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부드러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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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75회 작성일 23-03-14 14:44본문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에스겔 36장 26절)
한때 “홀리 보이스”(거룩한 목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탁하고 가라앉고 거칠고 쉰 목소리를 사람들은 홀리 보이스라고 했다. 홀리 보이스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증거였으며 신령하고 영통하다는 표지였다. 목사들 중에서도 부흥사들의 목소리가 대개 그랬다.
홀리 보이스
홀리 보이스는 타고난 목소리에 비해 영적 권위가 더 있어 보였다. 그래선지 타고난 음성으로 맹숭맹숭하게 하는 기도보다 쇳소리를 내며 홀리 보이스로 하는 기도가 더 은혜로운 것 같았고, 응답도 빠를 것 같았다. 신학생들 가운데 더러는 홀리 보이스를 흉내 내기도 했다. 홀리 보이스를 만들려고 아예 성대 수술을 한 목사도 있었다.
홀리 보이스는 탁하고 거칠었을 뿐 아니라 톤도 아주 강했다. 주여 삼창에 이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기도방법 때문이었다. “홀리보이스”들은 나무뿌리를 뽑거나 책상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기도하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들의 기도행태는 그처럼 강력했다. 목소리가 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홀리보이스들은 성령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들을 통해 선포되는 성령은 언제나 강력했고 뜨거웠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만사형통의 주술이었다.
홀리보이스들은 성령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들을 통해 선포되는 성령은 언제나 강력했고 뜨거웠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만사형통의 주술이었다.
기도의 강력함, 성령의 뜨거움, 신앙의 적극성이 결합했을 때 “저돌성”이 잉태됐다. 따라서 목표를 세우면 포기하는 법이 없었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완고함은 소신으로 고집은 줏대로 칭송받았다. 그런 식으로 목표를 이뤄냈고, 목회에 성공했다. 성공할수록 힘은 세졌다. 홀리보이스들은 차츰 형님과 보스로 추앙받았다. 권위주의는 당연한 결과였다. 거칠고 저돌적인 권위주의 앞에서 실례(失禮)는 형님의 미덕이었고 무례(無禮)는 보스의 호방함이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차츰 실종되었다.
소위 기도를 많이 한다는, 신령하다는, 방언에 예언에 신유의 은사까지 받았다는 사람이 언젠가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 목사 능력 받았어?” 기도원 원장이라는 늙수그레한 여자 권사였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때 나는 삼십 대 초중반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젊고 자기가 아무리 신령하기로서니 처음 본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이의 목소리가 홀리 보이스였다.
부드러운 마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강퍅한 마음”이다. 이집트에서 내보내 달라는 모세의 청을 거절한 것이 바로, 바로의 강퍅한 마음이었다. 강퍅(剛愎)한 마음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이다. 강퍅한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면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촉진한다. 예언자 에스겔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그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내 이름을 더럽힌”(겔 36:20-23) 이스라엘 백성은 정화되어야 했다.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화과정은 예전과 달랐다. 예전의 정화과정이 외적인 정화였다면 에스겔을 통해 계시하신 정화과정은 내적인 정화였기 때문이다.
외적 정화는 이런 식이었다. “그들(레위인)을 정결하게 할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린 다음에, 온 몸의 털을 삭도로 다 밀고, 옷을 빨아 입게 하면 그들은 정결하게 된다.”(민 8:7) 하지만 온몸의 털을 밀고, 옷을 빨아 입은들 내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내적 정화였다. 하나님은 내적 정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겔 36:26)
내적 정화는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것이 “새로운 영” 곧 성령이다. 성령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하게 하는 영이었던 것이다.
