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안식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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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18회 작성일 23-03-22 21:54본문
엿새 동안 우리는 세상과 싸우고, 땅으로부터 이득을 짜낸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영혼에 심어진 영원의 욕구를 특별히 돌본다, 세상은 우리의 손을 소유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다른 분께 속해 있다.
- 안식 中에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
오래 전 이미 ‘과로사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세간에 큰 관심을 받았고, ‘과로사화’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선거의 구호문구가 ‘저녁이 있는 삶’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면서 쉼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지구촌이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은 많은 것들을 멈추어 서게 하였습니다. 많은 일터에서 재택근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고,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고, 관중들이 모이는 운동장과 영화관도 한산해 지고, 백화점, 쇼핑센터들은 일찍 문을 닫아야 합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에 비하여 멈추어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 늘어났습니다. 코로나 이전처럼 휴일 여가를 지낼 수 있는 선택지들도 줄고, 상대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과 집에 머무는 시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주어진 멈춤의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당황스러워 합니다. 행위를 통해 자신을 입증하고, 인정을 받으며 살아 온 삶에 너무 익숙한 탓인지 멈춤의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묻습니다. 몇 년 전 한 교우로부터 회사 직원워크숍에서 ‘쉼’을 주제로 프로그램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휴일 날 여행이나 게임 등으로 여가생활을 하는데 정작 쉬고 난 후에 피곤과 공허감으로 ‘어떻게 쉬어야 할지’ 배우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서와 안식
성서가 말하는 안식(Sabbath)은 인간이 육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창조 후에 안식하신 하느님을 경배하며, 창조의 본래 형상과 질서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안식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모든 생산 활동을 중단(출에 31:15)하고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단지 신체적 쉼을 넘어 우리의 생명이 우리 노동의 생산물보다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위한 쉼입니다.(출에 16:7-30) 그 쉼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하느님께 바쳐지고, 공동체와 땅은 힘과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둘째는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입니다.(출에 20:8-10) 안식일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에 주어진 선물로서 사람은 물론 짐승도, 땅도 쉬었으며, 희년(禧年)에는 부채와 속박으로 묶여있던 사람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땅의 진정한 주인이며, 사람들은 청지기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며(레위 25:35) 이같은 전통은 구약의 예언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부터 예언자들은 안식일 준수를 기쁨으로, 정의의 법의 일부로, 그리고 언약에 대한 헌신의 표지로 강조하였습니다. 셋째로, 안식은 계약의 표징(출에 31:13. 17)으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날이며,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날입니다.(호세 2:11) '마지막으로 안식은 희망의 표징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간 이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이 하느님의 계약이 성취가 아님을 명확히 하였고, 예언자들은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안식은 예수의 빛 아래서 재조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은 안식(마태 11:28-30)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하는 안식일의 본뜻은 점차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이 또 다른 종류의 일이나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식일 사역을 비난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베풀면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 하나를 온전히 고쳐주었다고 하여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요한 7:23)고 하시며 ‘나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하시며, 안식일에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치유를 통해 예언전통으로 이어져 온 해방을 향한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그것을 ‘사랑하라’(요한 13:34)는 명령으로 강화하셨으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날(마르 2:27)이라고 확언하였습니다.
루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루가 4:16) 안식(희년)을 선포하였고,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 무덤으로 모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안식일로 접어들 때’(루가 23:53-54)라고 말하며 안식을 예수님 사역의 출발과 완성으로 증언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포괄하는데, 거기에는 용서, 말씀의 완성, 치유와 기적, 식탁의 교제가 모두 녹아져 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안식일(安息日)과 주의 날(主日)
초기의 교회는 구약의 안식일 전통과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념해 오다가 2세기에 들어 제 8일(주일)을 안식일의 완성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21년 로마제국이 일요일을 휴일로 선포한 이후 안식일과 주일이 통합되었고, 초기 교부들은 주님의 날을 휴식보다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권면하였는데, 신자들은 예배에 참여하여 성찬을 나누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행하였습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신약을 근거로 제 4계명(안식일 준수)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다른 날에 비해 우월한 특정한 날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단지 하루가 아니라 매일 드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칼빈 John Calvin은 주관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우려로 성서를 중심에 두었고, 4계명을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며 주일을 휴식, 예배, 종교적 행위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영국의 전통은 좀 더 나아갔는데 유대교 전통의 안식일처럼 안식일의 신성한 기원을 인정하였는데, 이같은 경향은 이후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국으로 전해졌습니다. 청교도들에게 안식일은 부활과 창조의 하느님, 그리고 하늘나라의 표징을 기념하는 날이었기에 청교도들의 ‘주의 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주일 저녁까지 지켜졌습니다.
