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애도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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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54회 작성일 23-03-14 14:28본문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마 25:40)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일주일 내내 나는 애도과 감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정부는 지난 한 주간을 이태원참사 희생자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는데 공교롭게도 은명교회는 이번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 때문이다. 슬픔 속에서 감사절을 준비하는 마음이 곤혹스러웠다. 애도할 일은 감사할 일이 아니며, 감사할 일은 애도할 일이 아닌 까닭이다. 애도와 감사는 물과 기름 같이 버성겼다.
감사를 주제로 한 설교도 그랬지만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부모로서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렴풋이라도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슬픔보다 우선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사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아내를 통해서였다. 주일 새벽까지 설교문을 수정하고 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씻으려던 참이었다. 이태원 할로윈축제에서 백오십 명이 죽었대.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그럴 리가 있나, 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사상자를 사망자로 잘못 읽었겠지….
하지만 내 눈으로 기사를 확인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런 참담한 일이 또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삼백네 명의 꽃 같은 아이들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것도 새 정부 들어선 지 반년 만에! 아무리 국가운영이 허술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큰 충격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감동이 없다
방송이 전하는 끔찍한 장면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참사에 관한 소식은 여러 경로로 귀에 들어왔다. 중간고사 끝내고 갔다가 참변을 당한 고등학생 이야기, 죽을 것 같다는 딸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받은 아버지 이야기, 입대를 앞둔 남자친구와 함께 갔다가 변을 당한 여학생 이야기, 쌍둥이 형과 함께 갔다가 혼자 살아남은 동생 이야기, 손을 놓쳐 친구가 죽었다고 오열하는 여성 이야기,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으로 유학왔고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는 외국인 이야기…. 어느 하나 가슴 미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없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십 대 이십 대 젊은이였다.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 그 이상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의 죽음이었으며, 신성 곧 하나님 형상의 죽음이었으니까.
정부는 일주일 동안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고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매스컴은 대통령이 분향하는 모습을 연일도 보도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씨랜드 화재 참사 때에도, 성수대교 붕괴 참사 때에도,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때에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에도 국가애도기간은 없었다. 처음으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던 때는 천안함 피격 사건(2010. 3. 26) 때다.이때도 대통령이 매일 분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감동이 없었다.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행정안전부 장관의 첫 마디는 해괴망측했다.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죽었다면 재수 없어 죽었다는 말인가?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은 어차피 죽을 팔자였다는 말인가?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했다”며 “현상” 운운한 지자체장의 말은 가관이었다. 백오십 명의 젊은이가 죽었어도 최선을 다했으니 책임 못 지겠다는 속내를 드러냈으니까. 어찌 이리도 무책임할까. 어찌 이리도 무감각할까.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행정안전부 장관의 첫 마디는 해괴망측했다.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죽었다면 재수 없어 죽었다는 말인가?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은 어차피 죽을 팔자였다는 말인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최우선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거 아닌가. 그러면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하룻밤 사이에 백오십 명 넘는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과 아닌가. 열 번 백 번까지는 아니어도 한두 번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참사가 벌어진 지 일 주일 다 돼서야 사과를 했단다. 그것도 대통령 내외의 정신적 후견인으로 알려진 사이비 도사가 사과는 입 밖으로 내야 한다고 말한 다음에야 했다니 진정성 있는 사과 맞나?
행사주최자가 없어서, 법적 근거가 없어서 통제하지 못했다는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의 변명도 화를 돋우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주최자가 없을수록 국민의 안전에 더욱 신경 써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국가가 있고, 정부가 있고, 행정안전부가 있고, 경찰이 있고, 지자체가 있는 것 아닌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죄다 꽁무니 뺄 궁리만 하고들 있으니 당최 감동이 없는 것이다. 감동은커녕 화만 나는 것이다. 분통이 터져 슬퍼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나라면
책임지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참사의 책임을 희생자들에게 돌리려는 살벌한 발언까지 들린다. 자식이 이태원 가는 것을 부모가 막지 못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식이다. 거기에 간 게 큰 죄라도 된다는 말인가? 중간고사 끝나고 스트레스 풀러 간 게 그렇게 큰 죄인가? 친구들과 어울려 모처럼 축제를 즐긴 게 그렇게 큰 죄인가? 내 생각엔 “너희의” 죄보다는 가볍다. 룸살롱에서 술 퍼마시며 음모를 꾸미는 너희의 죄보다는 가볍다. 죄 없는 사람 죄인 만들고 죄지은 사람 의인 만드는 너희의 죄보다는, 향응과 접대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너희의 죄보다는 훨씬 가볍다. 아니, 죄도 아니다.
