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크리스쳔 보편 성소인 관상 - 고계영 바오로 신부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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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62회 작성일 20-10-15 15:21본문
크리스천 보편 성소인 관상
고계영 바오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전환기였던 지난 세기는 영성 신학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지평에서 “신비체험”(la mistica) 과 관상의 본질이 새롭게 조명된 전환기로, 이 전환은 100년에 걸쳐 다양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긴 논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논쟁에는 영성신학자들뿐만 아니라 20세기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상당수 참여하였다. 이 주제를 놓고 전개되었던 다양한 의견들은 격렬하고 긴 논쟁을 통하여 모든 크리스천들이 신비 체험과 관상에로 불리었다는 사실에로 수렴되고 있다. 이 간단한 글에서는 보편적 관점에서 관상이 무엇인지, 관상과 신비 체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 관상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觀想)이란 말은 라틴말로 “콘템플라씨오”(contemplatio)라 하는데, 이 어휘는 “콘템플라리”(contemplari)라는 동사로부터 파생되었다. 놀람과 감탄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거나 관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동사는 “쿰”(cum)과 “템플룸”(templum)으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여기에서 “꿈”(cum)은 동시성, 공동성, 일치를 의미하는 전치사이고, “템플룸”(templum)은 창공, 눈에 보이는 하늘로 둘러싸여진 공간, 또는 신성한 대상에게 바쳐진 신전을 뜻하는 명사이다 . 이 두 낱말이 하나의 낱말을 형성하면서, 하늘 공간이나 신전에 거주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나, 점차 장소보다는 실재의 내부를 바라본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
고대 그리이스나 로마 시대에 사제들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신탁을 전하는 일이었다. 고대인들은 전쟁신, 화산신, 지진신, 홍수신, 가뭄신, 우박신 등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많은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이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주관한다고 믿었기에, 그들로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의 뜻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제들은 별자리, 새의 나는 모양, 꿈, 짐승의 뼈나 거북이 등을 태워보거나 짐승의 내장을 꺼내보는 등 여러 가지 점을 통하여 신탁을 알아내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서 몸과 마음의 정성을 다하였다. 예를 들면, 고대인들은 새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면 거기에 신의 뜻이 표시되어 있다고 믿었다. 있지도 않은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목욕 재계하며 얼마나 집중해서 새의 내장을 들여다 보았겠는가? 관상이란 말은 이렇게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 온 힘을 다해 응시하고 관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상”(contemplatio)이나 “관상하다”(contemplari)는 말들은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느님에 대한 바라봄을 가리키게 되고, 나중에는 신비 체험을 뜻하는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다.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중세 후기까지 관상과 신비 체험은 같은 의미를 지닌 용어들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근대 학문이 발전하면서 전문 용어들의 분화로 관상과 신비 체험이란 용어도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아직까지도 두 용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관상은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인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관상이라 이해할 것이다.
관상의 의미는 우리말의 “보다” 동사를 살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대단히 관상적인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을 보면, 한국인들은 육체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오감으로도 사물을 본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은 ‘본다’는 동사를 시각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청각에도 적용하여 ‘들어 본다’고 말하고, 후각과 관련해서는 냄새를 ‘맡아 본다’고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미각에도 ‘보다’ 동사를 적용하여 ‘맛을 본다’고 말하고, 촉각에도 적용하여 ‘느껴본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눈은 물론이고 귀, 코, 입, 촉각으로도 보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동사를 온몸에로 확장시킨다. 즉, 손으로 만져 보고, 발로 차보고, 머리나 팔, 몸 등으로 부딪치면서도 본다. 또한 상상해 보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사랑해 보고, 시도해 보고, 먹어보고, 마셔 보고, 가보는 등 한국인들은 지성으로도 보고, 감성으로도 보고, 의지로도 본다.