에스겔이 계시한 성령은 홀리보이스들이 독점한 성령과 다르다. 완고하지 않으며, 고집스럽지 않으며, 거칠지 않다. 성령은 만사형통을 이뤄내는 주술적 힘도 아니다. 성령은 부드러운 영이다. 하여 강제하는 법이 없고, 늘 기다린다. 심지어 성령은 수줍음이 많아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나서지 않고 늘 이면에서 일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만 드러내려 한다. “이 거룩한 수줍음은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박영돈)
부드러움의 힘
부드러움은 약해 보이고 강퍅함은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강함을 이기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태풍이 불어도 부드러운 가지는 꺾이지 않지만 단단한 가지는 쉽게 부러진다. 잠언의 지혜자도 부드러움의 힘을 알고 있었다. “거친 말은 화를 돋우지만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잠 15:1) 사실 얼마나 많은 관계가 거친 말로 깨지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부드러운 말로 치유되는가. 지혜자의 경험에 따르면 “부드러운 혀는 뼈도 녹인다.”(잠 25:15)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딱딱하게 굳어가는 내 엉덩이의 탄력을 회복시킨 것은 쓰디쓰고 딱딱한 알약이나 날카롭게 찌르는 주사가 아니라 어머니의 부드러운 혀였다. 증세가 심해지던 어느 날부턴가 나는 이상한 느낌에 잠을 깨곤 했다. 잠이 덜 깬 눈에 들어온 건 딱딱하게 굳은 내 엉덩이를 핥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혀는 굳어버린 부위를 계속 핥았고, 몇 날 며칠이 지나 그 부위는 다시 말랑말랑해졌다.
부드러움은 생각보다 강하다. “세상에서 부드럽고 약하기로 하면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을 이길만한 게 없다.”(『노자』, 78) “유약(柔弱)은 강강(剛强)을 이긴다.” 부드럽고 약해 보이는 것이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것을 이긴다. 또한 “유약”이 생명과 관련된다면 “강강”은 죽음과 관련된다.
사람이 살아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하며
만물 초목이 살아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그게 죽으면 바싹 마른다.
人之生也柔弱 인지생야유약
其死也堅强 기사야견강
萬物草木之生也柔脆 만물초목지생야유취
其死也枯槁 기사야고고
― 『노자』, 76장
사람과 초목뿐 아니라 몸과 마음도 그렇다. 어린아이의 몸은 부드러워도 늙고 병든 몸은 굳어있다.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에선 덕의 꽃들이 피어나지만, 돌처럼 딱딱한 마음에선 악덕이 창궐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다. 너그러움, 연민, 친절, 환대, 용서, 사랑 같은 복음적 가치들도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온다. 너그러움이 “품어 안는” 부드러움이라면, 연민은 “함께 앓는” 부드러움이다. 친절이 “따뜻한” 부드러움이라면, 환대는 “활짝 열린” 부드러움이다. 용서가 “받아들이는” 부드러움이라면, 사랑은 “내어주는” 부드러움이다.
너그러움이 “품어 안는” 부드러움이라면, 연민은 “함께 앓는” 부드러움이다. 친절이 “따뜻한” 부드러움이라면, 환대는 “활짝 열린” 부드러움이다. 용서가 “받아들이는” 부드러움이라면, 사랑은 “내어주는” 부드러움이다.
강한 사람은 자기를 고집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강한 사람은 자기에 집착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은 자기를 부정할 줄 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부드러운 사람을 부르신 것이다. 부드러운 사람만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약(柔弱)이 강하다는 역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의 몸에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있었다.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깨닫는다. 자기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는 사실을!(고후 12:10)
아주 부드럽게
하지만 사람들은 부드러움의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옛사람은 이렇게 탄식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그대로 하지는 못한다”(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약지승강 유지승강 천하막부지 막능행, 『노자』, 78) 그래서 필요한 것이 “부드러움 수행”이다.
부드러움 수행에 힘쓸 때 성령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향심기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까닭은 그것이 훌륭한 “부드러움 수행”이기 때문이다. 홀리-보이스 영성의 저돌적 권위주의를 치유하는 데 이만한 것도 없다. 물론 향심기도의 목적이 부드러움은 아니다. 하지만 향심기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드러움을 수련하게 된다. 부드러움 수련은 향심기도가 주는 뜻밖의 선물인 것이다.
