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당신이 성사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74회 작성일 23-03-14 14:32본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 5:14)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사 32:8)
요즘 사람들은 사람을 뭘로 볼까? 정치인들은 사람을 표로 본다. 사람을 표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표를 얻기 전에는 굽신거리며 알랑거려도 표를 얻어 목적을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기업인들은 사람을 뭘로 볼까? 그들은 사람을 돈으로 본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으려고 헛된 희망을 약속한다면, 기업인들은 돈을 벌려고 헛된 만족을 약속한다. 하지만 돈을 벌고 나면 돈을 벌게 해준 사람들을 개・돼지 대하듯 한다.
사람 보는 법
기독교는 사람을 뭘로 볼까? 기독교는 사람을 빛으로 본다. 예수님은 사람을 빛으로 보라고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언제나 사람을 죄인으로만, 어둠의 자식으로만 보려고 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 5:8) 이처럼 기독교는 사람을 빛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종교다.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부모를 죄인이 아니라 빛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종교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도 많고 어둠도 짙고 우울도 깊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실오라기 만한 빛이라도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연민과 사랑, 배려와 포용, 미소와 유머, 발랄과 유쾌 같은 아름다운 존재의 빛이 있다. 우리는 그걸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족같이 삶의 운명이 된 사람은 실망과 원망 속에서도 서로의 빛을 보는 연습을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련 파트너다.
누구에게나 연민과 사랑, 배려와 포용, 미소와 유머, 발랄과 유쾌 같은 아름다운 존재의 빛이 있다. 우리는 그걸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족같이 삶의 운명이 된 사람은 실망과 원망 속에서도 서로의 빛을 보는 연습을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련 파트너다.
빛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요일 1:5)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십니다.”(딤전 6:16) 따라서 사람을 빛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급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처럼 고귀하게 여기라는 뜻이겠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이루어질 일을 이렇게 예언한다.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사 32:1) 그때의 통치자는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오만한 통치자와 격과 향이 다르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사 32:3) 눈과 귀가 막힌 불통의 통치자가 아니라 눈과 귀가 열린 소통의 통치자다.
그뿐 아니다. 그때에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아간다.”(사 32:8) 메시아 왕국은 바로 이런 나라다. 고귀한 사람이 고귀한 일을 계획하는 나라, 그리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아가는 나라!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인간의 고귀함을 꿈꾸는 절기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어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고귀한 뜻을 펼치겠다고 다짐하는 절기다.
성 패트릭의 기도
사람을 빛으로 보고, 하나님급으로 보고, 고귀하게 본다는 것은 사람을 “성사(聖事)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물도 성사가 될 수 있지만 사람처럼 고귀한 성사는 없다. 사람은 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빛으로 보려면 사람을 성사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성 패트릭의 기도에서 사람을 성사로 보는 법을 배운다.
4세기 아일랜드의 성인인 성 패트릭은 그리스도가 “내 앞에 계시며, 내 뒤에도 계시며, 내 안에도 계시며, 내 아래에도 계시며, 내 위에도 계시며, 내 오른쪽과 왼쪽에도 계시며, 내가 누울 때나, 앉을 때나, 일어날 때도 나와 함께 계신다”고 기도하다가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 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모든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모든 귀 속에도 계십니다.
성인은 자기를 생각하는 이들의 가슴에 계신 그리스도를 느낀다. 만일 내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그리스도를 느낀다면 냉랭하기만 한 나의 가슴은 얼마나 따뜻해질까?
성인은 자기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입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차린다. 만일 내가, 나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스도를 알아차린다면 고함 지르던 나의 입은 얼마나 부드러워질까?
성인은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만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면 살기 띤 나의 시선은 얼마나 자애로워질까?
성인은 자기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귓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만일 내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경청하지 못하고 선택적으로 듣는 나의 귀는 얼마나 겸허해질까?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님,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느끼는 영적 감각을 열어주소서.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신성한 감수성을 깨워주소서.
나를 바라보는 모든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속사람의 눈을 열어주소서.
내 말을 듣는 모든 귓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듣는 참자아의 청각을 열어주소서.