이상과 같이 한국인들은 온몸과 전존재로 사물들을 바라보는데, 물론 이러한 바라봄은 유비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동시에 내적인 바라봄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마음으로 본다’, ‘마음으로 들어 본다’, ‘마음으로 느껴 본다’, ‘마음으로 그려 본다’와 같은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내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내적인 감각 혹은 영적인 감각으로 바라보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라봄과 인식과 깨달음은 관상과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내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영혼과 전 존재로 바라볼 줄 알았던 관상적인 민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온몸과 전존재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듯이, 그리스도교 관상이란 육체적 감각과 영적인 감각을 통하여 온몸과 전존재로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상에서의 바라봄은 시각적 감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관상에서의 영적 시각은 신학적 제유(提喩)로, 영적 오감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면서, 알아듣고 깨닫는 것, 즉 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 라너는 인간을 “말씀을 듣는 자”로 규정하면서 “들음”, 즉 청각을 신학적 제유로 사용하는데, 그가 말하는 들음은 관상의 의미와 결코 다르지 않다. 결론적으로, 관상이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2. 신비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인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관상이기에, 관상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신비의 개념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신비’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개념들 중의 하나로, 칼 라너에 의하면, 이는 하느님의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느님의 가장 적합한 이름이다 . 즉, 신비는 창조된 모든 사물을 무한히 초월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존재로 머무시는 하느님의 신비적 본질을 제대로 규명해주는 그분의 이름이다.
그러나 신비는, 다른 모든 초월적 속성들처럼,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 어떤 개념이 정의된다는 것은 하나의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비가 정의되어 하나의 명제로 표현된다는 것은 신비가 다른 여러 범주적인 대상들 사이의 하나로 나란히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타자인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비는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어떤 타자가 아니다. 신비는 신비 체험을 하는 순간조차도 그 본질을 본래 파악할 수 없는 익명적이고 비주제적이며 무한히 거룩한 실재이다. 따라서 신비는 일시적으로 베일 속에 싸여 있다 나중에 확연히 인식하게 되는, 그 결과 더 이상 신비로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그런 수수께끼 같은 실재가 아니다. 신비는 지복직관 안에서조차 인간 존재에게는 끝까지 다 파헤쳐지지 않는, 변함없이 불가해한 신비로 남는다 .
이러한 신비가 하느님의 유일한 실재이며, 이 유일한 원초적 신비와 분리되어 있는 다른 신비들이란 있을 수 없다. 창조된 모든 존재자는 신비 자체와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절대 신비의 불가사의적 특성에 참여하게 된다. 유한한 존재자들은 이러한 관계 밖에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으며, 가장 하찮은 피조물에 대한 인식도 충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동일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 이런 의미에서 실재에 대한 모든 이해는 궁극적으로 늘 “하느님 신비에로 환원”(reductio in mysterium Dei) 된다. 따라서 유한자의 범주적 세계에는 절대적 신비가 복수로 있을 수 없고,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으로서의 하느님은 실로 유일한 “신비”(mysterium)로만 존재하게 된다 . 이와 같이 신비가 하나라는 신학적 사실은 관상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닭이나 연어 또는 꽃들 안에 있는 신비나 삼위일체 신비나 동일한 하나의 신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범신론과는 전혀 다르다. 신비는 그 본성상 절대로 범신론으로 흐를 수 없다.
신비는 초월적(trascendentale) 주체 밖에서 이 주체를 무한히 초월하면서(trascendente) 동시에, 익명적이고 비주제적이긴 하지만, 초월의 주체 안에도 현존한다 . 라너에 의하면, 인간은 신비가 관통하고 있는 존재, 즉 “호모 미스티쿠스”(homo mysticus, 신비인)이며, 신비적이지 않은 실재와 이해할 수 있고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실재에 몰두해 있을 때조차도, 늘 신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비는 운이 좋으면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도 언제 어디서나 신비를 살아간다” . 즉,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비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또한 거룩한 신비로서 “호모 미스티쿠스”인 인간 존재와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신비는 인간 존재와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과 대단히 가까이 있다.
