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공중에서 하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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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44회 작성일 23-06-05 11:29본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엡 2:6)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엡 2:10)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전자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며, 후자는 삶에 대한 물음이다.
삶의 공간
바울은 “세상” “공중” “하늘” 세 개의 공간 개념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세상. 세상은 삶이 이뤄지는 일상의 공간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곳,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며 노는 곳이다. 사회와 국가, 역사와 자연을 포함한 삶의 외부 조건이며 환경이다.
공중. 국어사전은 공중을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이곳에 공기가 있어서 숨을 쉴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인들에게 공중은 빈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공중은 악령이 사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악령이 바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공중에 꽉 차 있다고 믿었다. 바울에 따르면,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이 공중을 지배한다.
하늘. 국어사전은 하늘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 날씨가 맑을 때 광활하게 펼쳐진 파란 공간이다. 바울에 따르면, 자비가 넘치고 사랑이 크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공중이 악마의 영역이라면, 하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장소에 대한 메타포다. 그리스도인이란 공중에서 하늘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중에서 하늘로 옮겨진 사람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노숙하다가 처음으로 하늘 경험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창 28:17) 예수님은 세례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렸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막 1:10) 스데반도 하늘이 열린 사람이었기에 순교할 때 이렇게 외쳤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행 7:56)
삶의 현실
공중과 하늘, 그리고 세상은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세 공간을 “내면화”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 가지 삶의 현실이 펼쳐진다. 내면화의 원조는 예수님이다. 하늘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면화할 때 하늘나라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으로 변형된다. 내면화를 통해 밝혀지는 삶의 세 현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활현실. 성경이 “세상”라고 표현한 현실이다. 가족, 직장, 종교, 사회, 국가, 역사, 자연 등, 생활현실의 영역은 다양하다. 일도 이 영역에 속하며, 몸도 이 영역에 속하며, 혈연・지연・학연도 이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생활현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둘째, 심리현실. 성경이 “공중”이라고 표현한 현실이다. “마음현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심리현실은 성장 과정과 삶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심리현실을 형성하는 가장 기초 단위는 가족이다. 가족을 통해 형성된 심리현실은 거의 평생 지속된다. 심리현실은 성장함에 따라 자란다. 어른의 심리현실은 아이의 심리현실에 비해 훨씬 크다. 그리고 어둡다.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들은 금세 증발하기 때문이다. 또 심리현실은 전염된다. 사람들의 심리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거의 무한대로 커진다. 심리현실의 힘은 거대하고 거세고 거칠다. 그게 악마・어둠・사탄의 “권세”다.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나 수행을 통해 극복하지 않으면 심리현실은 대물림된다.
심리현실과 생활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심리현실이 생활현실의 영향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그렇게 형성된 심리현실이 생활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심리현실과 생활현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그리스도가 개입하지 않으면 이 두 현실의 운명적이며 부정적인 결합을 깨뜨릴 수 없다.
셋째, 영성현실. 성경이 “하늘”이라고 표현한 현실이다. 이것도 내적 현실이지만 심리현실보다 심층적이고 본질적이다. 참자아의 원형인 그리스도를 통해 열리는 현실이며,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고 다스리시는 현실이다. 내면의 하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성현실은 이미 현존한다. 이것은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깨달음(각성)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영성현실을 각성했다는 뜻이다. 스데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성현실을 각성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영성현실을 각성한 사람 곧 내면의 하늘이 열린 사람이다. 내면의 하늘이 열려야, 즉 영성현실을 자각해야 심리현실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영성현실을 자각한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공중 즉 심리현실에 예속되어 하는 사람이 많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심리현실 차원, 내면의 공중을 벗어나지 못한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그리고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대표적이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 목적은 영성현실을 각성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엡 2:6) 우리가 관상수행을 하는 목적은 내면의 하늘인 영성현실에 뿌리내리고, 이 현실과 조율된 삶을 살기 위해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 목적은 영성현실을 각성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상수행을 하는 목적은 내면의 하늘인 영성현실에 뿌리내리고, 이 현실과 조율된 삶을 살기 위해서다.
삶이란
심리현실의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영성현실에 포섭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심리현실의 지배를 받을 때, 즉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산다.
