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71회 작성일 23-03-14 14:40본문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고전 1:22-23)
해가 바뀌는 때여서 그런지 부음(訃音)이 잦다. 일주일 사이에 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첫 번째는 신학교 동기였고, 네 번째는 임인규 권사님이었다. 임 권사님은 은명교회를 봉헌하신 김경희 장로님의 부인이시다. 나는 임 권사님을 기품있는 여인으로, 산 같이 의연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진심으로 존중해준 따뜻한 인간으로 기억한다.
낯섦
지인들의 잦은 부음은 작년 어느 날의 내 죽음 경험을 소환했다. 시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꼭두새벽에 잠을 깼다. 세시나 됐을까, 좀 더 자려고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방 안에 두텁게 깔린 침묵과 어둠의 느낌이 좋았다. 나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그들과 함께 잠들었고 그들과 함께 깨어났다. 그만큼 익숙한 실재였으며, 영적 여정의 동반자였다. 그들과 함께할 때 인간적인 외로움은 신성한 고독으로 승화되곤 했다.
그날 새벽, 침묵과 어둠 속에서 신성한 고독을 즐기던 나는 방 안에 그들 외에 또 다른 실재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죽음의 방문임을 직감했다. 물론 죽음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테니까. 죽음의 기운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상상이나 허상은 아니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느닷없는 죽음의 방문에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보편적인 명제는 관념일 뿐, 그동안 나에게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늘 살아있었고 늘 건강했고 늘 일하고 있었으니 죽음을 준비할 이유도 틈도 없었다. 아마 내가 병들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병들었다면 다른 때보다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가까이 예감하고,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더 자주 했겠지만, 그래도 죽음의 순간을 짐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의 방문이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낯설었다. 죽음이라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맞아들여야 하는 것도 낯설었고, 죽음의 손을 잡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해야 하는 것도 낯설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펼쳐질 현실이 어떨지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필시 본회퍼가 묘사한 예수의 부름처럼,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에서 떠나 완전히 불안정한 삶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삶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으로, 유한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낯설었다. 죽음 자체도 낯설었고, 그것이 다가오는 방식도 낯설었고,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도 낯설었고, 그것이 열 현실도 낯설었다.
당혹
낯섦과 함께 느꼈던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릴 틈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도 없었고, 아들과 며느리를 축복해줄 수도 없었고, 사랑하는 손자 손녀를 안아줄 수도 없었다. 죽음의 손을 잡아야 했고, 죽음을 따라나서야 했다. 죽음의 손짓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던 일도 멈춰야 했다. 개인적으로 하던 일들, 교회에서 하던 일들, 학교에서 하던 일들,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하던 일들을 멈춰야 했다. 함께하던 사람들에게 예고도 설명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중단해야 했다. 무책임하다고 비난받아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은 물론 다른 인연들도 끝내야 했다. 목회하면서 맺은 길벗들과의 관계, 다양한 교육현장에서 맺은 제자들과의 관계, 영적 여정에서 만난 소울프렌드들과의 관계, 공적 영역에서 맺은 지인들과의 관계를 중단해야 했다. 아직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관계, 아직 용서를 구하지 못한 관계, 아직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관계,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관계를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떠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를 끝내야 하는 것도 당혹스러웠지만, 죽음과 함께 펼쳐질 새로운 현실을 향해 지체하지 않고 떠나야 하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훈련소에 입소할 때나 자대 배치받을 때, 목회지에 처음 부임했을 때 느꼈던 낯섦보다 더 낯선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당혹스러웠다.
예고 없이 다가오고, 예외 없이 멈추게 하고, 예측할 수 없는 현실로 부르는 죽음을 낯설어하고 당혹스러워하면서 나는 죽음이 엄정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명령과도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어떤 변명도 지연도 허용하지 않는 그 엄정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뿐이었다.
죽음의 방문을 한동안 낯설어하고 당혹스러워하다가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낯설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것들이 겉사람(페르소나 또는 사회적 자아)과 관련된 것임을! 가족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끝내야 하는 것도, 그동안 해오던 모든 일을 중단해야 하는 것도 겉사람에 속한 것이었다. 그만큼 삶은 겉사람과 밀착되어 있었다.
