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축제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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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70회 작성일 23-03-14 14:39본문
“행복은 능력이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시편 89:15)
삶의 조건은 같은데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행복의 최대치를 사는 사람이 있고 행복의 최소치를 사는 사람이 있다. 행복의 최대치를 잠언은 이렇게 묘사한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잔칫날이다.”(잠 15:15)
행복은 능력이다
모든 날을 잔칫날로 살려면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행복하려면 내면 상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잠 15:17)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 17:1)
병도 내면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내면 상태에 따라 병은 낫기도 하고 도지기도 한다.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 17:22) “사람은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잠 18:14)
요즘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삶의 외적 조건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는데도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걸 보면 말이다. 헬조선, 삼포세대, 오포세대, 흙수저 같이 불행을 묘사하는 신조어들이 계속 등장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가 불행하다면 둘 중 하나다. 행복은 물질의 풍요와 무관하거나 행복의 능력이 젬병이거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가 불행하다면 둘 중 하나다. 행복은 물질의 풍요와 무관하거나 행복의 능력이 젬병이거나!
물론 행복이 물질 조건과 무관한 건 아니다. 적당한 물적 토대 없이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물적 토대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행복의 능력”도 중요하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능력이다. 행복의 능력이 있으면 초가삼간에서 살아도 행복하지만, 행복의 능력이 없으면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불행하다.
예술가가 하찮고 평범한 사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고, 시인이 사소해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삶의 진실을 통찰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행복의 능력이 발달한 사람은 사소하고 하찮고 평범해 보이는 환경에서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린이들이 그런 존재다. 어린이들은 모든 상황에서 재미와 행복을 만들어낸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행복의 능력이 뛰어나다.
영적 여정이란 잃어버린 행복의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늘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녔고, 감옥에 가뒀으며,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으며”(행 9:1),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행 8:13) 이런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잃어버린 행복의 능력을 되찾았고,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1-12)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사도 바울의 행복지수는 최대치로 올라갔다. 그의 배후에는 행복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행복의 최소치
요즘 사람들은 옛날의 왕도 경험하지 못한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행복하지가 않다. 2018~2020년 대한민국의 평균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85점에 불과하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지만 삶의 만족도는 OECD 37개국에서 35등으로 거의 꼴찌다. 체코(6.97), 멕시코(6.32), 칠레(6.17)보다도 낮다.
왜 이럴까? 대한민국의 불행한 삶의 풍경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역사적・국가적 재난이 백 년 넘게 뒤엉켜 만들어낸 풍경이다. 모든 인간에겐 생존/안전, 인정/존중, 권력/통제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가 있어서 성장이 가능하다. 유아기에 본능적인 욕구를 충분히 채운다면 성인이 됐을 때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본능적 욕구에서 비교적 자유롭기에 삶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줄 알고, 다양한 차원에서 행복을 창조하고 향유할 줄 안다.
하지만 한국처럼 일제식민통치나 6.25전쟁 같은 비극적 상황을 겪게 되면 인정 욕구와 권력 욕구는 둘째 치고 생존/안전 욕구를 거의 충족하지 못한다. 허구한 날 배를 곯고 거처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의 결핍과 살 곳의 결핍, 즉 밥과 집의 결핍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그 결핍의 고통은 무의식에 트라우마로 남는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핍의 고통을 보상하려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토머스 키팅이 말하는 “정서적 행복프로그램”(Emotional Program for Happiness: EPH)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지난날의 생활방식”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엡 4:22)이다. 행복프로그램은 거짓자아를 강화하고, 구습은 옛사람을 강화한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에고”는 이렇게 출현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핍의 고통을 보상하려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토머스 키팅이 말하는 “정서적 행복프로그램”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엡 4:22)이다.
