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영성형성과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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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77회 작성일 23-03-22 21:40본문
수도원 전통이 미약한 개신교에서 영성생활 규칙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조명되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북미와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수도운동(New Monasticis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구 복음주의권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수도운동은 20세기 교회와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제자훈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자훈련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주된 내용은 그동안 제자훈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경험이 부재한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현대 서구사회의 선교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보다,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반성을 토대로 대안을 모색하던 그들은 교회사 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완덕(完德)을 화두로 씨름을 하여온 수도전통과 완덕을 향한 수행(修行) 여정에서 기본이 되는 ‘수도규칙 修道規則’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습관이 영성이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자신의 책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그동안의 제자훈련이 지녔던 지성주의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제자가 되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수행과 습관의 힘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자도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은 사고와 의식적 숙고의 영향력을 무비판적으로 과대평가하여, 반복되는 수행에 의해 형성되는 습관의 힘과 잠재/무의식의 차원을 간과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주장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라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구호에 익숙한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낯설고,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한 사람의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깊어지고 성장하는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의 과정은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인간이 순종적 의지로 응답하며 하느님과 함께 추는 춤에 비유되곤 합니다. 샬렘영성훈련원(Shalem Institute for Spiritual Formation)의 스텝들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지는 영성형성의 과정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올바른 역할이란 “첫째,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 진리, 아름다움과 선함을 갈망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능한 한 성령님의 역사와 초대에 반응하며 하느님과 함께 삶을 창조하려고 의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책의 저자 스미스가 제자화의 여정에서 ‘습관의 힘’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영성형성 과정에서 하느님의 주도성과 성령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제자가 되는 과정이 ‘아는 것’과 ‘믿는 것’ 그 이상이라는 점과 의도된 반복적 수행을 통해 형성된 습관은 영성형성 과정에서 우리들이 성령의 초대와 인도하심에 더욱 열린 태도로 응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향해 더 자주, 더 많이 열려 있을 수 있는 만큼 우리를 빚어 가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은 더 확장됩니다.
그는 ‘덕(德)의 형성’이란 음악이론을 배우는 것보다는, 손가락으로 음계를 익히는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습득의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자신의 존재 자체에 새겨 넣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같은 ‘덕(德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적응 무의식’에 대하여 말합니다. 버지니아 대학의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Timothy D. Wilson은 우리가 하는 일의 약 5%만이 우리의 의식적, 의도적 선택의 결과이며, 나머지 95%는 그동안의 반복을 통하여 습득되었지만, 이제는 온갖 무의식적 방식으로 우리 의식의 수면 아래서 관리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처음 운전을 배우는 동안에는 온갖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운전을 해야 하지만, 이후에는 반복적인 운전을 통해 습득된 습관을 통해 의식의 수면 아래로 위임된 기능들에 의지하며,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운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의도를 지니고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습관화된 수행은 시간이 흐르면, 어느덧 우리 의식의 수면 아래서, 우리 일상의 삶과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덕(德)을 우리의 몸에 새겨 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세속적 가치와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속적 가치와 문화에 기반한 선택과 행동들을 반복하며 맘몬과 시장의 습관들이 우리 무의식에 새겨 놓는 영향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같은 일상의 습관들이 만든 영향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과 괴리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의도를 지닌 반복적인 수행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는 것’과 ‘믿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스미스는 그것을 ‘습관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수도전통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여 왔고, 그 기초에는 ‘수도규칙’이라는 ‘지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규칙(rule)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규칙을 뜻하는 Canon은, measure 무엇을 이루거나 도달하기 위한 행동, 판단의 기준, 박자가 맞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규칙을 뜻하는 Regular는 규칙, 유형, 모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규칙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자주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연상하게 되고, 실재로 규칙은 우리를 그런 위험에 빠지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해진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실패와 좌절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기준을 삶의 전영역이 아니라 단지 실패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는 편협한 오류에 빠지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규칙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촘촘하고 질서정연하게, 어떤 사람은 느슨하고 여유 있게, 어떤 사람은 자유로운 리듬으로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규칙이란 그것 없이는 삶이 혼돈스럽고, 방향을 상실하게 되는 라틴어 Regular의 한 가지 의미인 패턴 