복을 경험했습니다. 나머지 일곱 방향에서 모두 현존과 승복을 경험했습니다.
맞다! 현존과 승복은 향심기도의 핵심이다. 향심기도 실천 지침 첫 번째 항목이 바로 현존과 승복에 관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단어”로 하는 기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룩한 단어의 뜻이 바로 현존과 승복이다. 토머스 키팅의 말이기도 하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머물겠다는 지향과 하나님의 활동에 승복하겠다는 지향을 나타낸다.”
나의 피정참여기
이 길벗이 보내온 “피정참여기”를 읽으며 나는 그동안 현존은 많이 강조했지만 “승복”은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복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수용하겠다는 “받아들임”이며,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내어맡김”이다. 하나님이 나를 깨끗이 정화하신다면 그것도 받아들이고, 에고를 깨뜨리신다면 그것도 받아들이며, 거짓자아를 부수신다면 그것도 받아들인다는 절대적 수용과 전폭적인 맡김이다. 결국 시편 시인처럼 “하나님이 꺾으신 뼈들로 기뻐하며 춤추겠다”(시 51:8)는 마음가짐이며,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는 고백이다. 이게 향심기도가 추구하는 “순수한 믿음”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눈, 관상적 시선을 깨닫는다. 겉과 속, 대강과 세부, 부분과 전체에서 신성을 보는 눈 말이다.
향심기도(관상기도) 수련을 하면서 별로 발전한다는 느낌이 없다면 승복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승복하겠다는 의향을 갖고 수행할 때 영적 진보는 가속화한다. 향심기도 수련은 참자아에 뿌리내린 성화와 완전의삶으로 이끌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승복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가 주님”이라는 우리의 고백은 모두 허사虛辭가 되어 허사虛事가 된다. 하지만 승복을 통해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님이 될 때 바울의 말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롬 10:13) 구원이란 무엇인가. “대상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린” 그리스도의 눈, “대상으로부터 그것이 창조될 때의 고요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신성의 눈 곧 하나님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하니, 벗들! 날마다 향심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에 고요히 머무르면서 편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생각에 승복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승복하라. 미움이나 분노 같은 일시적인 감정에 승복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승복하라. 고집이나 자존심 따위 자기중심적인 의지(에고)에 승복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승복하라.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닮고 따르는 길이며, “궁극의 새로움”Novum Ultumum인 천국에 이르는 길이다.
- 이민재
(창세기 45:5)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나무를 보는 눈
나무를 보는 여러 개의 눈이 있다. 첫 번째는 “몸의 눈” 즉 육안이다. 육안으로는 주로 나무의 겉모습을 본다. 나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무를 그릴 수도 있고 나무에 대한 노래나 시를 지을 수도 있다. 이때 나무는 향유의 대상이다.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도 있다. 이때 나무는 이용의 대상이다. 나무로 목재를 만들어 팔 수도 있다. 이때 나무는 소비의 대상이다. “몸눈”은 나무를 보더라도 인간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나무를 본다. 주로 겉모습을 보며 부분을 본다.
나무를 보는 두 번째 눈은 “머리의 눈”이다. 머리의 눈은 분석하는 눈이다. 과학이 이를 도와준다. 과학은 현미경이라는 또 다른 눈을 인간에게 제공하여 몸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게 한다. 이용・소비・향유의 대상이었던 나무는 연구 대상이 된다. 관찰과 분석을 통해 “머리눈”은 몸눈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본다. 나무의 화학적 성분이나 광합성을 통한 생장 과정도 본다. 몸눈이 겉을 본다면 머리눈은 속도 본다. 몸눈이 부분을 본다면 머리눈은 세부를 본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머리눈은 나무에게서 개별성(고유성)을 삭제한다.
나무를 보는 세 번째 눈은 “마음의 눈”Eye of Heart이다. 머리에 갇힌 눈이 아니라 열린 가슴으로 보는 눈이다. 마음의 눈으로 나무를 보면 한 그루의 나무도 뿌리를 통해 생명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이 보인다. 북한산의 나무는 로키산맥의 나무와 대지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뿐 아니다. 나무는 나무끼리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한 인간과도 연결되어 있다. 나무 한 그루는 그 자체로 생명 세계의 일부다. 내가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나무도 유일무이한 생명이다. 몸눈이 부분을 보고, 머리눈이 세부를 본다면, “마음눈”은 전체를 본다. 몸눈이 나무를 이용・소비・향유의 대상으로 보고, 머리눈이 나무를 연구・탐구・분석의 대상으로 본다면, 가슴눈은 나무를 직관하면서 나무 한 그루를 통해 생명세계 전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직관으로 보면 나무 한 그루에는 온 우주가 들어있다.
