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세례, 부활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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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60회 작성일 23-05-02 11:42본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롬 6:8)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욥 14:7-9)
세례는 부활의 꽃이다. 세례를 기억할 때 부활이 꽃처럼 피어난다. 부활이 현재화된다.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한다.
밥티자투스 숨
마르틴 루터는 자기 책상 위를 긁어 “밥티자투스 숨”(Baptizatus Sum, 나는 세례받았다!)이라는 말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사정이 어려울 때마다, 회의와 열등감에 빠져들 때마다 그는 이 문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세례받았다!” 그에게 이 말은 이런 뜻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무조건 받아들이셨다. 선입견 없이 사랑하신다. 나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만드신다. 나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내 업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
세례는 그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연약하지 않다는 사실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빌미로 상대를 옭아매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다.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회의할 때마다, 좌절할 때마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무조건 받아주셨음을 기억하면서 그는 자신을 다시 용납했고 긍정했고 신뢰했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그가 연약해질 때마다 부활의 꽃을 피웠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리스도와 함께 의심과 열등감에 대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확신과 사랑에 대해 살아났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그를 실제로, 현재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게 했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그를 실제로, 현재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게 했다.
샘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참 정체성을 일깨운다. 우리가 정작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세례는 우리가 부모의 생물학적 자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자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 우리 안에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속성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도 흐른다. 우리 안에는 몸과 혼의 에너지뿐 아니라,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이 흐른다. 생존의 투쟁에 지치고 에너지가 고갈돼도 우리는 그 샘에서 다시 힘을 길어낼 수 있다.
세례받은 우리는 이 신성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다함 없는 힘에 참여한다. 세례를 기억할 때 우리는 생의 에너지가 바닥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난다.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난다. 이처럼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연약함에서 부활시킨다.
삶의 모든 게 메마른 땅처럼 팍팍하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의 기운이 순환하지 않고, 생명의 흐름에서 단절되어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세례를 기억하라!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샘과 다시 접촉하게 해줄 것이며, 그 샘의 물꼬를 터 생명이 다시 흐르게 해줄 것이다. 생명의 물기운은 존재의 구석구석을 휘돌아 죽은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샘과 다시 접촉하게 해줄 것이며, 그 샘의 물꼬를 터 생명이 다시 흐르게 해줄 것이다. 생명의 물기운은 존재의 구석구석을 휘돌아 죽은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친교
세례받았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뜻이다. 내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따라서 세례받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뿐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과 연결되며, 사랑의 성령과도 연결된다. 성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친교에 나도 참여한다.
이러한 신성한 사랑의 연대는 성경이 “네 생물” “이십사 장로” “천군천사”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 같은 메타포로 묘사하는 신령한 존재들과의 사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지난날에 살았고, 지금도 살아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과의 연대로 발전한다. 신성한 사랑의 사귐의 넓이와 길이, 깊이와 높이는 측량할 수 없다.
이러한 신성한 사랑의 연대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세례받은 나”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실존의 외로움은 거룩한 고독으로 승화된다. 실존의 외로움이 혼자라는 견디기 힘든 고립감이라면, 거룩한 고독은 영적 사귐을 위한 자발적 홀로 있음이다. 홀로 있되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실존의 외로움은 거룩한 고독으로 승화된다. 실존의 외로움이 혼자라는 견디기 힘든 고립감이라면, 거룩한 고독은 영적 사귐을 위한 자발적 홀로 있음이다.
따라서 내가 세례받았음을 기억할 때, 나는 거룩한 고독 속에서 성 삼위 하나님과 수많은 영적 관계 속에서 다함 없는 사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삶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다. 무거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의무와 책임이 즐거울 수도 있음을 경험한다. 마침내 세례에 대한 기억은 순명할 힘을 준다.
순명과 함께 나의 운명은 혈연・지연・학연을 넘어, 가족・가문・가계를 넘어 새롭게 펼쳐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리로 성 삼위 하나님과 신령한 존재들, 과거・현재・미래의 동료 그리스도인과 연결되는 새롭고도 거룩한 운명이다. 실패와 저주가 아예 불가능한 절대 희망과 절대 긍정의 운명이다.