만수에토 선생님
사람이 성사가 될 수 있음을 나는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가 쓴 『성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알았다. 그 책은 만수에토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만수에토 선생님은 브라질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영웅이었고 현자였으며, 이상・극기・겸허・사랑・지혜의 대명사였다. 추상적인 본질 가치들을 인격적으로 형상화하고 구체화한 사람이었다. “마치 늘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메마른 초원에 우뚝 솟아 있듯이 그이는 온 고을에서 유난히도 빼어난 인물이었다.”
만수에토 선생님은 이상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었다. 신학과 인문과학뿐 아니라 경리에도 능통하고 법률도 통달했다. 라틴어 고전들을 원서로 읽었고, 스피노자・헤겔・다윈 같은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그는 2천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마을 사람들이 마음껏 읽게 했다. 학교에서 오전과 오후에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저녁에는 마을 어른들을 가르쳤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이미 한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기초 낱말들을 가르쳤고, 언어학적 기초 개념들을 전수했다. 생태학의 기본 개념, 임대차 관계, 토지 측량, 시민생활과 법제도, 주택 건축의 주요 법규, 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일 등 범위도 다양했다.
라디오가 처음 나왔을 때 그는 여러 대를 구입하여 마을 곳곳에 접속시켰다. 마을 사람들의 교양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는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페니실린이 나왔을 때는 의사들마저 포기한 생명들을 여럿 구하기도 했다. 그는 백인들에게 천대받던 혼혈아들과 흑인들의 변호사 노릇도 했다.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하늘에는 하나님, 땅에는 만수에토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과로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것도 마을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지에서. 마을 사람들은 유해를 마을로 모셔왔다. 만수에토 선생님은 동료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인간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구현한 성사였다.
가혹한 운명과 씨름하는 사람의 성사
레오나르도 보프가 성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만수에토 선생님은 우리가 보기에도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처럼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사람만 성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도 성사는 많다.
얼마 전에 안골교회에서 보내온 풍선초 꽃씨를 벗들과 나눴다. 나는 안골교회 서영수 목사님과 김진희 목사님을 볼 때마다 그분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느낀다. 운명은 서 목사님께 가혹했다. 두 번이나 뇌출혈로 쓰러뜨렸다. 하던 목회도 그만두게 했다. 몸의 마비는 말할 것도 없고, 청각도 언어도 빼앗았다. 그의 생은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인 삶이다. 천형(天刑) 같은 운명을 버티는 게 소명이 돼버렸다. 정말 그 어떤 목회보다 감당하기 힘든 소명이다.
목회는 사모님인 김진희 목사가 떠맡았다. 가사를 책임지고, 남편의 손발이 되면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진희 목사님은 그러한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 상황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구고 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도 웃음을 잃는 법이 없다.
서 목사님의 인생과 김 목사님의 목회를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는 것 같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 사사건건 괴롭히던 마을 사람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의 마음도 녹이셨다. 그렇게 그이들은 성사가 되어있었다.
한 여자가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도망치듯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신혼의 단꿈은 물거품이 됐고, 말도 통하지 않는 황량한 광야에 내동댕이쳐졌다.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남편이 변호사가 되겠다며 허세를 부리는 통에 네 식구의 생계는 여자가 도맡아야 했다. 밤낮없이 닥치는 대로 일해도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다. 얼마 후엔 시부모님과 시댁 식구들까지 이민을 왔다. 네 식구 살기도 좁은 집에서 열 명 가까이 살아야 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그 여자뿐이었다.
피로가 겹겹이 쌓인 몸을 이끌고 귀가한 어느 날, 집안은 텅 비어 있었고 두 아이는 울고 있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볼 수 없었다. 여자와 두 아이만 남기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여자는 버림받은 운명의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죽으려고도 했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럴 수도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삶은 스산했다. 집세를 내지 못해 전기와 상수도가 끊어졌을 때는 집 근처 카페에서 세면을 했고 언 몸을 녹였다.
그 여자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죽고 싶을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고, 그렇게 이십 년을 버텼다. 직장에선 성실했고, 아들들에겐 버팀목이 돼주었다. 살림은 조금씩 안정됐고, 아들들은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다. 세월이 흘러 여자는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자격증도 땄다. 좀 더 번듯한 직장도 얻었다.