한 그루의 나무는 대지를 통해 생명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플립〉Flipped이라는 영화가 있다. 줄리라는 여자아이와 브라이스라는 남자아이가 사랑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리의 아빠는 화가인데 어느 날 줄리에게 풍경화 그리는 법을 들려준다. “항상 전체 풍경을 봐야 해. 그림은 단지 부분들이 합쳐진 게 아니야.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비추는 태양은 그냥 한 줌의 빛일 뿐이지만, 그 모든 게 함께 어우러지면 마법이 되거든. 부분이 모여 아름다운 전체를 이루는 거지.”
하지만 줄리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분이니 전체니 하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줄리는 동네에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 올라간다. 그곳에서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을 보았을 때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무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던 날, ‘부분이 모여 아름다운 전체를 이룬다’는 아빠 말씀이 비로소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왔다.”
그날부터 줄리는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줄리의 “주변을 보는 눈”이 바뀌기 시작한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새집을 지으려는 주인은 줄리에게 전체를 보는 눈을 열어준 플라타너스 나무를 잘라내려고 한다. 그럴 수 없다며 줄리는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틴다. 줄리에겐 나무가 소비의 대상이나 이용 대상이나 향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탐구와 분석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생명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무는 잘리고 만다.
신성의 눈
네 번째 눈이 있다. 나는 이것을 “신성의 눈”이라고 부르고 싶다. 신성의 눈은 겉도 보고 속도 본다. 대강大綱도 보고 세부도 본다. 부분도 보고 전체도 본다. 무엇보다 모든 것 속에서 신성을 보고 성스러움을 본다.
이 눈이 바로 지난 주에 말한 “관상적 시선”이다. 관상적 시선은 관상 상태에서 열리는 눈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열리는 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물 때 열리는 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 때 성령의 감동으로 열리는 눈이다. 이 눈은 몸눈도 아니고, 머리눈도 아니고, 가슴눈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눈이며,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보는 하나님의 눈이다. 이 눈은 단순히 “신성한 눈”sacred eye 또는 “거룩한 눈”holy eye이 아니라 “신성의 눈”eye of Godhead이다. 신성이 주체인 눈이다. 하나님이 주체인 눈, 곧 하나님의 눈이다. 이 눈은 겉과 속, 대강과 세부, 부분과 전체를 보면서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본다. 당연히 나무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본다.
이 눈이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말하는 “안식일의 눈”이다. “[대상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린 눈”, “대상으로부터 그것이 창조되는 날의 고요의 흔적을 되살려내는” 눈! “태초에 조물주가 세상을 보았을 법한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보기에 좋은” 눈, 인간을 욕망의 도구나 쓰다가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 어떤 굴종도 강요할 수 없는 무한으로(레비나스) 보는 눈!
이 눈이 기적을 일으킨다. 이 눈으로 볼 때 “나”는 더 이상 문제투성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이 눈으로 볼 때 “너”는 더 이상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소울프렌드가 된다. 삶은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이 넘실거리는 고해苦海가 아니라 신비와 신성이 충만한 섭리의 바다로 경험된다. 모든 순간에 섭리, 곧 “신성한 삶의 배열”을 알아차리게 되는 삶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요셉이 그랬다. 관상적 시선 곧 신성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보았을 때 그의 기구한 운명은 은총의 여정으로 변형되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4-5)
승복, 승복, 승복
그러면 어떻게 하면 “신성의 눈”을 얻을 수 있을까? “승복”承服에 답이 있다. 이번 피정에서 받은 은혜중에 빛나는 것은 “승복”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었다. 피정에서 돌아온 다음 날 한 길벗이 보내온 “피정참여기”가 계기였다. 길벗은 이런 말로 시작했다.
어제 피정에 다녀와서 지금 저는 울고 있습니다. 이 늙은 사람이 컴퓨터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자판이 흐릿하고 글자가 어른거립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길벗은 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모양이다. 그 깨달음의 감동이 첫 문장에서부터 물씬 풍겼다. 길벗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까? 길벗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근래에 저의 최대 관심사는 관상기도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인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민재 목사님이 읽고 번역해보라며 기도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Finding God『하나님 만나기』라는 책인데, 기도 방법에 관한 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Prayer『기도』라는 책인데, 다양한 기도의 내용에 관한 책입니다. (…) 두 책을 번역하고 나서 든 생각은 기도가 크게 “간구기도”와 “관상기도”로 나눠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간구기도에 관한 대목을 읽을 때는 간구기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관상기도에 관한 대목을 읽을 때는 관상기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기도』의 마지막 장인 “기도의 본질”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교제’하는 것”이라면서 “이 교제는 승복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정의합니다. “아, 이거야!” 하는 깨달음과 함께 “현존-승복-교제”라는 세 개념이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제”의 전! 아름다웠습니다. 그게 기도였습니다.