정의될 수 없으나 하느님의 유일한 실재인 신비는 가장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명백한 실재이다. 불가해하면서도 명백한 이 신비야말로 무한한 바다로서 유일하고 영원한 평화이며, 바로 이 안에 인간 존재의 영원한 지복이 있다 . 이런 의미에서 신비는 인간 존재가 지향하는 유일하고 참된 대상이 된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뭉클한 체험을 한다. 가슴 뭉클한 이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비가시성: 가슴 뭉클함은 가시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병원에 가서 우리 가슴을 해부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물리적으로 알아낼 수 없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2) 비물질성: 감동적인 어떤 사랑 이야기를 잡지에서 읽었다고 가정할 때, 그런 경우, 인쇄된 글 안에 담겨 있는 감동은 이 잡지를 국립 수사 과학 연구소에 가져가 정밀 검사를 해도 과학적으로 검출되지 않을 것이다. 또 이 이야기가 실린 부분을 누군가 찢거나 태워도 종이는 찢어지고 타버릴망정 가슴 뭉클한 사랑은 찢어지지도 타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인쇄된 잡지 안에 분명히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지’라는 물질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3) 비범주성: 물리적인 사물들은 질량, 크기, 부피, 모양, 색깔과 같은 범주들을 지니고 있어 범주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이러한 범주들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100 g짜리 사랑, 1m짜리 사랑, 1,000 cc 사랑, 사각형 사랑, 옥색 사랑 등으로 구분하거나 나눌 수 없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범주 또한 지니고 있지 않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범주적인 것이다.
(4) 초월성: 가슴 뭉클한 사랑은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과 더불어 늙지도 않으며, 그 사람과 함께 죽지도 않는다. 가슴 뭉클한 사랑을 실천한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죽어 사라졌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살아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감동을 주고 있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여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실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물질적이고 비범주적이기 때문에 장소에도 갇혀 있지 않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실천한 사람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체험될 수 있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공간 또한 초월하는 실재인 것이다. 가슴 뭉클한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역사를 초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5) 초자연성: 가슴 뭉클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그 사랑을 전해주는 잡지도, 이를 통해 감동을 받는 사람도 모두 자연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 자연적 사물 안에 들어 있는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비범주적인 초월적 실재이기에 이 사랑은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실재이기도 하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6) 비주제성: 영화나 드라나마 소설이나 대화에 있어서 주제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 내용과 의미가 비주제적이라 말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분명하게 느껴지고 체험된다는 면에서 주제적이라 할 수 있으나,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말을 통하여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비주제적이라 할 수 있다.
(7) 익명성: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범주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비주제적이기 때문에 육체적 감각들로부터는 포착되지 않으며, 그러기에 육체적 감각들로부터는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익명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8) 존재론적 보편성: 인간은 선험적으로 가슴 뭉클한 사랑을 느끼면서 지향하도록 존재론적으로 창조되어 있다. 이 존재론적인 구조로 말미암아 인간은 누구나 가슴 뭉클한 사랑을 보편적으로 느끼고 체험한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존재론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이상과 같이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범주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이고 비주제적이며 익명적이기에, 육체적 감각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도 없고 과학적 차원이나 의학적 차원에서도 그 물리적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나 체험적으로는 확실하게 존재하는 실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비주제적으로 존재하는 비가시적 실재를 “영”(spiritus)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영이라 규정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함은 또한 ‘거룩하다’[성(聖)]고 할 수 있다. ‘거룩함’은 일부 신학자들에게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라 여겨질 정도로 신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사랑은 존재, 일성(一性), 진성(眞性), 선성(善性), 미성(美性)과 같은 초월적 특성들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으며, 형이상학적 질서 안에서 언제나 일성, 진성, 선성, 미성과 일치해 있다. 이와 같이 일성, 진성, 선성, 미성이 내적인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동시적으로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상태를 ‘거룩함’ [성(聖)]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히브리말로 “카도쉬”(qādôš)라고 말하는데, 이 형용사는 많은 경우 하느님의 거룩함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즉,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거룩함은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카도쉬”(qādôš)라는 형용사는 어원적으로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카도쉬’는 속된 것, 즉 죄와 악과 어둠과 더러움과 추함과 거짓, 위선, 미움, 시기, 질투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깨끗하고, 참되고, 좋고, 아름답고, 옳고, 바른 것으로 가득찬 실재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슴 뭉클함은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사랑으로서 거룩하다고 규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함은 물질과 사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시간과 공간, 즉 역사로부터도 분리되어 있고, 범주들로부터도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선은 자연 안에 현존하면서도 자연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도 가슴 뭉클함은 ‘카도쉬’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의 정체는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는 영이면서 동시에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聖] 영, 즉 성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슴 뭉클한 사랑을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이라 규정하는 1요한 4,16이나 하느님을 영으로 규정하는 요한 4,24과 일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슴 뭉클함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범주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이고 비주제적이며 익명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2) 가슴 뭉클함은 사랑이며, 사랑은 하느님이다; (3) 가슴 뭉클함은 영이며, 영은 하느님이다; (4) 가슴 뭉클함은 거룩함이며, 거룩함은 하느님이다; (5) 가슴 뭉클함은 거룩한 영으로서 성령이다; (6) 가슴 뭉클함과 사랑과 영과 거룩함과 성령과 하느님은 동시적인 것이고 동일한 것이다; (7) 결론적으로 뭉클함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뭉클이시다.