이십 대 꽃다울 때 보았던 그 여자는 오십 대 중반이 되어있었다. 이야기 고비마다 울 법도 했는데 여자는 울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남 얘기하듯 말하냐고 했더니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하도 울어서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고. 여자가 산처럼 보였다. 도인 같기도 했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여자와 함께 신산스러운 운명을 겪으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 여자는 성사였다.
보통사람의 성사
만수에토 선생님도 성사고, 서영수・김진희 목사님도 성사고, 그 여자도 성사지만, 이 외에도 성사는 많다. 전신이 마비된 남편을 삼십삼 년 섬긴 길벗도 성사고, 비슷한 분량의 세월 동안 쓰러진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길벗도 성사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어떻게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떻게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가혹한 운명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성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사람이 성사다. 생계를 위해 자존심 꺾는 길벗, 직장생활과 육아의 수고를 묵묵히 감수하는 길벗, 가난하면서도 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길벗, 복음이 가르쳐준 이념을 평생 추구하다가 머리에 흰서리 앉은 길벗, 자기와의 싸움에서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진실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길벗, 낯설고도 낯선 관상 여정을 함께 걸어온 길벗 등, 이 모든 사람이 나에게는 성사요 세상의 빛이다. 그들의 삶을 관상하다 보면 한 번 더 인내하게 하는 참자아가 보이고, 한 번 더 참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보이고, 한 번 더 일어나게 하시는 성령이 보이고, 한 번 더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벗들, 그대가 바로 성사다. 그대가 빛이요 고귀한 사람이다. 하니, 기도할 때마다 연습하자.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사람들을 성사로 보는 연습을, 하나님이 함께 살게 하신 사람들을 빛으로 보는 연습을. 죄와 허물을 보기 전에 고귀함을 먼저 보는 연습을.
하여, 마음속에서는 고귀한 생각이 싹트고, 관계 속에서는 고귀한 사랑이 꽃피고, 삶 속에서는 고귀한 정의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산다.”(사 32:8)
- 이민재
(마 5:14)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사 32:8)
요즘 사람들은 사람을 뭘로 볼까? 정치인들은 사람을 표로 본다. 사람을 표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표를 얻기 전에는 굽신거리며 알랑거려도 표를 얻어 목적을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기업인들은 사람을 뭘로 볼까? 그들은 사람을 돈으로 본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으려고 헛된 희망을 약속한다면, 기업인들은 돈을 벌려고 헛된 만족을 약속한다. 하지만 돈을 벌고 나면 돈을 벌게 해준 사람들을 개・돼지 대하듯 한다.
사람 보는 법
기독교는 사람을 뭘로 볼까? 기독교는 사람을 빛으로 본다. 예수님은 사람을 빛으로 보라고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언제나 사람을 죄인으로만, 어둠의 자식으로만 보려고 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 5:8) 이처럼 기독교는 사람을 빛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종교다.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부모를 죄인이 아니라 빛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종교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도 많고 어둠도 짙고 우울도 깊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실오라기 만한 빛이라도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연민과 사랑, 배려와 포용, 미소와 유머, 발랄과 유쾌 같은 아름다운 존재의 빛이 있다. 우리는 그걸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족같이 삶의 운명이 된 사람은 실망과 원망 속에서도 서로의 빛을 보는 연습을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련 파트너다.
누구에게나 연민과 사랑, 배려와 포용, 미소와 유머, 발랄과 유쾌 같은 아름다운 존재의 빛이 있다. 우리는 그걸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족같이 삶의 운명이 된 사람은 실망과 원망 속에서도 서로의 빛을 보는 연습을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련 파트너다.
빛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요일 1:5)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십니다.”(딤전 6:16) 따라서 사람을 빛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급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처럼 고귀하게 여기라는 뜻이겠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이루어질 일을 이렇게 예언한다.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사 32:1) 그때의 통치자는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오만한 통치자와 격과 향이 다르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사 32:3) 눈과 귀가 막힌 불통의 통치자가 아니라 눈과 귀가 열린 소통의 통치자다.