미국 청교도들의 이같은 안식일 이해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 큰 한국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청교도들의 안식일 이해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안식일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휴식의 시간이 주어져 한다는 점, 둘째는 이웃을 향한 상호적인 관심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으로 강조한다는 점, 셋째는 교회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성서의 최종적 권위를 강조하였다는 점입니다. 반면 청교도들의 안식일 이해에서 아쉬운 점들은 첫째, 다양한 인간의 상황과 성령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간과할 수 있는 율법적 경향이 강하다는 점, 둘째, 인간 이성과 엄격함 그리고 도덕적 측면에 치중하여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차원 - 기도, 심미적, 신비적 차원을 간과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에 대한 청교도의 엄격하고 편협한 해석은 주일날에는 온갖 종류의 오락을 금지하고, 심지어 산책조차도 금지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이나 정교회와 같이 주일을 단식보다는 하느님의 선물과 전인적(몸과 마음과 영혼) 구원사역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축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주일을 예배와 연결하지만 동시에 믿음의 넓은 영역과도 연결 짓습니다. 안식일에는 개인의 종교적 실천과 선행,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권장하였고, 놀이에 대한 엄격한 억압은 하느님의 피조세계를 즐거워하고, 재충전하는 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놀이는 일반적으로 오후로 제한되었고 잔인한 스포츠는 금지되었습니다.
회복과 해방의 안식
하느님께서 지으신 우주에는 수많은 리듬들이 있으며, 창조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수의 간만, 근육의 수축과 이완, 낮과 밤, 건강과 질병, 분석과 직관, 남성과 여성... 이 리듬들은 우리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이것은 관습 속에 간직되어 왔으며, 대개는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떤 서구의 행동과학자 그룹은 이 리듬의 경영을 보조하는 것이 종교의 주된 사회적 임무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일 종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종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사회 전체가 좀 더 많은 분열과 질병, 환각, 부정으로 고통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전통적 리듬이 지니고 있던 관습의 힘이나 무의식적인 지혜가 사라지거나 약화된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경고를 현실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미국의 청교도적 금법들이 점진적으로 소멸되면서 안식일에 대한 편협하고 엄격한 문화도 사라졌지만 그와 더불어 삶의 기본적인 리듬을 지탱하던 것들도 대중적인 의식으로부터 사라졌다고 지적합니다, 이같은 변화는 안식일과 주의 날(주일)이라는 거룩한 시간에 대한 의식도 함께 사라지게 하였고, 이제 주의 날은 점점 더 여가활동으로 공허감을 메우는 휴일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현대인들이 안식일이 의미하는 ‘거룩한 시간의 지도’를 무시함으로써 심오한 인간적 진리를 놓치고 있는데 그것은 '성소聖所-시간의 대성당'에 대한 필요까지 잃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일에 대한 과도한 목표들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재충전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다이어리의 빈 공간들을 보면서 스스로 게으르거나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갈 수 있음에 불안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은 좀 더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쉬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을 운반하기 위한 동물이 아닙니다. 몸이 적절히 기능하기 위해 정기적인 휴식을 필요로 하듯 영혼도 하느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한 정기적인 쉼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가끔 활동을 멈추고 하느님과 조용한 일치의 시간을 가지며, 창조의 원형적인 모습을 회복할 필요가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절정이며, 다가 올 세계의 본보기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강요된 ‘멈춤’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이 멈춤의 시간을 당분간 보내야만 한다면, 남는 것은 우리가 이 멈춤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도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선물을 그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안식과 회복 그리고 하느님과의 연합에서 주어지는 선물의 빛과 그 선물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건강과 내적인 기쁨의 중심축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시간과 긴급함의 압제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날입니다. 안식安息의 실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관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주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 안식 中에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