만약 나에게 딸이 있는데 그날 거기에 간다고 했다면 나는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할로윈데이는 서양 귀신 축제이므로 기독교인이 가서는 안 된다거나, 만성절(萬聖節) 전야에 귀신을 쫓아내고 영혼을 정화해야 하거늘 귀신 놀이를 하러 간다니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며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 늦지 말라는 단서를 달면서 잘 다녀오라고 했을 것이다. 혹여 술 냄새를 살짝 풍기며 자정 넘어 귀가했어도 나는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물론 그날 귀가하지 않았다면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하며 나쁜 상상에 시달렸겠지만 죽었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참사 속보를 접했을 땐 현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을 것이다. 딸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딸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실신 상태에서 어떡해 어떡해만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슬픈 감정에 몰입할 겨를은 없었을 것이며, 다만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을 파악했을 땐 슬픔보다 분노가 일었을 것이다. 경찰병력을 배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는 주무부서 장관을 향한, 할 역할을 다했다는 지자체장을 향한, 행사주최자가 없어서 통제할 수 없었다는 안전관리본부장을 향한, 추궁의 시간이 아니라 추모의 시간이라고 꾸짖는 인사를 향한, 희생자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몰염치한 자들을 향한,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을 향한 분노로 치를 떨었을 것이다. 이미 초저녁부터 112신고가 수십 통 쇄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리고 대통령의 사저와 텅 빈 대통령 관저를 지키는 기동대가 불과 5분 거리에 있었지만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분노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딸아이를 떠나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어떻게 떠나보낼 수 있겠는가.
11월의 그리스도
책임자들이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태원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희생자들은 재수 없어서 죽은 것도, 죽을 팔자라서 죽은 것도, 죄를 지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정부의 무능함에 의한, 행정당국의 나태에 의한, 지도자들의 무책임에 의한 죽음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무고한 죽음”이었다. 그래, 무고한 죽음이었다는 점에서 내 딸을 비롯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이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사의 불의는 언제나 무고하게 죽은 이들을 통해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태원 희생자들이 이룬 일이란 뭘까? 그들은 현 정권의 총체적 부실과 불의, 한심한 무능함과 파렴치한 무책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글로도 아니고, 설교로도 아니고, 웅변으로도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 자체가 그렇게 했다. 그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정권의 민낯을 요즘처럼 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요즘처럼 분노할 수 있었을까? 하여, 정권의 참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내 딸은, 그리고 참사 희생자들은 예언자였다. 과대망상 아니냐고 반문하기 전에 그들이 죽음으로 이룬 일을 보라! 그들이 밝혀낸 진실은 내가 사십 년 동한 설교한 진리보다 더 크다!
앞으로 그들이 이룰 일이란 무엇일까? 이제 정부는 매사에 안전을 외칠 것이다.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겠다고 법석 떨 것이며, 최첨단 안전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난리 칠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업장과 공사장과 행사장에서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라는 구호가 귀에 따갑도록 들릴 것이다. 그 덕에 한동안 안전사고는 줄어들 것이다. 누군가의 생명과 안전이 그렇게 보호받을 것이다. 누군가의 딸과 아들,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 바로 벗들과 나의 생명과 안전이 그렇게 지켜질 것이다. 정부가 아니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죽음, 우리 아들딸들의 죽음 덕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우리 아들딸들의 무고한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닮았다. 무고한 죽음을 통해 당시 유대 종교권력의 불의와 로마 정치권력의 야만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이제 나는 주저 없이 말하겠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말해야 한다. 그들은 2022년 대한민국 11월의 그리스도들이라고! 지나친 논리의 비약 아니냐고 비난하지 말라. 그들이 이룬 일과, 이룰 일을 보라!
이제 나는 주저 없이 말하겠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말해야 한다. 그들은 2022년 대한민국 11월의 그리스도들이라고! 지나친 논리의 비약 아니냐고 비난하지 말라. 그들이 이룬 일과, 이룰 일을 보라!
예수님은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그럴진대 무고하게 죽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므로 우리는 그들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낯과 진실을 본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미지의 안전사고에서 숱한 생명이 살아날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내 가족, 내 친구, 내 지인, 아니 바로 나의 생명과 안전이 지켜질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거덜난 대한민국이 바르게 세워질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고마워해야 한다.
나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게, 대한민국 11월의 그리스도들에게, 그들을 낳고 기르고 가슴에 묻은 부모들에게 감사를 바친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이며, 올 추수감사절에 봉헌하는 “범사”에 대한 감사다. 그런데 슬픔이 밀려온다. 고마운데 슬프다. 이제 나는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담아 추모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그날 그 시의 진실을. 그리고 계속 분노할 것이다.
