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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저주시편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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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02회 작성일 23-03-1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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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에게 멸망이 순식간에 닥치게 하시고,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서 스스로 멸망하게 해주십시오
(시편 35:7)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주님이 기억하시고,
그의 어머니가 지은 죄도
지워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들의 죄가
늘 주님에게 거슬리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잊게 하여 주십시오.
(시편 109:14-15)


새벽기도회 때 시편 35편을 묵상하는데 한 길벗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 시편은 읽기가 좀 거북해요.” 

시편 35편은 이런 기도로 시작한다. “주님,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워주십시오.”(1절) 뭐, 크게 문제 삼을 대목은 아니다.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는 기도는 자연스럽다. 다음에 이어지는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와주십시오”(2절)라는 기도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도다. 

하지만 기도가 계속될수록 시인의 언어는 과격해진다. “나를 해치려는 자들도 뒤로 물러나 수치를 당하게 하여 주십시오.”(4절) “그들이 가는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어 천사가 그들을 추격하게 해주십시오.”(6절) 급기야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망하게 해달라는 속내를 기도에 담는다. “저 사람들에게 멸망이 순식간에 닥치게 하시고,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서 스스로 멸망하게 해주십시오.”(7절) 

시인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저주에 가깝다. 이렇게 기도해도 되는 걸까?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 4:31-5:1) 이런 말씀과 시편의 기도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저주시편
시편 35편은 탄식시에 속한다. 그런데 시편 연구가들은 시편 35편처럼 분노와 복수심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시편들을 별도로 묶어 “저주시편”(cursing psalms)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35편 외에도 시편 58편, 59편, 69편, 83편, 109편, 137편, 140편이 저주시편에 해당한다. 시편 58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그들의 이빨을 그 입 안에서 부러뜨려주십시오. 그들을 급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달을 채우지 못한 미숙아가 죽어서 나와 햇빛을 못 보는 것 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악인의 피로 발을 씻게 해주십시오.”(시 58:6-10) “미숙아…” 운운 하는 것과 “악인의 피로 발을…” 어쩌고 하는 표현은 입에 올리기에 참으로 거북하다. 

137편은 잔인하다.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시 137:8) 아무리 복수심에 사무쳤어도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 메어친다는 표현은 끔찍하다. 

하지만 이 모든 저주시편을 합한 것보다 거친 감정과 악랄한 복수심을 드러내는 시편이 109편이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선을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들은 거짓말로 비난하고”, “미움으로 가득 찬 말을 퍼붓는다.” “이유도 없이 맹렬하게 공격한다.” 시인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건만, 그들은 시인을 “고발한다.”(2-5절)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절규 같은 기도를 쏟아낸다. 

시인은 먼저 재판상황을 상상하며 악마(악인)가 그와 맞서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유죄 판결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혹여 상대도 하나님께 기도할지 모르므로 “그가 하는 기도는 죄가 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증오의 폭포는 상대의 수명과 직업에 대한 저주로 변한다.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8절) 가족들도 저주의 화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9-10절)
재산도 예외가 아니다. “빚쟁이가 그 재산을 모두 가져가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재산을 모두 약탈하게 하십시오. 그에게 사랑을 베풀 사람이 없게 하시고, 그 고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자도 없게 하십시오.”(11-12절) 시인의 저주는 후대에까지 이른다. “자손도 끊어지고,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이름까지도 지워지게 하십시오.”(13절) 시인은 저주의 대열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인다.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주님이 기억하시고,
그의 어머니가 지은 죄도 지워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들의 죄가 늘 주님에게 거슬리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잊게 하여 주십시오.”(14-15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로부터 그런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시인은 자기가 그런 기도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것은 그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도리어 가난하고 빈곤한 자를 괴롭히며, 마음이 상한 자를 못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6절) 이유를 밝힌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시인은 저주를 그만 둘 생각이 없다. 시인의 저주는 치열하고 철저하다. 아예 끝장을 보려는 것 같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저주가 그에게 내리게 하십시오.
축복하기를 싫어하였으니,
복이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십시오.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였으니,
저주가 물처럼 그의 뱃속까지 스며들고,
기름처럼 그 뱃속에까지 배어들게 하십시오.
그 저주가 그에게는 언제나
입은 옷과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십시오.”(17-19절)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도를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이런 기도를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성스러워야 할 경전에 이런 기도가 있으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통찰1, 대화상대
저주시편을 처음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놀란다.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것이 신앙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의 분출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주시편은 심리・영성적 치유와 관련하여 깊은 통찰을 몇 가지 보여준다.   

첫째, 저주시편을 이해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시인의 대화상대다. 시인이 악성감정과 독설을 퍼붓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것은 시인을 괴롭히는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감정이나 독설은 성격이 달라진다. 사람을 향할 때는 “저주”가 되지만, 하나님을 향할 때는 “절규”가 되는 것이다. 저주가 타자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다면 절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이처럼 저주와 절규의 바탕은 완전히 다르다. 이때 절규는 기도가 된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분노・억울함・복수심으로 들끓는 마음을 기도의 형식을 통해 하나님께 토해낸다. 그러는 사이에 시인의 내면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된다. 이것이 존재가 새로워지는 영적 연금술의 시작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이 반대로 한다. 하나님께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과 없이 쏟아낸다. 그 대상은 대개 가까운 사람이거나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솔직성은 양면의 칼이다. 자신의 거짓과 위선을 고백하는 용기일 때는 미덕이지만, 남에게 감정이나 독설을 쏟아내는 무분별일 때는 악덕이다. 감정과 욕망의 솔직성이 가해자에겐 자기합리화의 기술일지 몰라도 피해자에겐 평생 헤어나지 못할 상처의 원인이 된다. 부모・교사・상사・성직자 등 권위 있는 사람들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솔직성 때문에 평생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솔직성을 빙자하여 속생각과 속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다면 세상은 금세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감정에 솔직해도 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절제할수록 좋다. 하나님 앞에서는 발가벗어야 한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옷을 입어야 한다. 범죄한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창 3:7) 그들이 에덴에서 쫓겨날 때도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창 3:21) 이때 옷은 위선의 상징이 아니라 은총의 상징이었다.