오래 전 이미 ‘과로사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세간에 큰 관심을 받았고, ‘과로사화’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선거의 구호문구가 ‘저녁이 있는 삶’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면서 쉼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지구촌이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은 많은 것들을 멈추어 서게 하였습니다. 많은 일터에서 재택근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고,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고, 관중들이 모이는 운동장과 영화관도 한산해 지고, 백화점, 쇼핑센터들은 일찍 문을 닫아야 합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에 비하여 멈추어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 늘어났습니다. 코로나 이전처럼 휴일 여가를 지낼 수 있는 선택지들도 줄고, 상대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과 집에 머무는 시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주어진 멈춤의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당황스러워 합니다. 행위를 통해 자신을 입증하고, 인정을 받으며 살아 온 삶에 너무 익숙한 탓인지 멈춤의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묻습니다. 몇 년 전 한 교우로부터 회사 직원워크숍에서 ‘쉼’을 주제로 프로그램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휴일 날 여행이나 게임 등으로 여가생활을 하는데 정작 쉬고 난 후에 피곤과 공허감으로 ‘어떻게 쉬어야 할지’ 배우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서와 안식
성서가 말하는 안식(Sabbath)은 인간이 육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창조 후에 안식하신 하느님을 경배하며, 창조의 본래 형상과 질서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안식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모든 생산 활동을 중단(출에 31:15)하고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단지 신체적 쉼을 넘어 우리의 생명이 우리 노동의 생산물보다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위한 쉼입니다.(출에 16:7-30) 그 쉼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하느님께 바쳐지고, 공동체와 땅은 힘과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둘째는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입니다.(출에 20:8-10) 안식일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에 주어진 선물로서 사람은 물론 짐승도, 땅도 쉬었으며, 희년(禧年)에는 부채와 속박으로 묶여있던 사람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땅의 진정한 주인이며, 사람들은 청지기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며(레위 25:35) 이같은 전통은 구약의 예언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부터 예언자들은 안식일 준수를 기쁨으로, 정의의 법의 일부로, 그리고 언약에 대한 헌신의 표지로 강조하였습니다. 셋째로, 안식은 계약의 표징(출에 31:13. 17)으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날이며,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날입니다.(호세 2:11) '마지막으로 안식은 희망의 표징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간 이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이 하느님의 계약이 성취가 아님을 명확히 하였고, 예언자들은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안식은 예수의 빛 아래서 재조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은 안식(마태 11:28-30)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하는 안식일의 본뜻은 점차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이 또 다른 종류의 일이나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식일 사역을 비난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베풀면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 하나를 온전히 고쳐주었다고 하여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요한 7:23)고 하시며 ‘나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하시며, 안식일에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치유를 통해 예언전통으로 이어져 온 해방을 향한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그것을 ‘사랑하라’(요한 13:34)는 명령으로 강화하셨으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날(마르 2:27)이라고 확언하였습니다.
루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루가 4:16) 안식(희년)을 선포하였고,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 무덤으로 모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안식일로 접어들 때’(루가 23:53-54)라고 말하며 안식을 예수님 사역의 출발과 완성으로 증언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포괄하는데, 거기에는 용서, 말씀의 완성, 치유와 기적, 식탁의 교제가 모두 녹아져 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안식일(安息日)과 주의 날(主日)
초기의 교회는 구약의 안식일 전통과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념해 오다가 2세기에 들어 제 8일(주일)을 안식일의 완성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21년 로마제국이 일요일을 휴일로 선포한 이후 안식일과 주일이 통합되었고, 초기 교부들은 주님의 날을 휴식보다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권면하였는데, 신자들은 예배에 참여하여 성찬을 나누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행하였습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신약을 근거로 제 4계명(안식일 준수)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다른 날에 비해 우월한 특정한 날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단지 하루가 아니라 매일 드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칼빈 John Calvin은 주관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우려로 성서를 중심에 두었고, 4계명을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며 주일을 휴식, 예배, 종교적 행위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영국의 전통은 좀 더 나아갔는데 유대교 전통의 안식일처럼 안식일의 신성한 기원을 인정하였는데, 이같은 경향은 이후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국으로 전해졌습니다. 청교도들에게 안식일은 부활과 창조의 하느님, 그리고 하늘나라의 표징을 기념하는 날이었기에 청교도들의 ‘주의 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주일 저녁까지 지켜졌습니다.