존엄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덧입는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구현하도록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았다. 세례받은 사람은 이 세 가지 존재 방식을 따라 자신의 인간됨을 실현한다. 세례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언자는 공동체가 온전해지도록,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께 본분을 다하도록 일하며 외친다. 예언자는 공동체가 부름받은 본래 모습을 회복하도록 도전하는 임무를 맡는다. 따라서 예언자는 공동체의 타락과 위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언자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까? 신앙이 고작 세속적인 성공과 축복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비판적 질문과 함께 예언자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의 궁극 목표로 삼는 “숨빛의 삶”도 그중 하나다. 예언자는 사회를 향해서도 묻는다. “그 일이 정의로우며 공정합니까? 권력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있습니까? ”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진 관계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손상된 관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친다.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세례받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상의 깨진 관계를 치유한다. 분열되고 상처 입고 무질서한 삶의 현실을 간파하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런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왕은 지배받지 않는다. 왕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렇기에 왕은 존엄하다. 왕은 자신의 삶을 살지, 남의 삶을 살지 않는다. 왕은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다. 세례받았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세속의 모든 비교와 평가에서 벗어난다. 비로소 자존할 힘을 얻는다. 자존할 줄 아는 자유인은 남을 탓하지 않고, 남에게 원한을 품지도 않으며, 남에게 화를 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으로써 자신의 우월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우월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렇기에 왕다운 존엄함을 갖고 다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한다.
물기운
밥티자투스 숨, 나는 세례받았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결코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음을 일깨운다. 그때 우리는 연약함과 무기력에 대해 죽고 활력과 생명에 대해 살아난다. 이 샘물 기운이 들어가면 경직되고 메마른 것들이 부드러워지고, 죽어가던 모든 것이 생기를 띠고 살아난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내가 혼자가 아니며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때 우리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대해 죽고 영적 연대에 대해 살아난다. 이 사귐이 부여하는 순명의 힘으로 주어진 운명을 즐거이 받아들이며, 삶이 부여한 의무와 책임을 즐거이 감당한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나는 예언자의 감수성으로 교회와 사회를 향해 묻기 시작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선포한다. 제사장의 감수성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깨지고 상한 인간의 현실에 들여온다. 자유와 존엄이라는 왕의 감수성으로 남이 시키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존엄한 만큼 남의 존엄도 존중한다. 불의와 분열, 예속에 대해 죽고, 정의와 화해, 자유와 존엄에 대해 힘차게 살아난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운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내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다시 살린다. 하여 세례에 대한 기억은 황폐한 삶의 대지에서 부활의 꽃을 피운다.
욥은 친구들의 비정한 고발이 빗발치는 한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한다.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 비록 그 뿌리가 땅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욥 14:7-9)
세례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황폐한 삶의 현실에서 부활의 꽃이 피어나게 하는 신령한 “물기운”이다.
- 이민재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롬 6:8)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욥 14:7-9)
세례는 부활의 꽃이다. 세례를 기억할 때 부활이 꽃처럼 피어난다. 부활이 현재화된다.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한다.
밥티자투스 숨
마르틴 루터는 자기 책상 위를 긁어 “밥티자투스 숨”(Baptizatus Sum, 나는 세례받았다!)이라는 말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사정이 어려울 때마다, 회의와 열등감에 빠져들 때마다 그는 이 문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세례받았다!” 그에게 이 말은 이런 뜻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무조건 받아들이셨다. 선입견 없이 사랑하신다. 나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만드신다. 나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내 업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
세례는 그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연약하지 않다는 사실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빌미로 상대를 옭아매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다.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회의할 때마다, 좌절할 때마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무조건 받아주셨음을 기억하면서 그는 자신을 다시 용납했고 긍정했고 신뢰했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그가 연약해질 때마다 부활의 꽃을 피웠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리스도와 함께 의심과 열등감에 대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확신과 사랑에 대해 살아났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그를 실제로, 현재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게 했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그를 실제로, 현재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게 했다.
샘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참 정체성을 일깨운다. 우리가 정작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세례는 우리가 부모의 생물학적 자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자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 우리 안에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속성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도 흐른다. 우리 안에는 몸과 혼의 에너지뿐 아니라,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이 흐른다. 생존의 투쟁에 지치고 에너지가 고갈돼도 우리는 그 샘에서 다시 힘을 길어낼 수 있다.
세례받은 우리는 이 신성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다함 없는 힘에 참여한다. 세례를 기억할 때 우리는 생의 에너지가 바닥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난다.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난다. 이처럼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연약함에서 부활시킨다.
삶의 모든 게 메마른 땅처럼 팍팍하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의 기운이 순환하지 않고, 생명의 흐름에서 단절되어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세례를 기억하라!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샘과 다시 접촉하게 해줄 것이며, 그 샘의 물꼬를 터 생명이 다시 흐르게 해줄 것이다. 생명의 물기운은 존재의 구석구석을 휘돌아 죽은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샘과 다시 접촉하게 해줄 것이며, 그 샘의 물꼬를 터 생명이 다시 흐르게 해줄 것이다. 생명의 물기운은 존재의 구석구석을 휘돌아 죽은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친교
세례받았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뜻이다. 내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따라서 세례받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뿐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과 연결되며, 사랑의 성령과도 연결된다. 성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친교에 나도 참여한다.
