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좋은 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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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71회 작성일 23-03-14 14:42본문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마 12:33)
지난주 “의의 빛에 대한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한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의에는 세 차원이 있다. 첫째, ‘법률적’ 의다. 구약성경은 법률적 의를 매우 강조한다. 재판장은 의인과 죄인을 잘 분별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합니다.’(신 25:1) 우리 사회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유권무죄 무권유죄가 되어서는 안 되며, 유검무죄 무검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유권무죄 유검무죄
이런 말도 했다. “법률적 의는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다. 이 의가 확립되어야 백성이 평화롭게 산다. 법원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을 편든다면, 그러한 나라는 있으나 마나다.”
지난주에 정부 고위직과 국회의원을 지낸 유력인사에 대한 재판 결과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 인사는 아들이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는데 이게 뇌물이냐 아니냐로 재판을 받았다. 아들은 회사에 6년 근무했고, 2~3백 만원을 월급으로 받은 대리급이었다고 한다. 1200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 당시 그 아들의 아버지는 민정수석이었다. 막강한 권력자인 아버지를 보고 아들에게 거액의 퇴직금 주었을 것이라는 게 국민 상식이요, 뇌물이 뻔하다는 게 국민의 법감정이다. 그런데 법원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이유가 기발하다.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했기 때문에 경제공동체가 아니라서 그렇다나? 법기술을 현란하게 구사하기는 했는데 궁색하기만 하다.
보수 언론조차 비상식적인 판결이라고 비판하면서 어떤 사람의 딸과 비교한다. 그 딸이 600만원 장학금을 받았고, 의대를 갔는데 당시 아버지가 민정수석이었기 때문에 뇌물이라는 것이다. 그 집안은 탈탈 털렸고, 엄마는 감옥살이 중이다.
얼마 전 우연히 그 딸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그 딸은 근무하던 병원에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의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진행자가 그동안 깨달은 게 있느냐고 묻자, 그 딸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자신의 환경이 특권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달았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고.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하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는 게 뜻밖이었다.
더 좋은 사람
이 말은 나에게 기억 하나를 소환했다. 이십 년 넘게 다니던 교회를 졸업했다는(?) 사람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 것이다. 그이는 교회에 다니면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주일성수・헌금생활・행사참석 등 교회에서 하라는 것도 다 했다. 하지만 교회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교회는 번영신앙의 온상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성공학으로 욕심을 자극했고,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부추겼다. 교회에 다닐수록 욕심쟁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그이는 아들과 크게 다퉜다. 아들은 성소수자들에게 연민을 보였고, 그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불만스러워했다. 그이는 아들의 태도를 나무랐고, 성경을 인용하며 단죄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아들은 대화를 중단했고, 아버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이는 아들이 성적 지향으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방황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한 자신의 독선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고해 같은 그의 이야기는 내가 평소에 느끼고 있던 한국교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을 말이다. 한국교회의 행습에 실망한 그이는 번민하다가 교회를 졸업했다.
고해 같은 그의 이야기는 내가 평소에 느끼고 있던 한국교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을 말이다.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감리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웨슬리타임즈〉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교인수는 6만 명 가까이, 경상재정은 천억 원 넘게 감소했다. 같은 해 교인 총수가 128만 명이니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10년 후엔 감리교회가 반 토막 난다.
왜 이렇게 됐을까? 코로나 탓도 있겠지만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감리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소위 “가나안 성도”가 급증하는 추세가 이를 반증한다. 통계에 따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는 교인들의 삶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움”을 결여한 그리스도인, 형용모순이 아닐 수 없으며, 본질적인 문제 제기가 아닐 수 없다.
신앙의 본류
기독교 신앙의 본류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비유로 간결하게 말씀하셨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마 12:33)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 신앙임을 예수님은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명쾌하게 선언하셨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좋은 사람 곧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의 일차적 관심은 축복이나 교리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존재를 위한 성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프로젝트다. 성부의 뜻, 성자의 십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은 새로운 존재의 탄생과 성장을 꿈꾸는 거룩한 전략이다. 성부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 성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셨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도록 힘과 지혜를 주시며 부추기신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존재를 위한 성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프로젝트다. 성부의 뜻, 성자의 십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은 새로운 존재의 탄생과 성장을 꿈꾸는 거룩한 전략이다. 성부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 성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셨다. 성령은 우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도록 힘과 지혜를 주시며 부추기신다.