그뿐 아니다. 그때에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아간다.”(사 32:8) 메시아 왕국은 바로 이런 나라다. 고귀한 사람이 고귀한 일을 계획하는 나라, 그리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살아가는 나라!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인간의 고귀함을 꿈꾸는 절기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어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고귀한 뜻을 펼치겠다고 다짐하는 절기다.
성 패트릭의 기도
사람을 빛으로 보고, 하나님급으로 보고, 고귀하게 본다는 것은 사람을 “성사(聖事)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물도 성사가 될 수 있지만 사람처럼 고귀한 성사는 없다. 사람은 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빛으로 보려면 사람을 성사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성 패트릭의 기도에서 사람을 성사로 보는 법을 배운다.
4세기 아일랜드의 성인인 성 패트릭은 그리스도가 “내 앞에 계시며, 내 뒤에도 계시며, 내 안에도 계시며, 내 아래에도 계시며, 내 위에도 계시며, 내 오른쪽과 왼쪽에도 계시며, 내가 누울 때나, 앉을 때나, 일어날 때도 나와 함께 계신다”고 기도하다가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 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모든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모든 귀 속에도 계십니다.
성인은 자기를 생각하는 이들의 가슴에 계신 그리스도를 느낀다. 만일 내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그리스도를 느낀다면 냉랭하기만 한 나의 가슴은 얼마나 따뜻해질까?
성인은 자기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입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차린다. 만일 내가, 나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스도를 알아차린다면 고함 지르던 나의 입은 얼마나 부드러워질까?
성인은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만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면 살기 띤 나의 시선은 얼마나 자애로워질까?
성인은 자기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귓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만일 내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경청하지 못하고 선택적으로 듣는 나의 귀는 얼마나 겸허해질까?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님,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느끼는 영적 감각을 열어주소서.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신성한 감수성을 깨워주소서.
나를 바라보는 모든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속사람의 눈을 열어주소서.
내 말을 듣는 모든 귓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듣는 참자아의 청각을 열어주소서.
만수에토 선생님
사람이 성사가 될 수 있음을 나는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가 쓴 『성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알았다. 그 책은 만수에토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만수에토 선생님은 브라질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영웅이었고 현자였으며, 이상・극기・겸허・사랑・지혜의 대명사였다. 추상적인 본질 가치들을 인격적으로 형상화하고 구체화한 사람이었다. “마치 늘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메마른 초원에 우뚝 솟아 있듯이 그이는 온 고을에서 유난히도 빼어난 인물이었다.”
만수에토 선생님은 이상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었다. 신학과 인문과학뿐 아니라 경리에도 능통하고 법률도 통달했다. 라틴어 고전들을 원서로 읽었고, 스피노자・헤겔・다윈 같은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그는 2천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마을 사람들이 마음껏 읽게 했다. 학교에서 오전과 오후에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저녁에는 마을 어른들을 가르쳤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이미 한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기초 낱말들을 가르쳤고, 언어학적 기초 개념들을 전수했다. 생태학의 기본 개념, 임대차 관계, 토지 측량, 시민생활과 법제도, 주택 건축의 주요 법규, 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일 등 범위도 다양했다.
라디오가 처음 나왔을 때 그는 여러 대를 구입하여 마을 곳곳에 접속시켰다. 마을 사람들의 교양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는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페니실린이 나왔을 때는 의사들마저 포기한 생명들을 여럿 구하기도 했다. 그는 백인들에게 천대받던 혼혈아들과 흑인들의 변호사 노릇도 했다.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하늘에는 하나님, 땅에는 만수에토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과로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것도 마을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지에서. 마을 사람들은 유해를 마을로 모셔왔다. 만수에토 선생님은 동료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인간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구현한 성사였다.
가혹한 운명과 씨름하는 사람의 성사
레오나르도 보프가 성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만수에토 선생님은 우리가 보기에도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처럼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사람만 성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도 성사는 많다.