이러한 신성한 사랑의 연대는 성경이 “네 생물” “이십사 장로” “천군천사”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 같은 메타포로 묘사하는 신령한 존재들과의 사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지난날에 살았고, 지금도 살아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과의 연대로 발전한다. 신성한 사랑의 사귐의 넓이와 길이, 깊이와 높이는 측량할 수 없다.
이러한 신성한 사랑의 연대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세례받은 나”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실존의 외로움은 거룩한 고독으로 승화된다. 실존의 외로움이 혼자라는 견디기 힘든 고립감이라면, 거룩한 고독은 영적 사귐을 위한 자발적 홀로 있음이다. 홀로 있되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실존의 외로움은 거룩한 고독으로 승화된다. 실존의 외로움이 혼자라는 견디기 힘든 고립감이라면, 거룩한 고독은 영적 사귐을 위한 자발적 홀로 있음이다.
따라서 내가 세례받았음을 기억할 때, 나는 거룩한 고독 속에서 성 삼위 하나님과 수많은 영적 관계 속에서 다함 없는 사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삶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다. 무거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의무와 책임이 즐거울 수도 있음을 경험한다. 마침내 세례에 대한 기억은 순명할 힘을 준다.
순명과 함께 나의 운명은 혈연・지연・학연을 넘어, 가족・가문・가계를 넘어 새롭게 펼쳐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리로 성 삼위 하나님과 신령한 존재들, 과거・현재・미래의 동료 그리스도인과 연결되는 새롭고도 거룩한 운명이다. 실패와 저주가 아예 불가능한 절대 희망과 절대 긍정의 운명이다.
존엄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덧입는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구현하도록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았다. 세례받은 사람은 이 세 가지 존재 방식을 따라 자신의 인간됨을 실현한다. 세례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언자는 공동체가 온전해지도록,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께 본분을 다하도록 일하며 외친다. 예언자는 공동체가 부름받은 본래 모습을 회복하도록 도전하는 임무를 맡는다. 따라서 예언자는 공동체의 타락과 위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언자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까? 신앙이 고작 세속적인 성공과 축복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비판적 질문과 함께 예언자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의 궁극 목표로 삼는 “숨빛의 삶”도 그중 하나다. 예언자는 사회를 향해서도 묻는다. “그 일이 정의로우며 공정합니까? 권력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있습니까? ”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진 관계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손상된 관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친다.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세례받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상의 깨진 관계를 치유한다. 분열되고 상처 입고 무질서한 삶의 현실을 간파하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런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왕은 지배받지 않는다. 왕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렇기에 왕은 존엄하다. 왕은 자신의 삶을 살지, 남의 삶을 살지 않는다. 왕은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다. 세례받았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세속의 모든 비교와 평가에서 벗어난다. 비로소 자존할 힘을 얻는다. 자존할 줄 아는 자유인은 남을 탓하지 않고, 남에게 원한을 품지도 않으며, 남에게 화를 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으로써 자신의 우월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우월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렇기에 왕다운 존엄함을 갖고 다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한다.
물기운
밥티자투스 숨, 나는 세례받았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결코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음을 일깨운다. 그때 우리는 연약함과 무기력에 대해 죽고 활력과 생명에 대해 살아난다. 이 샘물 기운이 들어가면 경직되고 메마른 것들이 부드러워지고, 죽어가던 모든 것이 생기를 띠고 살아난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내가 혼자가 아니며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때 우리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대해 죽고 영적 연대에 대해 살아난다. 이 사귐이 부여하는 순명의 힘으로 주어진 운명을 즐거이 받아들이며, 삶이 부여한 의무와 책임을 즐거이 감당한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나는 예언자의 감수성으로 교회와 사회를 향해 묻기 시작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선포한다. 제사장의 감수성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깨지고 상한 인간의 현실에 들여온다. 자유와 존엄이라는 왕의 감수성으로 남이 시키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존엄한 만큼 남의 존엄도 존중한다. 불의와 분열, 예속에 대해 죽고, 정의와 화해, 자유와 존엄에 대해 힘차게 살아난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운다. 세례에 대한 기억은 내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다시 살린다. 하여 세례에 대한 기억은 황폐한 삶의 대지에서 부활의 꽃을 피운다.
욥은 친구들의 비정한 고발이 빗발치는 한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한다.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 비록 그 뿌리가 땅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욥 14:7-9)
세례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황폐한 삶의 현실에서 부활의 꽃이 피어나게 하는 신령한 “물기운”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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