성공・축복・부흥・성장(성축부성)은 나중 문제다. 만일 “성축부성”이 세속적 성공과 이기적 축복, 외적 부흥과 수적 성장을 의미한다면, “성축부성”을 추구하는 번영신앙은 기독교와 무관하다.
그간 한국교회는 번영신앙뿐 아니라,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하는 율법신앙에 열을 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만 빼려고 혈기를 부렸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은 뒷전이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다음, 유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마 12:36)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렇다면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에 관한 설교야말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온갖 쓸데없는 말” 아닐까. 아무튼 기독교인에게서 “욕심”과 “혐오”라는 비복음을 눈치챈 동시대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희망을 교회에서 철회한 것이다.
새로운 존재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신앙의 목표가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임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팔복”에 관해 설교하셨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복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우리는 그 복이 “누구의 복이냐”를 물어야 한다. 팔복은 “새로운 존재”가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존재가 바로 욕심을 비운 “가난한 사람”이며, 세속과의 결별로 인한 슬픔을 감수하는 “애통하는 사람”이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틀린다고 단죄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며, 집단적 편견에서 벗어나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의에 주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자비한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관상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어디서나 화해를 일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런 삶을 위해 고통까지 감수하는 “박해를 받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좋은 나무이며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이 모르는 행복을 누릴 새로운 존재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 관한 관심을 “완전”의 이상으로 발전시키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 관한 관심을 “완전”의 이상으로 발전시키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바울이 생각하는 좋은 나무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은”(엡 4:22-24) 존재다. 베드로는 좋은 나무의 이상을 “세상에서 욕심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 1:4)으로 묘사했다.
“거룩”은 좋은 나무의 또 다른 향기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살전 4:3)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살전 3:13) 거듭되는 기도가 간절하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살전 5:23)
웨슬리, 변형신앙의 거장
건강한 기독교 영성은 언제나 존재의 변형을 추구했다. 사도들뿐 아니라 사막 교부들이 그랬고, 중세 수도사들이 그랬으며, 종교개혁가들이 그랬다. 웨슬리야말로 “변형”신앙의 거장이었다. 선행은총에서 시작하여 회개와 믿음, 칭의와 성화를 거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웨슬리의 구원론은 변형신앙의 아름다운 변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감리교회에서 언제부턴가 변형신앙의 맥이 끊어졌다. 감리교회 강단에서, 심지어 모든 연회 모든 지방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웨슬리회심기념성회〉에서조차 변형신앙에 관한 설교를 들어볼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감리교회에서조차 천박한 번영신앙과 독선적인 율법신앙이 메소디스트들의 빛나는 변형신앙 전통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면 번영신앙은 어떻게 한국교회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기도수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 삼창에 이어지는 통성기도 말이다. 교회사에서 한국교회처럼 통성기도에 치열한 교회는 없었다. 주일 오전・오후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에서 성도들은 “통성으로” 기도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기도원에 가서도 “통성으로” 부르짖었다. 번영신앙과 율법신앙 담론은 통성기도를 통해 신자들의 입술과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과 골수에 새겨졌다.
하지만 변형신앙은 그렇지 못했다. 변형신앙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기도수행이 없었다. 설교 담론도 부족한 마당에 수행마저 없었으니 변형신앙이 신자들의 가슴에 새겨질 리 만무했다. 레시피가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조리과정이 없으면 허기를 면할 수 없듯이 아무리 복음적이어도 기도수행이 없다면 변형신앙 담론은 공론(空論)에 불과할 뿐이다. 기도수행은 일종의 영적 조리과정이기 때문이다.