- 이민
(마 25:40)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일주일 내내 나는 애도과 감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정부는 지난 한 주간을 이태원참사 희생자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는데 공교롭게도 은명교회는 이번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 때문이다. 슬픔 속에서 감사절을 준비하는 마음이 곤혹스러웠다. 애도할 일은 감사할 일이 아니며, 감사할 일은 애도할 일이 아닌 까닭이다. 애도와 감사는 물과 기름 같이 버성겼다.
감사를 주제로 한 설교도 그랬지만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부모로서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렴풋이라도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슬픔보다 우선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사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아내를 통해서였다. 주일 새벽까지 설교문을 수정하고 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씻으려던 참이었다. 이태원 할로윈축제에서 백오십 명이 죽었대.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그럴 리가 있나, 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사상자를 사망자로 잘못 읽었겠지….
하지만 내 눈으로 기사를 확인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런 참담한 일이 또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삼백네 명의 꽃 같은 아이들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것도 새 정부 들어선 지 반년 만에! 아무리 국가운영이 허술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큰 충격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감동이 없다
방송이 전하는 끔찍한 장면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참사에 관한 소식은 여러 경로로 귀에 들어왔다. 중간고사 끝내고 갔다가 참변을 당한 고등학생 이야기, 죽을 것 같다는 딸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받은 아버지 이야기, 입대를 앞둔 남자친구와 함께 갔다가 변을 당한 여학생 이야기, 쌍둥이 형과 함께 갔다가 혼자 살아남은 동생 이야기, 손을 놓쳐 친구가 죽었다고 오열하는 여성 이야기,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으로 유학왔고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는 외국인 이야기…. 어느 하나 가슴 미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없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십 대 이십 대 젊은이였다.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 그 이상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의 죽음이었으며, 신성 곧 하나님 형상의 죽음이었으니까.
정부는 일주일 동안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고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매스컴은 대통령이 분향하는 모습을 연일도 보도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씨랜드 화재 참사 때에도, 성수대교 붕괴 참사 때에도,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때에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에도 국가애도기간은 없었다. 처음으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던 때는 천안함 피격 사건(2010. 3. 26) 때다.이때도 대통령이 매일 분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감동이 없었다.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행정안전부 장관의 첫 마디는 해괴망측했다.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죽었다면 재수 없어 죽었다는 말인가?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은 어차피 죽을 팔자였다는 말인가?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했다”며 “현상” 운운한 지자체장의 말은 가관이었다. 백오십 명의 젊은이가 죽었어도 최선을 다했으니 책임 못 지겠다는 속내를 드러냈으니까. 어찌 이리도 무책임할까. 어찌 이리도 무감각할까.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행정안전부 장관의 첫 마디는 해괴망측했다.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죽었다면 재수 없어 죽었다는 말인가?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은 어차피 죽을 팔자였다는 말인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최우선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거 아닌가. 그러면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하룻밤 사이에 백오십 명 넘는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과 아닌가. 열 번 백 번까지는 아니어도 한두 번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참사가 벌어진 지 일 주일 다 돼서야 사과를 했단다. 그것도 대통령 내외의 정신적 후견인으로 알려진 사이비 도사가 사과는 입 밖으로 내야 한다고 말한 다음에야 했다니 진정성 있는 사과 맞나?
행사주최자가 없어서, 법적 근거가 없어서 통제하지 못했다는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의 변명도 화를 돋우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주최자가 없을수록 국민의 안전에 더욱 신경 써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국가가 있고, 정부가 있고, 행정안전부가 있고, 경찰이 있고, 지자체가 있는 것 아닌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죄다 꽁무니 뺄 궁리만 하고들 있으니 당최 감동이 없는 것이다. 감동은커녕 화만 나는 것이다. 분통이 터져 슬퍼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나라면
책임지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참사의 책임을 희생자들에게 돌리려는 살벌한 발언까지 들린다. 자식이 이태원 가는 것을 부모가 막지 못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식이다. 거기에 간 게 큰 죄라도 된다는 말인가? 중간고사 끝나고 스트레스 풀러 간 게 그렇게 큰 죄인가? 친구들과 어울려 모처럼 축제를 즐긴 게 그렇게 큰 죄인가? 내 생각엔 “너희의” 죄보다는 가볍다. 룸살롱에서 술 퍼마시며 음모를 꾸미는 너희의 죄보다는 가볍다. 죄 없는 사람 죄인 만들고 죄지은 사람 의인 만드는 너희의 죄보다는, 향응과 접대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너희의 죄보다는 훨씬 가볍다. 아니, 죄도 아니다.