안도
깨달음과 함께 죽음의 의미가 확연해졌다. 죽음은 겉사람에 속한 모든 관계와 일에서, 그리고 관계와 일의 동력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평생 끌어안고 살던 에고가 맥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며, 헛된 명성에 집착하게 한 거짓자아가 완전히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또 죽음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들로 가득한 마음이 가난해지는 무심의 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죽음은 겉사람과 에고에서 벗어나고, 거짓자아와 마음현실에서 해방됨으로써 참자아가 해처럼 달처럼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죽음이 가져오는 미래는 둘 중의 하나였다. 참자아로 현존하는 조화롭고 충만하고 빛나는 현실로 들어가든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뒤범벅된 무의 심연에 빠지든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참자아로 현존하는 것이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동안 관상수련을 하면서 날마다 맛본 현실이었다. 그간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얼마나 강조했던가. 낯섦과 당혹감 사이로 안도감이 깃들었다. 이때 불현듯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이 느껴졌다.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합일을 통해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온전히 참여하는 관상의 절정이었다.
그러자 죽음이 다르게 경험되기 시작했다. 죽음은 친밀하고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기도 했지만, 참자아를 통해 그리스도와 온전히 합일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모든 불순과 거짓을 벗고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합일하는 순간이었다.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합일을 통해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온전히 참여하는 관상의 절정이었다. 〈참자아의 기도・2〉가 떠올랐다.
무심 예수 그리스도
참자아의 원형이시여
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소서
정말 멋진 기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기도를 꾸준히 수련한 덕에 죽음의 방문이 가져다준 낯섦과 당혹감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이 기도를 통해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사는 것만큼 큰 은혜는 없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완벽한 소멸과 함께 무의 심연에 떨어질 뿐, 죽음을 넘어 참자아가 펼칠 새로운 현실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그리스도 없이 맞이하는 것과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맞이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민망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도감은 다시 민망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갈망한다면서도, 나태하고 게을렀던 시간들, 방만하고 느슨했던 시간들, 세속의 현란함과 달콤함에 취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보낸 시간들이 아까웠고 안타까웠다. 후회가 밀려왔다. 좀 더 치열하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좀 더 비우고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좀 더 진실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자아의 기도에 이어 예수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죽음에 임박했을 때 예수기도는 그리스도께 드릴 내 생애 마지막 기도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름
작년 시월 어느 날 새벽의 죽음 경험을 통해 나는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묘사한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고전 1:22-23)
이 말에 따르면 신앙의 유형에는 세 종류가 있다.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과 지혜(이성)를 찾는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앙이 그것이다. 바울은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을 유대 종교성의 특징으로 보았고, 지혜를 찾는 신앙을 그리스 종교성의 특징으로 보았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앙은 특정 민족에 한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앙은 특정 민족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신앙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한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마 4:18-22)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셨을 때도 “레위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막 2:14)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은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제자의 응답은 예수에 대한 언어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의 행위다. (…)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길을 떠나서 신앙에 이르는 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다.”(본회퍼, 『나를 따르라』)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향해 우리를 부르실까? 유대인들이 바라는 (그리고 번영신앙에 취한 한국교회가 바라는) 성공과 축복, 부흥과 성장의 기적일까? 그리스인들이 바라는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인들이 바라는) 도덕적 이상이나 이념적 정의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처세술이나 인간계발 또는 생활개선 프로그램일까?
모두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자아로 부르신다. 날마다 부르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부르신다. 기독교 신앙은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여 참자아를 자각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실존이 창조된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복된 현실이다. 겉사람과 거짓자아 차원에서 이뤄지는 기적과 번영, 도덕과 이념, 인간계발 프로그램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새로운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하려면, 겉사람을 전부로 여기던 삶을 멈추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에고와 거짓자아에 집착하던 삶을 멈추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참자아가 아닌 것에 대해 철저히 죽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죽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막 8:14) 루미의 말처럼,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
나무
인류를 죄와 죽음에 빠지게 한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9, 3:6)였다. 이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겼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욕망을 실현하느라 끈질기고 악착같이 살아있는 거짓자아를 상징한다. 거짓자아가 살아있는 한 참자아는 죽고, 우리는 죽음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반면, 십자가는 사각으로 제재(製材)한 재목에 불과하다. 십자가는 죽은 나무다. 그런데 그 죽은 나무에 그리스도가 매달릴 때 죽은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된다. 다시 말해 거짓자아가 죽은 나무 곧 십자가에서 죽으면 참자아의 생명이 살아난다. 죽은 나무인 십자가는 욕망과 함께 거짓자아를 죽이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 없이 구원은 없다. 몸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참자아의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 부르심은 죽음의 방문과 똑같다. 아무리 낯설고 당혹스러워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인연을 끊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듯, 그리스도께서 참자아로 부르실 때도 그래야 한다. 참자아를 향한 여행은 그만큼 엄정하다. 죽음이 방문했을 때처럼, 그리스도께서 참자아로 부르실 때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응답해야 하며, 변명하거나 핑계 대지 말고 따라야 한다. 그래야 영생 곧 참자아의 생명을 얻는다.