레시피가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조리과정이 없으면 허기를 면할 수 없듯이 아무리 복음적이어도 기도수행이 없다면 변형신앙 담론은 공론(空論)에 불과할 뿐이다. 기도수행은 일종의 영적 조리과정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자크 엘룰은 담론의 현실화 기제인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추상적 담론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의 임재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어야만 하고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웨슬리의 변형신앙 담론을 현실화하려면 그에 합당한 기도수행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조직, 행정이나 법률이 아니다. 감리교회만큼 그런 것들을 잘 갖춘 교단도 없다. 그렇다고 복음적인 변형신앙 담론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웨슬리 영성 전통 자체가 복음이며 변형신앙의 꽃인 까닭이다. 없는 것은 단 하나, 변형신앙을 입술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현실로 육화할 기도수행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관상기도 순례를 하고 있다. 이 순례는 변형신앙을 회복하여 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우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기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기도란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인 까닭이다. 하여 관상기도 순례를 통해 기도의 지평이 새롭게 열린다면 벗들은 하나님을 닮은 신성한 나무가 될 것이며, 그 나무에서는 고귀한 꽃이 만발할 것이며 열매 또한 풍성할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 것이다.”(사 32:8)
나무가 되라
느리게 자라지만
근원에 대한 갈증으로
땅의 속살 파고들며
초월을 향한 갈망으로
하늘 향해 온몸 뻗는
기도하는 나무가 되라
나무가 되라
가지와 잎으로 배려의 그늘 만들고
꽃과 향으로 기쁨의 날들 빚으며
잘 영근 열매 바쳐 주린 배 위로하는
사랑의 나무가 되라
나무가 되라
낙엽으로 지며 남은 욕심 비우는
가을 나무가 되라
혹독한 추위를 맨살로 모시는
겨울나무가 되라
나무가 되어 순명을 배우라
어느 날 기꺼이 베어져
기둥이 되라
서까래가 되라
창틀도 되고 문지방도 되고
마루로 깔려 밟히기도 하였다가
쪼개지고 또 쪼개져 장작이 되었다가
뜨거운 님의 불길에 온몸 살라 재로,
한 줌 재로 부서져라
온기 품은 채 가난한 땅에 뿌려져
마침내 세상을 기름지게 하는
숨빛의 나무가 되라
- 이민재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마 12:33)
지난주 “의의 빛에 대한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한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의에는 세 차원이 있다. 첫째, ‘법률적’ 의다. 구약성경은 법률적 의를 매우 강조한다. 재판장은 의인과 죄인을 잘 분별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합니다.’(신 25:1) 우리 사회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유권무죄 무권유죄가 되어서는 안 되며, 유검무죄 무검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유권무죄 유검무죄
이런 말도 했다. “법률적 의는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다. 이 의가 확립되어야 백성이 평화롭게 산다. 법원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을 편든다면, 그러한 나라는 있으나 마나다.”
지난주에 정부 고위직과 국회의원을 지낸 유력인사에 대한 재판 결과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 인사는 아들이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는데 이게 뇌물이냐 아니냐로 재판을 받았다. 아들은 회사에 6년 근무했고, 2~3백 만원을 월급으로 받은 대리급이었다고 한다. 1200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 당시 그 아들의 아버지는 민정수석이었다. 막강한 권력자인 아버지를 보고 아들에게 거액의 퇴직금 주었을 것이라는 게 국민 상식이요, 뇌물이 뻔하다는 게 국민의 법감정이다. 그런데 법원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이유가 기발하다.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했기 때문에 경제공동체가 아니라서 그렇다나? 법기술을 현란하게 구사하기는 했는데 궁색하기만 하다.
보수 언론조차 비상식적인 판결이라고 비판하면서 어떤 사람의 딸과 비교한다. 그 딸이 600만원 장학금을 받았고, 의대를 갔는데 당시 아버지가 민정수석이었기 때문에 뇌물이라는 것이다. 그 집안은 탈탈 털렸고, 엄마는 감옥살이 중이다.
얼마 전 우연히 그 딸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그 딸은 근무하던 병원에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의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진행자가 그동안 깨달은 게 있느냐고 묻자, 그 딸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자신의 환경이 특권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달았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고.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하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는 게 뜻밖이었다.