심리현실에 지배를 받을 때 경험하는 이 세상 풍조란 무엇일까? 비교와 평가와 경쟁이다.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하고 경쟁한다. 인정받기 위한 무한비교・무한평가・무한경쟁이 일상화된다. 성적과 실적을 올리고 업적을 내기 위한 노력이 필사적이다. 그럴수록 피로가 쌓이고 만족이 없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진노의 자식”이 따로 없다. 마음엔 늘 분노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분노뿐인가. 불만과 결핍감, 열등감과 수치심, 우울과 절망이 뒤따른다.
악마가 원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남처럼” 되는 것! 아담과 이브가 바로 그 덫에 걸렸다. 뱀이라는 남의 속삭임을 하나님 말씀처럼 귀 기울였고, 남처럼, 심지어 하나님“처럼” 되라는 꾐에 넘어갔다. 남처럼 되고, 남의 인정을 받으려는 순간, 그러기 위해 비교하고 평가하고 경쟁하는 순간, 삶은 허공에 뜨기 시작한다. 가상현실이 삶의 실재(reality)를, 허구와 허상이 실재의 삶을 삼키기 시작한다. 남처럼 되고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기를 쓸 때 웃는 것은 악마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실상과 실재에서 떠나 허상과 환상에 붙들려 울고불고한다. 남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서는 존재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조화(造花)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생명 세계에는 남처럼 되려는 노력도 없고,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애씀도 없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궁궐에 핀 백합은 들판에 핀 무명초를 나무라지 않는다. 생명은 자기를 실현하여 자기의 형태와 색깔과 향기를 드러낼 뿐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로 존재한다. 결국 자기로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활현실이 영성현실에 포섭되면 삶의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삶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을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엡 2:5) 이뿐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는 더 이상 진노의 자식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빛나는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비로소 사람들은 인정의 덫에서 벗어난다. 당연히 무한비교, 무한경쟁의 뫼비우스 띠에서도 해방된다. 마침내 나는 남이 아니라 “나”를 살기 시작한다. 나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다워진다. 진정한 내가 된다. 나만의 형태와 색깔과 향기가 세상을 새롭게 가꾼다.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펀치넬로 이야기
요즘 교회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관상 영성에 기반한 교재를 만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떤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 나무 사람들은 빛나는 별표가 든 상자와 잿빛 점표가 든 상자를 들고 서로에게 별표나 점표를 붙였다. 나무결이 매끄럽고 색이 잘 칠해진 나무 사람들은 별표를 받고, 나무결이 거칠고 칠이 벗겨진 나무 사람들은 점표를 받았다. 별표를 받으면 기분이 좋았고, 점표를 받으면 기분이 나빴다.
펀치넬로는 허구한 날 잿빛 점표를 받았다. 잘 하는 게 없었고, 힘도 약하고, 말도 잘 못 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점표가 누덕누덕 붙어있었다. 나무 사람들은 펀치넬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펀치넬로는 좋은 나무 사람이 아니야.” 펀치넬로는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며, 스스로 좋은 나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펀치넬로는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은 루시아를 만났다. 다른 나무 사람들이 루시아에게 별표과 점표를 붙여도 금방 떨어졌다. 펀치넬로가 어떻게 몸에 표가 없는지 묻자 루시아가 대답했다. “별 거 아니야. 난 매일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 엘리 아저씨는 나무 사람을 만든 장인이었다.
펀치넬로는 잿빛 점표로 가득한 자기 몸을 보며 과연 엘리 아저씨가 자신을 환영해 줄지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갔다. 다른 나무 사람들이 붙인 잿빛 점표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자 엘리 아저씨는 펀치넬로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펀치넬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너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단다. 난 네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
“루시아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남들이 붙이는 별표도 점표도 떨어진단다.”
“그 표는 네가 붙어 있게 하기 때문에 붙는 거란다. 네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만 붙는 거야.”
“다른 나무 사람들이 붙이는 점표나 별표와 상관 없이 너는 이미 별이란다!”
우리에게도 엘리 아저씨의 확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관상수련(예수기도, 향심기도)이란 펀치넬로가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갔듯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교와 평가와 경쟁으로 분노하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이미 특별한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닫는다.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드신!
관상수련이란 펀치넬로가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갔듯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교와 평가와 경쟁으로 분노하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이미 특별한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닫는다.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드신!