그 후로 저는 무엇보다 “승복”이라는 말에 도취됐습니다. 간구기도와 관상기도를 승복에 비춰보았습니다. 결론은 이랬습니다. “간구기도는 승복과 무관하다, 아니 역행한다. 관상기도에서는 승복이 중요하다, 아니 본질이다.” 나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현존과 승복”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길벗은 기도 공부와 수행을 통해 기도가 “하나님의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제의 전”임을 스스로 터득했다. 정말 핵심을 찌르는 아름다운 정의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길벗은 “현존”과 함께 “승복”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기도가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의 기둥으로 세워진 교제의 전임을 깨달았을 때 길벗은 곳곳에서 현존과 승복을 알아차렸다.
피정의 집을 향하면서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습니다.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피정의집〉. 이름이 왜 이렇게 복잡해, 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그 이름에서 현존과 승복이 보였습니다. “스승 예수”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보았고, “제자 수녀회”에서 수녀님들의 승복을 보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바위에 새겨진 “한적한 곳에서 함께 좀 쉬자”라는 말씀을 보았을 때, 여기에서도 현존과 승복이 보였습니다. “한적한 곳에서”는 현존이었고, “함께 좀 쉬자”는 승복이었습니다. 특히 “좀 쉬자”에서 예수님도 승복하심을 알았고, 이 쉼은 죽음에 이르는 승복과 연결되었습니다. 오, 위대한 현존이여! 오, 아름다운 승복이여!
길벗은 승복에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았다. 하여,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위대한 현존이여! 오, 아름다운 승복이여!” 이 길벗에게서 현존과 승복에 대한 알아차림은 피정 내내 계속되었다.
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향심기도〉를 하면서 현존의 바탕 위에 승복을 살며시 올려놓았습니다. 현존과 승복은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은 제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입니다.) 〈예수기도〉 할 때도 현존과 승복을 느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는 대목은 현존이었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대목은 승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존기도〉야말로 “현존과 승복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앞에서 나를 인도하십니다”에서 현존을 경험했고, “주님을 사랑합니다”에서 승복을 경험했습니다. 나머지 일곱 방향에서 모두 현존과 승복을 경험했습니다.
맞다! 현존과 승복은 향심기도의 핵심이다. 향심기도 실천 지침 첫 번째 항목이 바로 현존과 승복에 관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단어”로 하는 기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룩한 단어의 뜻이 바로 현존과 승복이다. 토머스 키팅의 말이기도 하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머물겠다는 지향과 하나님의 활동에 승복하겠다는 지향을 나타낸다.”
나의 피정참여기
이 길벗이 보내온 “피정참여기”를 읽으며 나는 그동안 현존은 많이 강조했지만 “승복”은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복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수용하겠다는 “받아들임”이며,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내어맡김”이다. 하나님이 나를 깨끗이 정화하신다면 그것도 받아들이고, 에고를 깨뜨리신다면 그것도 받아들이며, 거짓자아를 부수신다면 그것도 받아들인다는 절대적 수용과 전폭적인 맡김이다. 결국 시편 시인처럼 “하나님이 꺾으신 뼈들로 기뻐하며 춤추겠다”(시 51:8)는 마음가짐이며,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는 고백이다. 이게 향심기도가 추구하는 “순수한 믿음”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눈, 관상적 시선을 깨닫는다. 겉과 속, 대강과 세부, 부분과 전체에서 신성을 보는 눈 말이다.
향심기도(관상기도) 수련을 하면서 별로 발전한다는 느낌이 없다면 승복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승복하겠다는 의향을 갖고 수행할 때 영적 진보는 가속화한다. 향심기도 수련은 참자아에 뿌리내린 성화와 완전의삶으로 이끌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승복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가 주님”이라는 우리의 고백은 모두 허사虛辭가 되어 허사虛事가 된다. 하지만 승복을 통해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님이 될 때 바울의 말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롬 10:13) 구원이란 무엇인가. “대상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린” 그리스도의 눈, “대상으로부터 그것이 창조될 때의 고요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신성의 눈 곧 하나님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하니, 벗들! 날마다 향심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에 고요히 머무르면서 편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생각에 승복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승복하라. 미움이나 분노 같은 일시적인 감정에 승복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승복하라. 고집이나 자존심 따위 자기중심적인 의지(에고)에 승복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승복하라.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닮고 따르는 길이며, “궁극의 새로움”Novum Ultumum인 천국에 이르는 길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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