물론 향심기도의 목적이 부드러움은 아니다. 하지만 향심기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드러움을 수련하게 된다. 부드러움 수련은 향심기도가 주는 뜻밖의 선물인 것이다.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기도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려면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렸을 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마음의 표시(지향의 상징)이므로 생각에 붙들렸다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처음의 지향이 회복된다.
향심기도에서 “생각”은 사고작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의를 끌어당겨 초점을 맞추게 하는 모든 게 “생각”이다. 영감, 통찰, 기억, 감정도 생각이며, 가려움증이나 통증 같은 감각도 생각이다. 머리 위에서 지직대는 형광등 소리나 외부 소음도 생각이다. 어떤 종류든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렸을 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것이 향심기도 중에 이뤄지는 전부다.
그런데 향심기도 지침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때 “아주 부드럽게”(ever so gently) 돌아가라고 강조한다. 향심기도 운동의 초기에는 그냥 “돌아가라”고 했는데, 나중에 “부드럽게” 돌아가라는 말이 추가됐고, 마침내 “아주”라는 말이 더 추가됐다. 은유적으로 “가벼운 솜 위에 깃털 하나 얹듯”, 또는 “풀잎에 이슬 구르듯” 돌아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이미지들이다.
향심기도 중에 수행자의 주의를 끌어당기는 생각은 무수하게 많다. 이것은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갈 기회 또한 무수하다는 뜻이다. 이 과정이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과정이지만, 형식적으로는 부드러움을 수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향심기도를 “부드러움 수행”이라 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생각의 내용엔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생각이 주의를 끌어당길 때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지향이다.
이러한 태도와 지향은 홀리-보이스 영성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홀리-보이스 영성은 생각의 내용에 민감하다. 기도 중에 나타나는 부정적인 생각은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므로 떨쳐버리거나 없애야 한다. 이때 취하는 방법이 “물러가라!”고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생각에 붙들리고 생각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다. 선포는 더욱 강력해진다. 돌같이 굳은 마음은 바위처럼 딱딱해지고, 살갗같이 부드러운 마음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의 일을 방해한다. 포로살이는 끝나지 않는다.
하여, 부드러움 수행, 급하다!
- 이민재
(에스겔 36장 26절)
한때 “홀리 보이스”(거룩한 목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탁하고 가라앉고 거칠고 쉰 목소리를 사람들은 홀리 보이스라고 했다. 홀리 보이스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증거였으며 신령하고 영통하다는 표지였다. 목사들 중에서도 부흥사들의 목소리가 대개 그랬다.
홀리 보이스
홀리 보이스는 타고난 목소리에 비해 영적 권위가 더 있어 보였다. 그래선지 타고난 음성으로 맹숭맹숭하게 하는 기도보다 쇳소리를 내며 홀리 보이스로 하는 기도가 더 은혜로운 것 같았고, 응답도 빠를 것 같았다. 신학생들 가운데 더러는 홀리 보이스를 흉내 내기도 했다. 홀리 보이스를 만들려고 아예 성대 수술을 한 목사도 있었다.
홀리 보이스는 탁하고 거칠었을 뿐 아니라 톤도 아주 강했다. 주여 삼창에 이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기도방법 때문이었다. “홀리보이스”들은 나무뿌리를 뽑거나 책상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기도하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들의 기도행태는 그처럼 강력했다. 목소리가 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홀리보이스들은 성령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들을 통해 선포되는 성령은 언제나 강력했고 뜨거웠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만사형통의 주술이었다.
홀리보이스들은 성령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들을 통해 선포되는 성령은 언제나 강력했고 뜨거웠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만사형통의 주술이었다.
기도의 강력함, 성령의 뜨거움, 신앙의 적극성이 결합했을 때 “저돌성”이 잉태됐다. 따라서 목표를 세우면 포기하는 법이 없었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완고함은 소신으로 고집은 줏대로 칭송받았다. 그런 식으로 목표를 이뤄냈고, 목회에 성공했다. 성공할수록 힘은 세졌다. 홀리보이스들은 차츰 형님과 보스로 추앙받았다. 권위주의는 당연한 결과였다. 거칠고 저돌적인 권위주의 앞에서 실례(失禮)는 형님의 미덕이었고 무례(無禮)는 보스의 호방함이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차츰 실종되었다.