이상과 같이 불가분리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가슴 뭉클함과 사랑과 영과 거룩함과 성령과 하느님은 한마디로 신비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이 신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신비는 하나의 명제로 정의할 수 없다; (2) 신비는 수많은 하느님의 이름들 가운데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3) 신비는 하나이다; (4) 신비는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범주적, 초월적, 초자연적, 비주제적, 익명적, 존재론적, 보편적 실재이다; (5) 신비는 무한한 실재로 머물면서 동시에 우주 안에, 즉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한다; (6) 신비는 유일하게 명백한 실재, 가장 확실한 실재이다.
3. 기초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관상과 신비 체험
관상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에, 관상을 하면, 그 필연적 결과로 신비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상과 신비 체험의 이러한 불가분리적 관계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함으로써 그 신비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이 정의는 신비체험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 즉 ‘신비’라는 대상, ‘관상’이라는 방법, ‘사랑의 일치’라는 목적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상은 신비체험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비체험의 목적인 ‘사랑의 일치’는 관상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관상과 신비적 일치는 불가분리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신비체험의 방법으로서 신비적 일치를 필연적으로 귀결시키는 관상은 기초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이 크리스천 체험의 핵심에 자리하는 차원들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 체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가슴 뭉클한 사랑을 체험할 때, ‘가슴 뭉클한 사랑’이라는 체험 대상과 이를 체험하는 주체 사이에는 대상과 주체라는 거리 내지 간격이 사라져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하면 ‘가슴 뭉클함’과 ‘체험하는 나’가 불가분리적으로 일치된다는 말이다. 이는 체험 주체인 ‘나’의 밖에서 제3자적으로 발생한 가슴 뭉클한 사랑이 이를 체험하는 ‘나’에게 전달 혹은 양여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자기 양여된 이 사랑이 곧 하느님이기에 가슴 뭉클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이 자기 양여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신비이신 하느님을 관상하면, 그 하느님이 자기 양여되는 체험이 발생하게 된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 가슴 뭉클한 사랑이 거룩한 영으로서 성령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가슴 뭉클한 사랑에 대한 관상은 곧 성령에 대한 체험에로 귀결된다. 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한 사랑에 대한 관상은 또다른 차원에서도 성령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칼 라너는 초월 체험을 전개하면서 인간 주체에게 양여된 하느님을 성령이라 규정한다. 그런데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면, 관상 주체에게 가슴 뭉클한 사랑이 전달되고 이 사랑이 자기 양여된 하느님이기에, 라너의 초월 신학 안에서 비추어보면, 전달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자기 양여된 하느님으로서의 성령 체험이 된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은총과 구원 체험: 칼 라너는 초월 체험을 통하여 자기 양여된 하느님, 즉 인간 주체에게 전달된 성령을 은총이라 규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면서 체험한 성령은 곧 은총 체험이 된다. 그런데 은총 체험이 발생하면 구원 체험도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이는 신학적으로 볼 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가슴 뭉클한 사랑을 체험할 때에는 ‘가슴 뭉클한 사랑’이라는 체험 대상과 이를 체험하는 주체가 불가분리적으로 일치하게 되는데, 이 사랑 체험이 곧 성령 체험이고 은총 체험이기 때문에, 이 은총 체험을 통하여 가슴 뭉클한 사랑 체험의 주체가 성령과 불가분리적인 일치 관계에 들어서게 되고, 성령과의 이러한 일치 상태가 구원의 상태에 들어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면, 자기 양여로서의 하느님 체험과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을 통하여 은총 체험과 구원 체험을 필연적으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칼 라너는 이러한 자기 양여로서의 하느님 체험과 성령 체험, 은총 체험, 구원 체험이 본질적으로 신비 체험과 다르지 않다고 풀이한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계시와 믿음 체험: 성령과 은총과 구원으로 해석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계시와 믿음이라는 이중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가슴 뭉클한 사랑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곧 사랑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 신비이신 하느님의 현현이고, 하느님의 이 현현이 곧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며, 이 계시에 대한 동의와 수용이 믿음이다 . 