- 이민재
(고전 1:22-23)
해가 바뀌는 때여서 그런지 부음(訃音)이 잦다. 일주일 사이에 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첫 번째는 신학교 동기였고, 네 번째는 임인규 권사님이었다. 임 권사님은 은명교회를 봉헌하신 김경희 장로님의 부인이시다. 나는 임 권사님을 기품있는 여인으로, 산 같이 의연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진심으로 존중해준 따뜻한 인간으로 기억한다.
낯섦
지인들의 잦은 부음은 작년 어느 날의 내 죽음 경험을 소환했다. 시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꼭두새벽에 잠을 깼다. 세시나 됐을까, 좀 더 자려고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방 안에 두텁게 깔린 침묵과 어둠의 느낌이 좋았다. 나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그들과 함께 잠들었고 그들과 함께 깨어났다. 그만큼 익숙한 실재였으며, 영적 여정의 동반자였다. 그들과 함께할 때 인간적인 외로움은 신성한 고독으로 승화되곤 했다.
그날 새벽, 침묵과 어둠 속에서 신성한 고독을 즐기던 나는 방 안에 그들 외에 또 다른 실재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죽음의 방문임을 직감했다. 물론 죽음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테니까. 죽음의 기운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상상이나 허상은 아니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느닷없는 죽음의 방문에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보편적인 명제는 관념일 뿐, 그동안 나에게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늘 살아있었고 늘 건강했고 늘 일하고 있었으니 죽음을 준비할 이유도 틈도 없었다. 아마 내가 병들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병들었다면 다른 때보다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가까이 예감하고,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더 자주 했겠지만, 그래도 죽음의 순간을 짐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의 방문이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낯설었다. 죽음이라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맞아들여야 하는 것도 낯설었고, 죽음의 손을 잡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해야 하는 것도 낯설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펼쳐질 현실이 어떨지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필시 본회퍼가 묘사한 예수의 부름처럼,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에서 떠나 완전히 불안정한 삶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삶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으로, 유한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낯설었다. 죽음 자체도 낯설었고, 그것이 다가오는 방식도 낯설었고,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도 낯설었고, 그것이 열 현실도 낯설었다.
당혹
낯섦과 함께 느꼈던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릴 틈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도 없었고, 아들과 며느리를 축복해줄 수도 없었고, 사랑하는 손자 손녀를 안아줄 수도 없었다. 죽음의 손을 잡아야 했고, 죽음을 따라나서야 했다. 죽음의 손짓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던 일도 멈춰야 했다. 개인적으로 하던 일들, 교회에서 하던 일들, 학교에서 하던 일들,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하던 일들을 멈춰야 했다. 함께하던 사람들에게 예고도 설명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중단해야 했다. 무책임하다고 비난받아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은 물론 다른 인연들도 끝내야 했다. 목회하면서 맺은 길벗들과의 관계, 다양한 교육현장에서 맺은 제자들과의 관계, 영적 여정에서 만난 소울프렌드들과의 관계, 공적 영역에서 맺은 지인들과의 관계를 중단해야 했다. 아직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관계, 아직 용서를 구하지 못한 관계, 아직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관계,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관계를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떠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를 끝내야 하는 것도 당혹스러웠지만, 죽음과 함께 펼쳐질 새로운 현실을 향해 지체하지 않고 떠나야 하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훈련소에 입소할 때나 자대 배치받을 때, 목회지에 처음 부임했을 때 느꼈던 낯섦보다 더 낯선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당혹스러웠다.
예고 없이 다가오고, 예외 없이 멈추게 하고, 예측할 수 없는 현실로 부르는 죽음을 낯설어하고 당혹스러워하면서 나는 죽음이 엄정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명령과도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어떤 변명도 지연도 허용하지 않는 그 엄정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뿐이었다.
죽음의 방문을 한동안 낯설어하고 당혹스러워하다가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낯설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것들이 겉사람(페르소나 또는 사회적 자아)과 관련된 것임을! 가족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끝내야 하는 것도, 그동안 해오던 모든 일을 중단해야 하는 것도 겉사람에 속한 것이었다. 그만큼 삶은 겉사람과 밀착되어 있었다.