- 이민재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엡 2:6)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엡 2:10)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전자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며, 후자는 삶에 대한 물음이다.
삶의 공간
바울은 “세상” “공중” “하늘” 세 개의 공간 개념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세상. 세상은 삶이 이뤄지는 일상의 공간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곳,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며 노는 곳이다. 사회와 국가, 역사와 자연을 포함한 삶의 외부 조건이며 환경이다.
공중. 국어사전은 공중을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이곳에 공기가 있어서 숨을 쉴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인들에게 공중은 빈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공중은 악령이 사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악령이 바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공중에 꽉 차 있다고 믿었다. 바울에 따르면,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이 공중을 지배한다.
하늘. 국어사전은 하늘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 날씨가 맑을 때 광활하게 펼쳐진 파란 공간이다. 바울에 따르면, 자비가 넘치고 사랑이 크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공중이 악마의 영역이라면, 하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장소에 대한 메타포다. 그리스도인이란 공중에서 하늘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중에서 하늘로 옮겨진 사람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노숙하다가 처음으로 하늘 경험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창 28:17) 예수님은 세례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렸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막 1:10) 스데반도 하늘이 열린 사람이었기에 순교할 때 이렇게 외쳤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행 7:56)
삶의 현실
공중과 하늘, 그리고 세상은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세 공간을 “내면화”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 가지 삶의 현실이 펼쳐진다. 내면화의 원조는 예수님이다. 하늘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면화할 때 하늘나라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으로 변형된다. 내면화를 통해 밝혀지는 삶의 세 현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활현실. 성경이 “세상”라고 표현한 현실이다. 가족, 직장, 종교, 사회, 국가, 역사, 자연 등, 생활현실의 영역은 다양하다. 일도 이 영역에 속하며, 몸도 이 영역에 속하며, 혈연・지연・학연도 이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생활현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둘째, 심리현실. 성경이 “공중”이라고 표현한 현실이다. “마음현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심리현실은 성장 과정과 삶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심리현실을 형성하는 가장 기초 단위는 가족이다. 가족을 통해 형성된 심리현실은 거의 평생 지속된다. 심리현실은 성장함에 따라 자란다. 어른의 심리현실은 아이의 심리현실에 비해 훨씬 크다. 그리고 어둡다.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들은 금세 증발하기 때문이다. 또 심리현실은 전염된다. 사람들의 심리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거의 무한대로 커진다. 심리현실의 힘은 거대하고 거세고 거칠다. 그게 악마・어둠・사탄의 “권세”다.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나 수행을 통해 극복하지 않으면 심리현실은 대물림된다.
심리현실과 생활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심리현실이 생활현실의 영향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그렇게 형성된 심리현실이 생활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심리현실과 생활현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그리스도가 개입하지 않으면 이 두 현실의 운명적이며 부정적인 결합을 깨뜨릴 수 없다.
셋째, 영성현실. 성경이 “하늘”이라고 표현한 현실이다. 이것도 내적 현실이지만 심리현실보다 심층적이고 본질적이다. 참자아의 원형인 그리스도를 통해 열리는 현실이며,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고 다스리시는 현실이다. 내면의 하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성현실은 이미 현존한다. 이것은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깨달음(각성)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영성현실을 각성했다는 뜻이다. 스데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성현실을 각성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영성현실을 각성한 사람 곧 내면의 하늘이 열린 사람이다. 내면의 하늘이 열려야, 즉 영성현실을 자각해야 심리현실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영성현실을 자각한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공중 즉 심리현실에 예속되어 하는 사람이 많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심리현실 차원, 내면의 공중을 벗어나지 못한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그리고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대표적이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 목적은 영성현실을 각성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엡 2:6) 우리가 관상수행을 하는 목적은 내면의 하늘인 영성현실에 뿌리내리고, 이 현실과 조율된 삶을 살기 위해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 목적은 영성현실을 각성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상수행을 하는 목적은 내면의 하늘인 영성현실에 뿌리내리고, 이 현실과 조율된 삶을 살기 위해서다.
삶이란
심리현실의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영성현실에 포섭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심리현실의 지배를 받을 때, 즉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산다.