한국인들의 집단무의식에는 생존/안전 욕구를 실현하지 못한 결핍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 트라우마는 자녀 세대로 이어지고 대대로 대물림한다. 그래서 온 나라가 먹는 것에 집착하고, 온 세대가 집을 소유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러는 동안 삶의 다양한 행복의 가능성에 눈이 멀고,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의 능력은 퇴화한다. 하지만 돈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해도 삶은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유 1:12) 같고, “길 잃고 떠도는 별들”(유 1:13) 같다. 그처럼 황폐하고 그처럼 공허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행복의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돈이 많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행복감을 높여준다. 돈의 힘이나 성공의 기쁨을 무시한다면 위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시적 행복을 줄지는 몰라도 행복의 능력을 길러주진 않는다.
돈과 성공으로 행복하려면 돈과 성공이 계속 주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돈은 가질수록 더 갖고 싶고 성공은 이룰수록 더 이루고 싶다. 결핍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돈과 성공으로 행복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뿐 아니다. 소유와 성공은 또 다른 열등감의 시작이기도 하다.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나보다 더 높이 성공한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돈과 성공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니라 언제나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나의 소유는 타자의 박탈을 바탕으로 한 소유이며, 나의 성공은 타자의 실패를 바탕으로 한 성공이다. 나의 우월감은 타자의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우월감이며, 나의 행복은 타자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 행복이다.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내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울어야 한다. 그러한 행복마저도 지속이 불가능하다. 행복은 일시적인 욕망충족에 불과하니까.
행복의 최대치
삶의 외적 조건을 초월한 항구적인 행복의 길은 없을까? 시편 시인은 그 비결을 알고 있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시 89:15) 동일한 삶의 조건에서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그런 능력이 마비된 사람이 있다. 삶을 축제처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형벌처럼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사람, 삶을 축제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이 행복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바울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 행복의 능력이 뛰어나 매일 축제의 함성을 외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시편 시인이 노래하는 대로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시 89:15)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삶의 모든 조건에서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알며, 모든 날을 잔칫날로 살아간다. 하므로 행복의 관건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이다. 하여, 그 얼굴을 찾는 게 항구한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러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높은 하늘? 깊은 바다? 심산유곡? 아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다. 거짓자아 너머의 참자아 말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는 은총이 나온다. 그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천상의 에너지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다. 거짓자아 너머의 참자아 말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는 은총이 나온다. 그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천상의 에너지다.
사람들은 페르소나(사회적 자아)가 자기인 줄 안다. 사회적 역할과 기능 곧 직업이 자기인 줄 안다. 명함에 박은 직함이나 이력서에 적은 경력이 자기의 전부인 줄 안다. 그래서 남보다 뛰어난 역할과 기능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남보다 눈에 띄는 직함을 갖고 화려한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성공하면 우쭐하고 실패하면 주눅 든다.
그렇기에 형벌 같은 비교와 경쟁의 뫼비우스 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욕망을 동력으로 한 행복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구습 곧 “지난 날의 생활방식”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긴장과 스트레스는 만성 질병처럼 몸과 마음을 결박한다. 열등감과 우월감, 성취감과 패배감 사이를 천국과 지옥 오가듯 오락가락한다. 행복지수는 차츰 떨어지고, 행복의 능력은 시나브로 퇴화한다. 삶의 외적 조건이 나날이 좋아져도 행복은 최소치로만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자각할 때 삶에서는 혁명이 일어난다. 페르소나와 관련된 비교와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행복프로그램과 지난 날의 생활방식(구습)에서도 벗어난다. 비교와 경쟁이 초래한 마음의 긴장과 몸의 경직에서 해방된다. 반복되는 실패로 인한 열등감과 알량한 성공으로 인한 우월감도 사라진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에고의 감옥에서 해방하여 불행의 사슬을 단박에 끊어버린다.
이처럼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또 외면뿐 아니라 내면, 표면뿐 아니라 이면, 표층뿐 아니라 심층, 세속뿐 아니라 신성을 보게 한다. 내면과 이면, 심층과 신성에서 쏟아지는 은총은 행복의 강물이 되어 삶의 구석구석을 적신다.
또 다른 나
이뿐 아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깨달으면 타인도 새로워 보인다. 타인은 더 이상 나의 성공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니다. 나의 성공을 위해 쓰러뜨리거나 짓밟아야 하는 적도 아니다. 그는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other me)이다.