소위 기도를 많이 한다는, 신령하다는, 방언에 예언에 신유의 은사까지 받았다는 사람이 언젠가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 목사 능력 받았어?” 기도원 원장이라는 늙수그레한 여자 권사였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때 나는 삼십 대 초중반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젊고 자기가 아무리 신령하기로서니 처음 본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이의 목소리가 홀리 보이스였다.
부드러운 마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강퍅한 마음”이다. 이집트에서 내보내 달라는 모세의 청을 거절한 것이 바로, 바로의 강퍅한 마음이었다. 강퍅(剛愎)한 마음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이다. 강퍅한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면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촉진한다. 예언자 에스겔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그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내 이름을 더럽힌”(겔 36:20-23) 이스라엘 백성은 정화되어야 했다.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화과정은 예전과 달랐다. 예전의 정화과정이 외적인 정화였다면 에스겔을 통해 계시하신 정화과정은 내적인 정화였기 때문이다.
외적 정화는 이런 식이었다. “그들(레위인)을 정결하게 할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린 다음에, 온 몸의 털을 삭도로 다 밀고, 옷을 빨아 입게 하면 그들은 정결하게 된다.”(민 8:7) 하지만 온몸의 털을 밀고, 옷을 빨아 입은들 내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내적 정화였다. 하나님은 내적 정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겔 36:26)
내적 정화는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것이 “새로운 영” 곧 성령이다. 성령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하게 하는 영이었던 것이다.
에스겔이 계시한 성령은 홀리보이스들이 독점한 성령과 다르다. 완고하지 않으며, 고집스럽지 않으며, 거칠지 않다. 성령은 만사형통을 이뤄내는 주술적 힘도 아니다. 성령은 부드러운 영이다. 하여 강제하는 법이 없고, 늘 기다린다. 심지어 성령은 수줍음이 많아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나서지 않고 늘 이면에서 일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만 드러내려 한다. “이 거룩한 수줍음은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박영돈)
부드러움의 힘
부드러움은 약해 보이고 강퍅함은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강함을 이기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태풍이 불어도 부드러운 가지는 꺾이지 않지만 단단한 가지는 쉽게 부러진다. 잠언의 지혜자도 부드러움의 힘을 알고 있었다. “거친 말은 화를 돋우지만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잠 15:1) 사실 얼마나 많은 관계가 거친 말로 깨지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부드러운 말로 치유되는가. 지혜자의 경험에 따르면 “부드러운 혀는 뼈도 녹인다.”(잠 25:15)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딱딱하게 굳어가는 내 엉덩이의 탄력을 회복시킨 것은 쓰디쓰고 딱딱한 알약이나 날카롭게 찌르는 주사가 아니라 어머니의 부드러운 혀였다. 증세가 심해지던 어느 날부턴가 나는 이상한 느낌에 잠을 깨곤 했다. 잠이 덜 깬 눈에 들어온 건 딱딱하게 굳은 내 엉덩이를 핥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혀는 굳어버린 부위를 계속 핥았고, 몇 날 며칠이 지나 그 부위는 다시 말랑말랑해졌다.
부드러움은 생각보다 강하다. “세상에서 부드럽고 약하기로 하면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을 이길만한 게 없다.”(『노자』, 78) “유약(柔弱)은 강강(剛强)을 이긴다.” 부드럽고 약해 보이는 것이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것을 이긴다. 또한 “유약”이 생명과 관련된다면 “강강”은 죽음과 관련된다.
사람이 살아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하며
만물 초목이 살아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그게 죽으면 바싹 마른다.