심리현실에 지배를 받을 때 경험하는 이 세상 풍조란 무엇일까? 비교와 평가와 경쟁이다.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하고 경쟁한다. 인정받기 위한 무한비교・무한평가・무한경쟁이 일상화된다. 성적과 실적을 올리고 업적을 내기 위한 노력이 필사적이다. 그럴수록 피로가 쌓이고 만족이 없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진노의 자식”이 따로 없다. 마음엔 늘 분노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분노뿐인가. 불만과 결핍감, 열등감과 수치심, 우울과 절망이 뒤따른다.
악마가 원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남처럼” 되는 것! 아담과 이브가 바로 그 덫에 걸렸다. 뱀이라는 남의 속삭임을 하나님 말씀처럼 귀 기울였고, 남처럼, 심지어 하나님“처럼” 되라는 꾐에 넘어갔다. 남처럼 되고, 남의 인정을 받으려는 순간, 그러기 위해 비교하고 평가하고 경쟁하는 순간, 삶은 허공에 뜨기 시작한다. 가상현실이 삶의 실재(reality)를, 허구와 허상이 실재의 삶을 삼키기 시작한다. 남처럼 되고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기를 쓸 때 웃는 것은 악마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실상과 실재에서 떠나 허상과 환상에 붙들려 울고불고한다. 남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서는 존재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조화(造花)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생명 세계에는 남처럼 되려는 노력도 없고,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애씀도 없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궁궐에 핀 백합은 들판에 핀 무명초를 나무라지 않는다. 생명은 자기를 실현하여 자기의 형태와 색깔과 향기를 드러낼 뿐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로 존재한다. 결국 자기로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활현실이 영성현실에 포섭되면 삶의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삶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을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엡 2:5) 이뿐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는 더 이상 진노의 자식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빛나는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비로소 사람들은 인정의 덫에서 벗어난다. 당연히 무한비교, 무한경쟁의 뫼비우스 띠에서도 해방된다. 마침내 나는 남이 아니라 “나”를 살기 시작한다. 나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다워진다. 진정한 내가 된다. 나만의 형태와 색깔과 향기가 세상을 새롭게 가꾼다.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펀치넬로 이야기
요즘 교회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관상 영성에 기반한 교재를 만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떤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 나무 사람들은 빛나는 별표가 든 상자와 잿빛 점표가 든 상자를 들고 서로에게 별표나 점표를 붙였다. 나무결이 매끄럽고 색이 잘 칠해진 나무 사람들은 별표를 받고, 나무결이 거칠고 칠이 벗겨진 나무 사람들은 점표를 받았다. 별표를 받으면 기분이 좋았고, 점표를 받으면 기분이 나빴다.
펀치넬로는 허구한 날 잿빛 점표를 받았다. 잘 하는 게 없었고, 힘도 약하고, 말도 잘 못 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점표가 누덕누덕 붙어있었다. 나무 사람들은 펀치넬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펀치넬로는 좋은 나무 사람이 아니야.” 펀치넬로는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며, 스스로 좋은 나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펀치넬로는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은 루시아를 만났다. 다른 나무 사람들이 루시아에게 별표과 점표를 붙여도 금방 떨어졌다. 펀치넬로가 어떻게 몸에 표가 없는지 묻자 루시아가 대답했다. “별 거 아니야. 난 매일 엘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 엘리 아저씨는 나무 사람을 만든 장인이었다.
펀치넬로는 잿빛 점표로 가득한 자기 몸을 보며 과연 엘리 아저씨가 자신을 환영해 줄지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갔다. 다른 나무 사람들이 붙인 잿빛 점표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자 엘리 아저씨는 펀치넬로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펀치넬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너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단다. 난 네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
“루시아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남들이 붙이는 별표도 점표도 떨어진단다.”
“그 표는 네가 붙어 있게 하기 때문에 붙는 거란다. 네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만 붙는 거야.”
“다른 나무 사람들이 붙이는 점표나 별표와 상관 없이 너는 이미 별이란다!”
우리에게도 엘리 아저씨의 확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관상수련(예수기도, 향심기도)이란 펀치넬로가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갔듯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교와 평가와 경쟁으로 분노하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이미 특별한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닫는다.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드신!
관상수련이란 펀치넬로가 용기를 내어 엘리 아저씨를 찾아갔듯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교와 평가와 경쟁으로 분노하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이미 특별한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닫는다.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드신!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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