“인라케시 알라킨”이라는 말이 있다. 마야 문명이 인류에게 선물한 아름다운 인사말이다. 마야 원주민들은 함께 모일 때 누군가 “인라케시!”라고 외치면, 모두 “알라킨!” 하고 응답한다. “나는 너”라는 말에 “너는 나”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타자를 “또 다른 나”로 인식하는 관계의 기쁨은 행복프로그램이 형성한 거짓자아나 구습이 만들어낸 옛사람 차원에서는 맛보지 못한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기쁨이다.
타자를 “또 다른 나”로 인식하는 관계의 기쁨은 행복프로그램이 형성한 거짓자아나 구습이 만들어낸 옛사람 차원에서는 맛보지 못한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기쁨이다.
야곱이 이러한 경험을 들려준다. 얍복강에서 자신의 빛나는 얼굴을 자각했을 때 야곱은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었던 형 에서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창 33:10) 형은 더 이상 자기를 죽이려는 무서운 적이 아니었다. 복을 빼앗아야 하는 경쟁자도 아니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너였으며, “또 다른 나”였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은 자기인식의 혁명일 뿐 아니라, 참된 공동체의 기초이기도 하다. 타인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만큼 공동체를 결속하는 것은 없다.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조직력도 이념도 아니다. 타자를 주님의 얼굴(하나님의 형상, 참자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레비나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기초로 한 공동체에서는 에고의 죽음과 거짓자아의 해체에서 나오는 신성한 에너지가 흐른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공동체를 생기있게 만든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배려가 있고 환대가 있다.
이러한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기초로 한 공동체에서는 에고의 죽음과 거짓자아의 해체에서 나오는 신성한 에너지가 흐른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공동체를 생기있게 만든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배려가 있고 환대가 있다. 환희가 넘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참자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기쁨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공동체,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총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인한 행복은 영원하다. “태양처럼, 저 달처럼, 구름 속에 있는 진실한 증인처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시 89:37)
- 이민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시편 89:15)
삶의 조건은 같은데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행복의 최대치를 사는 사람이 있고 행복의 최소치를 사는 사람이 있다. 행복의 최대치를 잠언은 이렇게 묘사한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잔칫날이다.”(잠 15:15)
행복은 능력이다
모든 날을 잔칫날로 살려면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행복하려면 내면 상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잠 15:17)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 17:1)
병도 내면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내면 상태에 따라 병은 낫기도 하고 도지기도 한다.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 17:22) “사람은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잠 18:14)
요즘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삶의 외적 조건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는데도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걸 보면 말이다. 헬조선, 삼포세대, 오포세대, 흙수저 같이 불행을 묘사하는 신조어들이 계속 등장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가 불행하다면 둘 중 하나다. 행복은 물질의 풍요와 무관하거나 행복의 능력이 젬병이거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가 불행하다면 둘 중 하나다. 행복은 물질의 풍요와 무관하거나 행복의 능력이 젬병이거나!
물론 행복이 물질 조건과 무관한 건 아니다. 적당한 물적 토대 없이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물적 토대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행복의 능력”도 중요하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능력이다. 행복의 능력이 있으면 초가삼간에서 살아도 행복하지만, 행복의 능력이 없으면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불행하다.
예술가가 하찮고 평범한 사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고, 시인이 사소해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삶의 진실을 통찰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행복의 능력이 발달한 사람은 사소하고 하찮고 평범해 보이는 환경에서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린이들이 그런 존재다. 어린이들은 모든 상황에서 재미와 행복을 만들어낸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행복의 능력이 뛰어나다.
영적 여정이란 잃어버린 행복의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늘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녔고, 감옥에 가뒀으며,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으며”(행 9:1),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행 8:13) 이런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잃어버린 행복의 능력을 되찾았고,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1-12)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사도 바울의 행복지수는 최대치로 올라갔다. 그의 배후에는 행복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행복의 최소치
요즘 사람들은 옛날의 왕도 경험하지 못한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행복하지가 않다. 2018~2020년 대한민국의 평균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85점에 불과하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지만 삶의 만족도는 OECD 37개국에서 35등으로 거의 꼴찌다. 체코(6.97), 멕시코(6.32), 칠레(6.17)보다도 낮다.