통찰2, 감정봉헌
둘째, 자신의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억누르라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내면의 감정을, 특히 부정적이거나 악한 감정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신실한 신앙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나쁜 감정이나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여움을 품는 것은 “악마에게 틈을 주는 것”(엡 4:27) 것이다.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란 신앙인이라면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마다 억압하기 마련이다. 억압뿐일까. 그것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기도 하고, 아예 부정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억압・외면・회피・부정・무시 같은 방어기제야말로 거짓과 위선의 온상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마음이 병든다. 

마음이 병들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첫째,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감도 자긍심도 사라진다. 타인과 습관적으로 비교하면서 열등감과 패배감, 무기력에 사로잡힌다. 둘째, 자신과의 관계는 그대로 타인에게 투사된다. 자신의 소중함을 모르니 타인의 소중함도 모른다. 당연히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지 못하며, 타인과의 공감능력도 무뎌진다. 

이뿐 아니다. 마음이 병들면 사물들에 대한 성사적 감각도 퇴화한다. 사물들은 하나님 현시(顯示)의 통로이기를 멈춘다. 신성의 빛을 잃은 세계는 죽어있는 물질계일 뿐이다.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다.
이뿐 아니다. 마음이 병들면 사물들에 대한 성사적 감각도 퇴화한다. 사물들은 하나님 현시(顯示)의 통로이기를 멈춘다. 신성의 빛을 잃은 세계는 죽어있는 물질계일 뿐이다.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다.
저주시편의 시인은 분노・화・억울함・복수심 같이 인간 내면에 있는 어둡고 악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갔다. 하나님께 가져가는 순간 부정적인 감정을 대하는 태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봉헌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가져갔다는 것은 자기의 감정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대면했고, 그것을 존중했기에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갔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지도, 회피하지도, 외면하지도, 부정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감정봉헌”이다. 

감정봉헌, 이것은 내면을 향한 여정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감정봉헌을 통해 시인을 괴롭혔던 감정들, 혼자 끙끙대며 처리하지 못하던 쓰레기 같은 감정들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하나님의 창조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맡겨진 것을 재료로, 그것이 진흙이든 쓰레기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실 것이다. 그 과정을 우리는 잘 모른다. 오롯이 하나님께 속한 신비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침묵 속에서 고요히 기다리는 것뿐. 하지만 하나님은 진흙탕 속에서 연꽃을, 쓰레기더미에서 장미를 피워내실 것이다.



통찰3, 새 존재
셋째, 하나님이 악성감정이라는 쓰레기더미에서 피워낸 장미꽃을,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새 창조를 시편은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입을 열어서 주님께 크게 감사드리며,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련다.”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나를 고발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해주시려고, 주님께서는 이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시 109:31) 갑자기 시인의 언어가 달라졌다. 독설과 저주의 음험한 기운은 사라지고 감사와 찬양의 향기가 진동한다. 그래서 새창조다! 

시편 35편 시인도 마찬가지다. 원수들 때문에 못살겠다고 절규하던 시인은 갑자기 찬양을 다짐한다. “내 혀로 주님의 의를 선포하겠습니다. 온종일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시 35:28)  분위기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섰고,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그것도 어둡고 악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봉헌했을 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시인은 정화되었고, 존재의 새로운 차원을 접했던 것 같다. 우리가 참자아라고 말하는 존재의 본질현상을 경험한 것 같고, 그 배후요 바탕이신 드넓고 광대한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 같다. 그 품에서 고요히 쉬면서 시인은 조금씩 새로운 존재로 빚어졌을 것이다.   

저주시편은 이처럼 우리에게 따뜻한 하나님을 소개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며, 두려움 속에서 떨지도 않는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죄를 캐는 경찰관도 아니고, 선악을 따지고 상벌을 정하는 재판관도 아니며, 각종 사건・사고를 일으켜 복수하는 암흑가의 보스도 아니다. 시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품에 안겨 응석 부릴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런 하나님이 바로 시편 131편 시인이 노래하는 “엄마” 하나님이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시 131:2) 이런 하나님을 예수님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마 12:20) 하나님은 이처럼 따뜻한 사랑의 품이다. 그 품을 신뢰하고 그 품에 안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하니 벗들, 혼자 애쓰지 말라. 고단한 운명이 그대들에게 남긴 아픔, 상처, 어둠, 분노, 억울함, 복수심 따위 그 어떤 불순한 감정도 가슴속에 묻어두지 말라. 아무리 쓰레기 같아 보여도 그대들의 존재 현상의 일부이니 연민을 품고 소중하게 대하라.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토해내고,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봉헌하라. 하나님은 벗들의 감정을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판단이라니, 오히려 그런 감정으로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벗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시면서 함께 아파하실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관상하면서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자. 따뜻한 하나님의 품이 진흙 속에서 연꽃을,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 한 송이 피워내도록.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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