얼마 전에 안골교회에서 보내온 풍선초 꽃씨를 벗들과 나눴다. 나는 안골교회 서영수 목사님과 김진희 목사님을 볼 때마다 그분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느낀다. 운명은 서 목사님께 가혹했다. 두 번이나 뇌출혈로 쓰러뜨렸다. 하던 목회도 그만두게 했다. 몸의 마비는 말할 것도 없고, 청각도 언어도 빼앗았다. 그의 생은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인 삶이다. 천형(天刑) 같은 운명을 버티는 게 소명이 돼버렸다. 정말 그 어떤 목회보다 감당하기 힘든 소명이다.
목회는 사모님인 김진희 목사가 떠맡았다. 가사를 책임지고, 남편의 손발이 되면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진희 목사님은 그러한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 상황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구고 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도 웃음을 잃는 법이 없다.
서 목사님의 인생과 김 목사님의 목회를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는 것 같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 사사건건 괴롭히던 마을 사람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의 마음도 녹이셨다. 그렇게 그이들은 성사가 되어있었다.
한 여자가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도망치듯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신혼의 단꿈은 물거품이 됐고, 말도 통하지 않는 황량한 광야에 내동댕이쳐졌다.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남편이 변호사가 되겠다며 허세를 부리는 통에 네 식구의 생계는 여자가 도맡아야 했다. 밤낮없이 닥치는 대로 일해도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다. 얼마 후엔 시부모님과 시댁 식구들까지 이민을 왔다. 네 식구 살기도 좁은 집에서 열 명 가까이 살아야 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그 여자뿐이었다.
피로가 겹겹이 쌓인 몸을 이끌고 귀가한 어느 날, 집안은 텅 비어 있었고 두 아이는 울고 있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볼 수 없었다. 여자와 두 아이만 남기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여자는 버림받은 운명의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죽으려고도 했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럴 수도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삶은 스산했다. 집세를 내지 못해 전기와 상수도가 끊어졌을 때는 집 근처 카페에서 세면을 했고 언 몸을 녹였다.
그 여자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죽고 싶을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고, 그렇게 이십 년을 버텼다. 직장에선 성실했고, 아들들에겐 버팀목이 돼주었다. 살림은 조금씩 안정됐고, 아들들은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다. 세월이 흘러 여자는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자격증도 땄다. 좀 더 번듯한 직장도 얻었다.
이십 대 꽃다울 때 보았던 그 여자는 오십 대 중반이 되어있었다. 이야기 고비마다 울 법도 했는데 여자는 울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남 얘기하듯 말하냐고 했더니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하도 울어서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고. 여자가 산처럼 보였다. 도인 같기도 했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여자와 함께 신산스러운 운명을 겪으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 여자는 성사였다.
보통사람의 성사
만수에토 선생님도 성사고, 서영수・김진희 목사님도 성사고, 그 여자도 성사지만, 이 외에도 성사는 많다. 전신이 마비된 남편을 삼십삼 년 섬긴 길벗도 성사고, 비슷한 분량의 세월 동안 쓰러진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길벗도 성사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어떻게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떻게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가혹한 운명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성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사람이 성사다. 생계를 위해 자존심 꺾는 길벗, 직장생활과 육아의 수고를 묵묵히 감수하는 길벗, 가난하면서도 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길벗, 복음이 가르쳐준 이념을 평생 추구하다가 머리에 흰서리 앉은 길벗, 자기와의 싸움에서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진실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길벗, 낯설고도 낯선 관상 여정을 함께 걸어온 길벗 등, 이 모든 사람이 나에게는 성사요 세상의 빛이다. 그들의 삶을 관상하다 보면 한 번 더 인내하게 하는 참자아가 보이고, 한 번 더 참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보이고, 한 번 더 일어나게 하시는 성령이 보이고, 한 번 더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벗들, 그대가 바로 성사다. 그대가 빛이요 고귀한 사람이다. 하니, 기도할 때마다 연습하자.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사람들을 성사로 보는 연습을, 하나님이 함께 살게 하신 사람들을 빛으로 보는 연습을. 죄와 허물을 보기 전에 고귀함을 먼저 보는 연습을.
하여, 마음속에서는 고귀한 생각이 싹트고, 관계 속에서는 고귀한 사랑이 꽃피고, 삶 속에서는 고귀한 정의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산다.”(사 32:8)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