왜 이럴까? 대한민국의 불행한 삶의 풍경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역사적・국가적 재난이 백 년 넘게 뒤엉켜 만들어낸 풍경이다. 모든 인간에겐 생존/안전, 인정/존중, 권력/통제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가 있어서 성장이 가능하다. 유아기에 본능적인 욕구를 충분히 채운다면 성인이 됐을 때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본능적 욕구에서 비교적 자유롭기에 삶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줄 알고, 다양한 차원에서 행복을 창조하고 향유할 줄 안다.
하지만 한국처럼 일제식민통치나 6.25전쟁 같은 비극적 상황을 겪게 되면 인정 욕구와 권력 욕구는 둘째 치고 생존/안전 욕구를 거의 충족하지 못한다. 허구한 날 배를 곯고 거처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의 결핍과 살 곳의 결핍, 즉 밥과 집의 결핍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그 결핍의 고통은 무의식에 트라우마로 남는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핍의 고통을 보상하려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토머스 키팅이 말하는 “정서적 행복프로그램”(Emotional Program for Happiness: EPH)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지난날의 생활방식”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엡 4:22)이다. 행복프로그램은 거짓자아를 강화하고, 구습은 옛사람을 강화한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에고”는 이렇게 출현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핍의 고통을 보상하려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토머스 키팅이 말하는 “정서적 행복프로그램”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엡 4:22)이다.
한국인들의 집단무의식에는 생존/안전 욕구를 실현하지 못한 결핍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 트라우마는 자녀 세대로 이어지고 대대로 대물림한다. 그래서 온 나라가 먹는 것에 집착하고, 온 세대가 집을 소유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러는 동안 삶의 다양한 행복의 가능성에 눈이 멀고,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의 능력은 퇴화한다. 하지만 돈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해도 삶은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유 1:12) 같고, “길 잃고 떠도는 별들”(유 1:13) 같다. 그처럼 황폐하고 그처럼 공허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행복의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돈이 많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행복감을 높여준다. 돈의 힘이나 성공의 기쁨을 무시한다면 위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시적 행복을 줄지는 몰라도 행복의 능력을 길러주진 않는다.
돈과 성공으로 행복하려면 돈과 성공이 계속 주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돈은 가질수록 더 갖고 싶고 성공은 이룰수록 더 이루고 싶다. 결핍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돈과 성공으로 행복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뿐 아니다. 소유와 성공은 또 다른 열등감의 시작이기도 하다.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나보다 더 높이 성공한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돈과 성공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니라 언제나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나의 소유는 타자의 박탈을 바탕으로 한 소유이며, 나의 성공은 타자의 실패를 바탕으로 한 성공이다. 나의 우월감은 타자의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우월감이며, 나의 행복은 타자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 행복이다.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내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울어야 한다. 그러한 행복마저도 지속이 불가능하다. 행복은 일시적인 욕망충족에 불과하니까.
행복의 최대치
삶의 외적 조건을 초월한 항구적인 행복의 길은 없을까? 시편 시인은 그 비결을 알고 있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시 89:15) 동일한 삶의 조건에서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그런 능력이 마비된 사람이 있다. 삶을 축제처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형벌처럼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사람, 삶을 축제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이 행복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바울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 행복의 능력이 뛰어나 매일 축제의 함성을 외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시편 시인이 노래하는 대로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시 89:15)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삶의 모든 조건에서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알며, 모든 날을 잔칫날로 살아간다. 하므로 행복의 관건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이다. 하여, 그 얼굴을 찾는 게 항구한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러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높은 하늘? 깊은 바다? 심산유곡? 아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다. 거짓자아 너머의 참자아 말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는 은총이 나온다. 그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천상의 에너지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다. 거짓자아 너머의 참자아 말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는 은총이 나온다. 그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천상의 에너지다.