만약 나에게 딸이 있는데 그날 거기에 간다고 했다면 나는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할로윈데이는 서양 귀신 축제이므로 기독교인이 가서는 안 된다거나, 만성절(萬聖節) 전야에 귀신을 쫓아내고 영혼을 정화해야 하거늘 귀신 놀이를 하러 간다니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며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 늦지 말라는 단서를 달면서 잘 다녀오라고 했을 것이다. 혹여 술 냄새를 살짝 풍기며 자정 넘어 귀가했어도 나는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물론 그날 귀가하지 않았다면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하며 나쁜 상상에 시달렸겠지만 죽었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참사 속보를 접했을 땐 현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을 것이다. 딸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딸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실신 상태에서 어떡해 어떡해만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슬픈 감정에 몰입할 겨를은 없었을 것이며, 다만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을 파악했을 땐 슬픔보다 분노가 일었을 것이다. 경찰병력을 배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는 주무부서 장관을 향한, 할 역할을 다했다는 지자체장을 향한, 행사주최자가 없어서 통제할 수 없었다는 안전관리본부장을 향한, 추궁의 시간이 아니라 추모의 시간이라고 꾸짖는 인사를 향한, 희생자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몰염치한 자들을 향한,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을 향한 분노로 치를 떨었을 것이다. 이미 초저녁부터 112신고가 수십 통 쇄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리고 대통령의 사저와 텅 빈 대통령 관저를 지키는 기동대가 불과 5분 거리에 있었지만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분노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딸아이를 떠나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어떻게 떠나보낼 수 있겠는가.
11월의 그리스도
책임자들이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태원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희생자들은 재수 없어서 죽은 것도, 죽을 팔자라서 죽은 것도, 죄를 지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정부의 무능함에 의한, 행정당국의 나태에 의한, 지도자들의 무책임에 의한 죽음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무고한 죽음”이었다. 그래, 무고한 죽음이었다는 점에서 내 딸을 비롯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이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사의 불의는 언제나 무고하게 죽은 이들을 통해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태원 희생자들이 이룬 일이란 뭘까? 그들은 현 정권의 총체적 부실과 불의, 한심한 무능함과 파렴치한 무책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글로도 아니고, 설교로도 아니고, 웅변으로도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 자체가 그렇게 했다. 그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정권의 민낯을 요즘처럼 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요즘처럼 분노할 수 있었을까? 하여, 정권의 참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내 딸은, 그리고 참사 희생자들은 예언자였다. 과대망상 아니냐고 반문하기 전에 그들이 죽음으로 이룬 일을 보라! 그들이 밝혀낸 진실은 내가 사십 년 동한 설교한 진리보다 더 크다!
앞으로 그들이 이룰 일이란 무엇일까? 이제 정부는 매사에 안전을 외칠 것이다.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겠다고 법석 떨 것이며, 최첨단 안전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난리 칠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업장과 공사장과 행사장에서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라는 구호가 귀에 따갑도록 들릴 것이다. 그 덕에 한동안 안전사고는 줄어들 것이다. 누군가의 생명과 안전이 그렇게 보호받을 것이다. 누군가의 딸과 아들,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 바로 벗들과 나의 생명과 안전이 그렇게 지켜질 것이다. 정부가 아니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죽음, 우리 아들딸들의 죽음 덕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우리 아들딸들의 무고한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닮았다. 무고한 죽음을 통해 당시 유대 종교권력의 불의와 로마 정치권력의 야만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이제 나는 주저 없이 말하겠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말해야 한다. 그들은 2022년 대한민국 11월의 그리스도들이라고! 지나친 논리의 비약 아니냐고 비난하지 말라. 그들이 이룬 일과, 이룰 일을 보라!
이제 나는 주저 없이 말하겠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말해야 한다. 그들은 2022년 대한민국 11월의 그리스도들이라고! 지나친 논리의 비약 아니냐고 비난하지 말라. 그들이 이룬 일과, 이룰 일을 보라!
예수님은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그럴진대 무고하게 죽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므로 우리는 그들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낯과 진실을 본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미지의 안전사고에서 숱한 생명이 살아날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내 가족, 내 친구, 내 지인, 아니 바로 나의 생명과 안전이 지켜질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로 인해 거덜난 대한민국이 바르게 세워질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고마워해야 한다.
나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게, 대한민국 11월의 그리스도들에게, 그들을 낳고 기르고 가슴에 묻은 부모들에게 감사를 바친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이며, 올 추수감사절에 봉헌하는 “범사”에 대한 감사다. 그런데 슬픔이 밀려온다. 고마운데 슬프다. 이제 나는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담아 추모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그날 그 시의 진실을. 그리고 계속 분노할 것이다.
-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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