Pattern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패턴 Pattern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것이고, 비록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패턴의 Pattern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규칙을 그렇게 이해할 경우, 규칙은 우리 삶에서 작곡의 기초가 되는 음악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규칙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적 요소이며 우리는 그것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전통에서 규칙은 예수님의 삶과 삶의 방식(패턴 Pattern)을 사랑하고, 그것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개인의 수련과 자유로운 성령과 은총에 이끌리는 삶을 위한 것이지 법이나 징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총 속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규칙 안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규칙은 ‘어떻게 우리의 영성생활이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깊어지고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하느님과 더욱 가깝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도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베네딕도와 인간형성의 규칙
베네딕도 St. Benedictus가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의 ‘규칙서’ 때문이었습니다. 베네딕도는 자신이 쓴 규칙서를 통해서 서방 수도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초기 수도전통에는 희랍, 로마철학 사상의 영향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반발하며, 이를 극복하고 인격적 조건을 높이려는 흐름과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겸손히 인정하고 이것을 인격적 조건의 질서에 유입시킴으로써 완덕에 이르려는 흐름이 함께 있었습니다. 초기 이집트의 은수자들은 첫 번째 흐름에 상당부분 경도되어 있었던 반면, 베네딕도의 규칙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인격적 조건이 올바르게 조화를 이루며, 이를 기초로 완덕에 이르도록 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베네딕도 규칙서의 탁월함으로 많은 서방 수도회들이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따르게 되었고, 베네딕도는 자신의 규칙서를 통해 서방 수도전통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베네딕도는 무엇보다 자신의 규칙서에서 수도승의 하루를 노동과 독서와 기도로 짜 놓았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사람이 몸(body)과 마음(mind)과 영혼(soul)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수도승은 정해진 시간동안 노동을 하고 난 후에는 성독(聖讀 Lectio Divina)을 하도록 하여, 수도승의 하루가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육(肉)의 양식을 먹는 식사시간에는 ‘독서’를 통하여 영(靈)의 양식도 함께 취하도록 하였는데 베네딕도 전통에서 식사 중에 식사를 하고 있는 수도승들을 위해 성서를 읽는 독서는 중요하고 경건한 임무였습니다. 수도승들은 노동을 할 때에도 독서(렉시오 디비나)에서 받은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도록 하여 노동과 기도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책, 특히 성서독서를 통해 육체와 정신, 노동과 관상을 하나로 엮는 중개자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는 생물학적 조건과 인격적 조건의 상호침투에 의해 인간 완성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수도승들이 끊임없이 하느님 임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여 베네딕도는 이 독서를 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聖讀)라고 하였습니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에게 아무것도 '성무일과 Daily Office'보다 중요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성무일과를 가리켜 '하느님의 일 Opus Dei'이라고 하였는데, 성무일과 역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자연 현상에 따라 짜여 졌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 바쳐지는 성무일과는 인간의 생리적 리듬과 시간의 조화, 노동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몸의 피로와 권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조화로운 통합을 위하여 배열되어 있습니다. 성무일과 다음으로 규칙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덕은 '겸손(謙遜)'인데 이 덕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인식하고 수락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자연 안에서 자기가 점유하는 위치와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는 사람은 겸손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베네딕도는 겸손함으로 규칙을 존중하며 수도승 개인이 완덕에 이르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정에 기초를 두고 자신의 규칙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베네딕트의 전통은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삶을 회복하여야 할 오늘 날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습관이 영성이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자신의 책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그동안의 제자훈련이 지녔던 지성주의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제자가 되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수행과 습관의 힘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자도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은 사고와 의식적 숙고의 영향력을 무비판적으로 과대평가하여, 반복되는 수행에 의해 형성되는 습관의 힘과 잠재/무의식의 차원을 간과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주장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라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구호에 익숙한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낯설고,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한 사람의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깊어지고 성장하는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의 과정은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인간이 순종적 의지로 응답하며 하느님과 함께 추는 춤에 비유되곤 합니다. 샬렘영성훈련원(Shalem Institute for Spiritual Formation)의 스텝들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지는 영성형성의 과정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올바른 역할이란 “첫째,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 진리, 아름다움과 선함을 갈망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능한 한 성령님의 역사와 초대에 반응하며 하느님과 함께 삶을 창조하려고 의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책의 저자 스미스가 제자화의 여정에서 ‘습관의 힘’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영성형성 과정에서 하느님의 주도성과 성령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제자가 되는 과정이 ‘아는 것’과 ‘믿는 것’ 그 이상이라는 점과 의도된 반복적 수행을 통해 형성된 습관은 영성형성 과정에서 우리들이 성령의 초대와 인도하심에 더욱 열린 태도로 응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향해 더 자주, 더 많이 열려 있을 수 있는 만큼 우리를 빚어 가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은 더 확장됩니다.