미국 청교도들의 이같은 안식일 이해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 큰 한국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청교도들의 안식일 이해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안식일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휴식의 시간이 주어져 한다는 점, 둘째는 이웃을 향한 상호적인 관심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으로 강조한다는 점, 셋째는 교회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성서의 최종적 권위를 강조하였다는 점입니다. 반면 청교도들의 안식일 이해에서 아쉬운 점들은 첫째, 다양한 인간의 상황과 성령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간과할 수 있는 율법적 경향이 강하다는 점, 둘째, 인간 이성과 엄격함 그리고 도덕적 측면에 치중하여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차원 - 기도, 심미적, 신비적 차원을 간과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에 대한 청교도의 엄격하고 편협한 해석은 주일날에는 온갖 종류의 오락을 금지하고, 심지어 산책조차도 금지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이나 정교회와 같이 주일을 단식보다는 하느님의 선물과 전인적(몸과 마음과 영혼) 구원사역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축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주일을 예배와 연결하지만 동시에 믿음의 넓은 영역과도 연결 짓습니다. 안식일에는 개인의 종교적 실천과 선행,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권장하였고, 놀이에 대한 엄격한 억압은 하느님의 피조세계를 즐거워하고, 재충전하는 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놀이는 일반적으로 오후로 제한되었고 잔인한 스포츠는 금지되었습니다.
회복과 해방의 안식
하느님께서 지으신 우주에는 수많은 리듬들이 있으며, 창조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수의 간만, 근육의 수축과 이완, 낮과 밤, 건강과 질병, 분석과 직관, 남성과 여성... 이 리듬들은 우리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이것은 관습 속에 간직되어 왔으며, 대개는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떤 서구의 행동과학자 그룹은 이 리듬의 경영을 보조하는 것이 종교의 주된 사회적 임무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일 종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종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사회 전체가 좀 더 많은 분열과 질병, 환각, 부정으로 고통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전통적 리듬이 지니고 있던 관습의 힘이나 무의식적인 지혜가 사라지거나 약화된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경고를 현실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미국의 청교도적 금법들이 점진적으로 소멸되면서 안식일에 대한 편협하고 엄격한 문화도 사라졌지만 그와 더불어 삶의 기본적인 리듬을 지탱하던 것들도 대중적인 의식으로부터 사라졌다고 지적합니다, 이같은 변화는 안식일과 주의 날(주일)이라는 거룩한 시간에 대한 의식도 함께 사라지게 하였고, 이제 주의 날은 점점 더 여가활동으로 공허감을 메우는 휴일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현대인들이 안식일이 의미하는 ‘거룩한 시간의 지도’를 무시함으로써 심오한 인간적 진리를 놓치고 있는데 그것은 '성소聖所-시간의 대성당'에 대한 필요까지 잃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일에 대한 과도한 목표들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재충전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다이어리의 빈 공간들을 보면서 스스로 게으르거나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갈 수 있음에 불안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은 좀 더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쉬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을 운반하기 위한 동물이 아닙니다. 몸이 적절히 기능하기 위해 정기적인 휴식을 필요로 하듯 영혼도 하느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한 정기적인 쉼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가끔 활동을 멈추고 하느님과 조용한 일치의 시간을 가지며, 창조의 원형적인 모습을 회복할 필요가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절정이며, 다가 올 세계의 본보기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강요된 ‘멈춤’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이 멈춤의 시간을 당분간 보내야만 한다면, 남는 것은 우리가 이 멈춤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도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선물을 그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안식과 회복 그리고 하느님과의 연합에서 주어지는 선물의 빛과 그 선물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건강과 내적인 기쁨의 중심축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시간과 긴급함의 압제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날입니다. 안식安息의 실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관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주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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