안도
깨달음과 함께 죽음의 의미가 확연해졌다. 죽음은 겉사람에 속한 모든 관계와 일에서, 그리고 관계와 일의 동력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평생 끌어안고 살던 에고가 맥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며, 헛된 명성에 집착하게 한 거짓자아가 완전히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또 죽음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들로 가득한 마음이 가난해지는 무심의 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죽음은 겉사람과 에고에서 벗어나고, 거짓자아와 마음현실에서 해방됨으로써 참자아가 해처럼 달처럼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죽음이 가져오는 미래는 둘 중의 하나였다. 참자아로 현존하는 조화롭고 충만하고 빛나는 현실로 들어가든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뒤범벅된 무의 심연에 빠지든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참자아로 현존하는 것이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동안 관상수련을 하면서 날마다 맛본 현실이었다. 그간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얼마나 강조했던가. 낯섦과 당혹감 사이로 안도감이 깃들었다. 이때 불현듯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이 느껴졌다.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합일을 통해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온전히 참여하는 관상의 절정이었다.
그러자 죽음이 다르게 경험되기 시작했다. 죽음은 친밀하고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기도 했지만, 참자아를 통해 그리스도와 온전히 합일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모든 불순과 거짓을 벗고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합일하는 순간이었다.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합일을 통해 삼위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온전히 참여하는 관상의 절정이었다. 〈참자아의 기도・2〉가 떠올랐다.
무심 예수 그리스도
참자아의 원형이시여
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소서
정말 멋진 기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기도를 꾸준히 수련한 덕에 죽음의 방문이 가져다준 낯섦과 당혹감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이 기도를 통해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사는 것만큼 큰 은혜는 없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완벽한 소멸과 함께 무의 심연에 떨어질 뿐, 죽음을 넘어 참자아가 펼칠 새로운 현실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그리스도 없이 맞이하는 것과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맞이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민망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도감은 다시 민망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갈망한다면서도, 나태하고 게을렀던 시간들, 방만하고 느슨했던 시간들, 세속의 현란함과 달콤함에 취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보낸 시간들이 아까웠고 안타까웠다. 후회가 밀려왔다. 좀 더 치열하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좀 더 비우고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좀 더 진실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자아의 기도에 이어 예수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죽음에 임박했을 때 예수기도는 그리스도께 드릴 내 생애 마지막 기도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름
작년 시월 어느 날 새벽의 죽음 경험을 통해 나는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묘사한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고전 1:22-23)
이 말에 따르면 신앙의 유형에는 세 종류가 있다.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과 지혜(이성)를 찾는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앙이 그것이다. 바울은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을 유대 종교성의 특징으로 보았고, 지혜를 찾는 신앙을 그리스 종교성의 특징으로 보았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앙은 특정 민족에 한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앙은 특정 민족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신앙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한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마 4:18-22)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셨을 때도 “레위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막 2:14)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은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제자의 응답은 예수에 대한 언어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의 행위다. (…)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길을 떠나서 신앙에 이르는 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다.”(본회퍼, 『나를 따르라』)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향해 우리를 부르실까? 유대인들이 바라는 (그리고 번영신앙에 취한 한국교회가 바라는) 성공과 축복, 부흥과 성장의 기적일까? 그리스인들이 바라는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인들이 바라는) 도덕적 이상이나 이념적 정의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처세술이나 인간계발 또는 생활개선 프로그램일까?
모두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자아로 부르신다. 날마다 부르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부르신다. 기독교 신앙은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여 참자아를 자각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실존이 창조된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복된 현실이다. 겉사람과 거짓자아 차원에서 이뤄지는 기적과 번영, 도덕과 이념, 인간계발 프로그램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새로운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하려면, 겉사람을 전부로 여기던 삶을 멈추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에고와 거짓자아에 집착하던 삶을 멈추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참자아가 아닌 것에 대해 철저히 죽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죽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막 8:14) 루미의 말처럼,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
나무
인류를 죄와 죽음에 빠지게 한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9, 3:6)였다. 이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겼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욕망을 실현하느라 끈질기고 악착같이 살아있는 거짓자아를 상징한다. 거짓자아가 살아있는 한 참자아는 죽고, 우리는 죽음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반면, 십자가는 사각으로 제재(製材)한 재목에 불과하다. 십자가는 죽은 나무다. 그런데 그 죽은 나무에 그리스도가 매달릴 때 죽은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된다. 다시 말해 거짓자아가 죽은 나무 곧 십자가에서 죽으면 참자아의 생명이 살아난다. 죽은 나무인 십자가는 욕망과 함께 거짓자아를 죽이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 없이 구원은 없다. 몸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참자아의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 부르심은 죽음의 방문과 똑같다. 아무리 낯설고 당혹스러워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인연을 끊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듯, 그리스도께서 참자아로 부르실 때도 그래야 한다. 참자아를 향한 여행은 그만큼 엄정하다. 죽음이 방문했을 때처럼, 그리스도께서 참자아로 부르실 때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응답해야 하며, 변명하거나 핑계 대지 말고 따라야 한다. 그래야 영생 곧 참자아의 생명을 얻는다.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