더 좋은 사람
이 말은 나에게 기억 하나를 소환했다. 이십 년 넘게 다니던 교회를 졸업했다는(?) 사람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 것이다. 그이는 교회에 다니면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주일성수・헌금생활・행사참석 등 교회에서 하라는 것도 다 했다. 하지만 교회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교회는 번영신앙의 온상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성공학으로 욕심을 자극했고,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부추겼다. 교회에 다닐수록 욕심쟁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그이는 아들과 크게 다퉜다. 아들은 성소수자들에게 연민을 보였고, 그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불만스러워했다. 그이는 아들의 태도를 나무랐고, 성경을 인용하며 단죄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아들은 대화를 중단했고, 아버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이는 아들이 성적 지향으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방황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한 자신의 독선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고해 같은 그의 이야기는 내가 평소에 느끼고 있던 한국교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을 말이다. 한국교회의 행습에 실망한 그이는 번민하다가 교회를 졸업했다.
고해 같은 그의 이야기는 내가 평소에 느끼고 있던 한국교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을 말이다.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감리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웨슬리타임즈〉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교인수는 6만 명 가까이, 경상재정은 천억 원 넘게 감소했다. 같은 해 교인 총수가 128만 명이니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10년 후엔 감리교회가 반 토막 난다.
왜 이렇게 됐을까? 코로나 탓도 있겠지만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감리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소위 “가나안 성도”가 급증하는 추세가 이를 반증한다. 통계에 따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는 교인들의 삶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움”을 결여한 그리스도인, 형용모순이 아닐 수 없으며, 본질적인 문제 제기가 아닐 수 없다.
신앙의 본류
기독교 신앙의 본류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비유로 간결하게 말씀하셨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마 12:33)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 신앙임을 예수님은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명쾌하게 선언하셨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좋은 사람 곧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의 일차적 관심은 축복이나 교리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존재를 위한 성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프로젝트다. 성부의 뜻, 성자의 십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은 새로운 존재의 탄생과 성장을 꿈꾸는 거룩한 전략이다. 성부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 성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셨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도록 힘과 지혜를 주시며 부추기신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존재를 위한 성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프로젝트다. 성부의 뜻, 성자의 십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은 새로운 존재의 탄생과 성장을 꿈꾸는 거룩한 전략이다. 성부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 성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셨다. 성령은 우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도록 힘과 지혜를 주시며 부추기신다.
성공・축복・부흥・성장(성축부성)은 나중 문제다. 만일 “성축부성”이 세속적 성공과 이기적 축복, 외적 부흥과 수적 성장을 의미한다면, “성축부성”을 추구하는 번영신앙은 기독교와 무관하다.
그간 한국교회는 번영신앙뿐 아니라,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하는 율법신앙에 열을 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만 빼려고 혈기를 부렸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은 뒷전이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다음, 유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마 12:36)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렇다면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에 관한 설교야말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온갖 쓸데없는 말” 아닐까. 아무튼 기독교인에게서 “욕심”과 “혐오”라는 비복음을 눈치챈 동시대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희망을 교회에서 철회한 것이다.
새로운 존재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신앙의 목표가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임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팔복”에 관해 설교하셨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복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우리는 그 복이 “누구의 복이냐”를 물어야 한다. 팔복은 “새로운 존재”가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존재가 바로 욕심을 비운 “가난한 사람”이며, 세속과의 결별로 인한 슬픔을 감수하는 “애통하는 사람”이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틀린다고 단죄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며, 집단적 편견에서 벗어나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의에 주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자비한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관상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어디서나 화해를 일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런 삶을 위해 고통까지 감수하는 “박해를 받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좋은 나무이며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이 모르는 행복을 누릴 새로운 존재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 관한 관심을 “완전”의 이상으로 발전시키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 관한 관심을 “완전”의 이상으로 발전시키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바울이 생각하는 좋은 나무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은”(엡 4:22-24) 존재다. 베드로는 좋은 나무의 이상을 “세상에서 욕심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 1:4)으로 묘사했다.