人之生也柔弱 인지생야유약
其死也堅强 기사야견강
萬物草木之生也柔脆 만물초목지생야유취
其死也枯槁 기사야고고
― 『노자』, 76장
사람과 초목뿐 아니라 몸과 마음도 그렇다. 어린아이의 몸은 부드러워도 늙고 병든 몸은 굳어있다.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에선 덕의 꽃들이 피어나지만, 돌처럼 딱딱한 마음에선 악덕이 창궐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다. 너그러움, 연민, 친절, 환대, 용서, 사랑 같은 복음적 가치들도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온다. 너그러움이 “품어 안는” 부드러움이라면, 연민은 “함께 앓는” 부드러움이다. 친절이 “따뜻한” 부드러움이라면, 환대는 “활짝 열린” 부드러움이다. 용서가 “받아들이는” 부드러움이라면, 사랑은 “내어주는” 부드러움이다.
너그러움이 “품어 안는” 부드러움이라면, 연민은 “함께 앓는” 부드러움이다. 친절이 “따뜻한” 부드러움이라면, 환대는 “활짝 열린” 부드러움이다. 용서가 “받아들이는” 부드러움이라면, 사랑은 “내어주는” 부드러움이다.
강한 사람은 자기를 고집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강한 사람은 자기에 집착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은 자기를 부정할 줄 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부드러운 사람을 부르신 것이다. 부드러운 사람만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약(柔弱)이 강하다는 역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의 몸에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있었다.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깨닫는다. 자기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는 사실을!(고후 12:10)
아주 부드럽게
하지만 사람들은 부드러움의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옛사람은 이렇게 탄식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그대로 하지는 못한다”(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약지승강 유지승강 천하막부지 막능행, 『노자』, 78) 그래서 필요한 것이 “부드러움 수행”이다.
부드러움 수행에 힘쓸 때 성령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향심기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까닭은 그것이 훌륭한 “부드러움 수행”이기 때문이다. 홀리-보이스 영성의 저돌적 권위주의를 치유하는 데 이만한 것도 없다. 물론 향심기도의 목적이 부드러움은 아니다. 하지만 향심기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드러움을 수련하게 된다. 부드러움 수련은 향심기도가 주는 뜻밖의 선물인 것이다.
물론 향심기도의 목적이 부드러움은 아니다. 하지만 향심기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드러움을 수련하게 된다. 부드러움 수련은 향심기도가 주는 뜻밖의 선물인 것이다.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기도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려면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렸을 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마음의 표시(지향의 상징)이므로 생각에 붙들렸다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처음의 지향이 회복된다.
향심기도에서 “생각”은 사고작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의를 끌어당겨 초점을 맞추게 하는 모든 게 “생각”이다. 영감, 통찰, 기억, 감정도 생각이며, 가려움증이나 통증 같은 감각도 생각이다. 머리 위에서 지직대는 형광등 소리나 외부 소음도 생각이다. 어떤 종류든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렸을 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것이 향심기도 중에 이뤄지는 전부다.
그런데 향심기도 지침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때 “아주 부드럽게”(ever so gently) 돌아가라고 강조한다. 향심기도 운동의 초기에는 그냥 “돌아가라”고 했는데, 나중에 “부드럽게” 돌아가라는 말이 추가됐고, 마침내 “아주”라는 말이 더 추가됐다. 은유적으로 “가벼운 솜 위에 깃털 하나 얹듯”, 또는 “풀잎에 이슬 구르듯” 돌아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이미지들이다.
향심기도 중에 수행자의 주의를 끌어당기는 생각은 무수하게 많다. 이것은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갈 기회 또한 무수하다는 뜻이다. 이 과정이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과정이지만, 형식적으로는 부드러움을 수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향심기도를 “부드러움 수행”이라 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생각의 내용엔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생각이 주의를 끌어당길 때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지향이다.
이러한 태도와 지향은 홀리-보이스 영성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홀리-보이스 영성은 생각의 내용에 민감하다. 기도 중에 나타나는 부정적인 생각은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므로 떨쳐버리거나 없애야 한다. 이때 취하는 방법이 “물러가라!”고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생각에 붙들리고 생각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다. 선포는 더욱 강력해진다. 돌같이 굳은 마음은 바위처럼 딱딱해지고, 살갗같이 부드러운 마음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의 일을 방해한다. 포로살이는 끝나지 않는다.
하여, 부드러움 수행, 급하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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