사람들은 페르소나(사회적 자아)가 자기인 줄 안다. 사회적 역할과 기능 곧 직업이 자기인 줄 안다. 명함에 박은 직함이나 이력서에 적은 경력이 자기의 전부인 줄 안다. 그래서 남보다 뛰어난 역할과 기능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남보다 눈에 띄는 직함을 갖고 화려한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성공하면 우쭐하고 실패하면 주눅 든다.
그렇기에 형벌 같은 비교와 경쟁의 뫼비우스 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욕망을 동력으로 한 행복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구습 곧 “지난 날의 생활방식”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긴장과 스트레스는 만성 질병처럼 몸과 마음을 결박한다. 열등감과 우월감, 성취감과 패배감 사이를 천국과 지옥 오가듯 오락가락한다. 행복지수는 차츰 떨어지고, 행복의 능력은 시나브로 퇴화한다. 삶의 외적 조건이 나날이 좋아져도 행복은 최소치로만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자각할 때 삶에서는 혁명이 일어난다. 페르소나와 관련된 비교와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행복프로그램과 지난 날의 생활방식(구습)에서도 벗어난다. 비교와 경쟁이 초래한 마음의 긴장과 몸의 경직에서 해방된다. 반복되는 실패로 인한 열등감과 알량한 성공으로 인한 우월감도 사라진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에고의 감옥에서 해방하여 불행의 사슬을 단박에 끊어버린다.
이처럼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또 외면뿐 아니라 내면, 표면뿐 아니라 이면, 표층뿐 아니라 심층, 세속뿐 아니라 신성을 보게 한다. 내면과 이면, 심층과 신성에서 쏟아지는 은총은 행복의 강물이 되어 삶의 구석구석을 적신다.
또 다른 나
이뿐 아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깨달으면 타인도 새로워 보인다. 타인은 더 이상 나의 성공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니다. 나의 성공을 위해 쓰러뜨리거나 짓밟아야 하는 적도 아니다. 그는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other me)이다.
“인라케시 알라킨”이라는 말이 있다. 마야 문명이 인류에게 선물한 아름다운 인사말이다. 마야 원주민들은 함께 모일 때 누군가 “인라케시!”라고 외치면, 모두 “알라킨!” 하고 응답한다. “나는 너”라는 말에 “너는 나”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타자를 “또 다른 나”로 인식하는 관계의 기쁨은 행복프로그램이 형성한 거짓자아나 구습이 만들어낸 옛사람 차원에서는 맛보지 못한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기쁨이다.
타자를 “또 다른 나”로 인식하는 관계의 기쁨은 행복프로그램이 형성한 거짓자아나 구습이 만들어낸 옛사람 차원에서는 맛보지 못한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기쁨이다.
야곱이 이러한 경험을 들려준다. 얍복강에서 자신의 빛나는 얼굴을 자각했을 때 야곱은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었던 형 에서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창 33:10) 형은 더 이상 자기를 죽이려는 무서운 적이 아니었다. 복을 빼앗아야 하는 경쟁자도 아니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너였으며, “또 다른 나”였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은 자기인식의 혁명일 뿐 아니라, 참된 공동체의 기초이기도 하다. 타인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만큼 공동체를 결속하는 것은 없다.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조직력도 이념도 아니다. 타자를 주님의 얼굴(하나님의 형상, 참자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레비나스)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기초로 한 공동체에서는 에고의 죽음과 거짓자아의 해체에서 나오는 신성한 에너지가 흐른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공동체를 생기있게 만든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배려가 있고 환대가 있다.
이러한 주님의 빛나는 얼굴 곧 참자아를 기초로 한 공동체에서는 에고의 죽음과 거짓자아의 해체에서 나오는 신성한 에너지가 흐른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공동체를 생기있게 만든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배려가 있고 환대가 있다. 환희가 넘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참자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기쁨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공동체,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총이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인한 행복은 영원하다. “태양처럼, 저 달처럼, 구름 속에 있는 진실한 증인처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시 89:37)
-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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