그는 ‘덕(德)의 형성’이란 음악이론을 배우는 것보다는, 손가락으로 음계를 익히는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습득의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자신의 존재 자체에 새겨 넣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같은 ‘덕(德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적응 무의식’에 대하여 말합니다. 버지니아 대학의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Timothy D. Wilson은 우리가 하는 일의 약 5%만이 우리의 의식적, 의도적 선택의 결과이며, 나머지 95%는 그동안의 반복을 통하여 습득되었지만, 이제는 온갖 무의식적 방식으로 우리 의식의 수면 아래서 관리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처음 운전을 배우는 동안에는 온갖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운전을 해야 하지만, 이후에는 반복적인 운전을 통해 습득된 습관을 통해 의식의 수면 아래로 위임된 기능들에 의지하며,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운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의도를 지니고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습관화된 수행은 시간이 흐르면, 어느덧 우리 의식의 수면 아래서, 우리 일상의 삶과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덕(德)을 우리의 몸에 새겨 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세속적 가치와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속적 가치와 문화에 기반한 선택과 행동들을 반복하며 맘몬과 시장의 습관들이 우리 무의식에 새겨 놓는 영향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같은 일상의 습관들이 만든 영향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과 괴리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의도를 지닌 반복적인 수행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는 것’과 ‘믿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스미스는 그것을 ‘습관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수도전통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여 왔고, 그 기초에는 ‘수도규칙’이라는 ‘지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규칙(rule)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규칙을 뜻하는 Canon은, measure 무엇을 이루거나 도달하기 위한 행동, 판단의 기준, 박자가 맞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규칙을 뜻하는 Regular는 규칙, 유형, 모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규칙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자주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연상하게 되고, 실재로 규칙은 우리를 그런 위험에 빠지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해진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실패와 좌절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기준을 삶의 전영역이 아니라 단지 실패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는 편협한 오류에 빠지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규칙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촘촘하고 질서정연하게, 어떤 사람은 느슨하고 여유 있게, 어떤 사람은 자유로운 리듬으로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규칙이란 그것 없이는 삶이 혼돈스럽고, 방향을 상실하게 되는 라틴어 Regular의 한 가지 의미인 패턴 Pattern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패턴 Pattern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것이고, 비록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패턴의 Pattern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규칙을 그렇게 이해할 경우, 규칙은 우리 삶에서 작곡의 기초가 되는 음악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규칙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적 요소이며 우리는 그것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전통에서 규칙은 예수님의 삶과 삶의 방식(패턴 Pattern)을 사랑하고, 그것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개인의 수련과 자유로운 성령과 은총에 이끌리는 삶을 위한 것이지 법이나 징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총 속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규칙 안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규칙은 ‘어떻게 우리의 영성생활이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깊어지고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하느님과 더욱 가깝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도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베네딕도와 인간형성의 규칙
베네딕도 St. Benedictus가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의 ‘규칙서’ 때문이었습니다. 베네딕도는 자신이 쓴 규칙서를 통해서 서방 수도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초기 수도전통에는 희랍, 로마철학 사상의 영향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반발하며, 이를 극복하고 인격적 조건을 높이려는 흐름과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겸손히 인정하고 이것을 인격적 조건의 질서에 유입시킴으로써 완덕에 이르려는 흐름이 함께 있었습니다. 초기 이집트의 은수자들은 첫 번째 흐름에 상당부분 경도되어 있었던 반면, 베네딕도의 규칙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인격적 조건이 올바르게 조화를 이루며, 이를 기초로 완덕에 이르도록 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베네딕도 규칙서의 탁월함으로 많은 서방 수도회들이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따르게 되었고, 베네딕도는 자신의 규칙서를 통해 서방 수도전통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베네딕도는 무엇보다 자신의 규칙서에서 수도승의 하루를 노동과 독서와 기도로 짜 놓았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사람이 몸(body)과 마음(mind)과 영혼(soul)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수도승은 정해진 시간동안 노동을 하고 난 후에는 성독(聖讀 Lectio Divina)을 하도록 하여, 수도승의 하루가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육(肉)의 양식을 먹는 식사시간에는 ‘독서’를 통하여 영(靈)의 양식도 함께 취하도록 하였는데 베네딕도 전통에서 식사 중에 식사를 하고 있는 수도승들을 위해 성서를 읽는 독서는 중요하고 경건한 임무였습니다. 수도승들은 노동을 할 때에도 독서(렉시오 디비나)에서 받은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도록 하여 노동과 기도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책, 특히 성서독서를 통해 육체와 정신, 노동과 관상을 하나로 엮는 중개자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는 생물학적 조건과 인격적 조건의 상호침투에 의해 인간 완성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수도승들이 끊임없이 하느님 임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여 베네딕도는 이 독서를 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聖讀)라고 하였습니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에게 아무것도 '성무일과 Daily Office'보다 중요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성무일과를 가리켜 '하느님의 일 Opus Dei'이라고 하였는데, 성무일과 역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자연 현상에 따라 짜여 졌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 바쳐지는 성무일과는 인간의 생리적 리듬과 시간의 조화, 노동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몸의 피로와 권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조화로운 통합을 위하여 배열되어 있습니다. 성무일과 다음으로 규칙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덕은 '겸손(謙遜)'인데 이 덕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인식하고 수락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자연 안에서 자기가 점유하는 위치와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는 사람은 겸손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베네딕도는 겸손함으로 규칙을 존중하며 수도승 개인이 완덕에 이르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정에 기초를 두고 자신의 규칙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베네딕트의 전통은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삶을 회복하여야 할 오늘 날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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