“거룩”은 좋은 나무의 또 다른 향기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살전 4:3)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살전 3:13) 거듭되는 기도가 간절하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살전 5:23)
웨슬리, 변형신앙의 거장
건강한 기독교 영성은 언제나 존재의 변형을 추구했다. 사도들뿐 아니라 사막 교부들이 그랬고, 중세 수도사들이 그랬으며, 종교개혁가들이 그랬다. 웨슬리야말로 “변형”신앙의 거장이었다. 선행은총에서 시작하여 회개와 믿음, 칭의와 성화를 거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웨슬리의 구원론은 변형신앙의 아름다운 변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감리교회에서 언제부턴가 변형신앙의 맥이 끊어졌다. 감리교회 강단에서, 심지어 모든 연회 모든 지방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웨슬리회심기념성회〉에서조차 변형신앙에 관한 설교를 들어볼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감리교회에서조차 천박한 번영신앙과 독선적인 율법신앙이 메소디스트들의 빛나는 변형신앙 전통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면 번영신앙은 어떻게 한국교회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기도수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 삼창에 이어지는 통성기도 말이다. 교회사에서 한국교회처럼 통성기도에 치열한 교회는 없었다. 주일 오전・오후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에서 성도들은 “통성으로” 기도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기도원에 가서도 “통성으로” 부르짖었다. 번영신앙과 율법신앙 담론은 통성기도를 통해 신자들의 입술과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과 골수에 새겨졌다.
하지만 변형신앙은 그렇지 못했다. 변형신앙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기도수행이 없었다. 설교 담론도 부족한 마당에 수행마저 없었으니 변형신앙이 신자들의 가슴에 새겨질 리 만무했다. 레시피가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조리과정이 없으면 허기를 면할 수 없듯이 아무리 복음적이어도 기도수행이 없다면 변형신앙 담론은 공론(空論)에 불과할 뿐이다. 기도수행은 일종의 영적 조리과정이기 때문이다.
레시피가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조리과정이 없으면 허기를 면할 수 없듯이 아무리 복음적이어도 기도수행이 없다면 변형신앙 담론은 공론(空論)에 불과할 뿐이다. 기도수행은 일종의 영적 조리과정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자크 엘룰은 담론의 현실화 기제인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추상적 담론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의 임재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어야만 하고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웨슬리의 변형신앙 담론을 현실화하려면 그에 합당한 기도수행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조직, 행정이나 법률이 아니다. 감리교회만큼 그런 것들을 잘 갖춘 교단도 없다. 그렇다고 복음적인 변형신앙 담론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웨슬리 영성 전통 자체가 복음이며 변형신앙의 꽃인 까닭이다. 없는 것은 단 하나, 변형신앙을 입술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현실로 육화할 기도수행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관상기도 순례를 하고 있다. 이 순례는 변형신앙을 회복하여 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우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기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기도란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인 까닭이다. 하여 관상기도 순례를 통해 기도의 지평이 새롭게 열린다면 벗들은 하나님을 닮은 신성한 나무가 될 것이며, 그 나무에서는 고귀한 꽃이 만발할 것이며 열매 또한 풍성할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 것이다.”(사 32:8)
나무가 되라
느리게 자라지만
근원에 대한 갈증으로
땅의 속살 파고들며
초월을 향한 갈망으로
하늘 향해 온몸 뻗는
기도하는 나무가 되라
나무가 되라
가지와 잎으로 배려의 그늘 만들고
꽃과 향으로 기쁨의 날들 빚으며
잘 영근 열매 바쳐 주린 배 위로하는
사랑의 나무가 되라
나무가 되라
낙엽으로 지며 남은 욕심 비우는
가을 나무가 되라
혹독한 추위를 맨살로 모시는
겨울나무가 되라
나무가 되어 순명을 배우라
어느 날 기꺼이 베어져
기둥이 되라
서까래가 되라
창틀도 되고 문지방도 되고
마루로 깔려 밟히기도 하였다가
쪼개지고 또 쪼개져 장작이 되었다가
뜨거운 님의 불길에 온몸 살라 재로,
한 줌 재로 부서져라
온기 품은 채 가난한 땅에 뿌려져
마침내 세상을 기름지게 하는
숨빛의 나무가 되라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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