가슴 뭉클한 사랑의 경우, 체험 주체 쪽에 전달된 사랑, 즉 자기 양여된 신비, 자기 양여된 성령, 자기 양여된 하느님이 계시의 동의와 수용으로서의 믿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계시와 믿음은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의 이중적 양식이다.
이상과 같이 기초 신학적인 관점에서 관상을 비추어보면, 가슴 뭉클한 사랑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관상의 주체가 필연적으로 관상의 대상인 사랑과 일치하게 되므로, 사랑에 대한 관상은 하느님의 자기 양여 체험,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 은총 체험, 구원 체험, 계시 체험, 믿음 체험, 즉 신비 체험과 불가분리적으로 통합되고, 이러한 체험들은 동시적으로 실현되는 가운데 그 경계마저 사라진다. 따라서 관상은 크리스천 체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4. 관상과 믿음의 필연적 인과성
관상은 크리스천 체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관상은 믿음 및 구원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관상은 하면 좋고 안해도 괜찮은 그저 좋고 유익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요청되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게 되면, 그 순간 신비가 관상 주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 신비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기에, 보고(videre) 믿는(credere) 행위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관상 주체는 신비를 바라봄으로써 신비 안에 있게 되고, 신비 안에 머무름은 신비에 대한 동의와 수용으로서의 믿음이 되기에, 관상하는 이는 신비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믿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바라봄, 즉 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런데 구원은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구원도 결국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관상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상은 믿음을, 믿음은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관상하면 믿지 않을 수 없고, 믿으면 구원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맺음말
인간 존재에게는 선험적으로 존재론적인 능력들이 주어져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육체적인 감각들과 영적인 감각들이 있다. 인간은 이러한 감각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는 “관상의 존재”(에쎄 콘템플라티부스, esse contemplativus), 즉 “호모 콘템플라티부스”(homo contemplativus, 관상하는 인간)이다. 관상하는 인간은 지복지관을 통하여, 성삼위께서 당신들의 완전한 사랑을 서로 관상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 즉 “데우스 컨템플라티부스”(Deus contemplativus, 관상하는 하느님)에 참여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지복직관과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을 지향하는 “관상하는 존재”로서 누구나 이 지복직관과 관상에로 불리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상하는 인간은 이 지상에서부터 선험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육체의 감각들과 영적인 감각들로 구성된 관상의 능력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한다.
고계영 바오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전환기였던 지난 세기는 영성 신학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지평에서 “신비체험”(la mistica) 과 관상의 본질이 새롭게 조명된 전환기로, 이 전환은 100년에 걸쳐 다양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긴 논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논쟁에는 영성신학자들뿐만 아니라 20세기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상당수 참여하였다. 이 주제를 놓고 전개되었던 다양한 의견들은 격렬하고 긴 논쟁을 통하여 모든 크리스천들이 신비 체험과 관상에로 불리었다는 사실에로 수렴되고 있다. 이 간단한 글에서는 보편적 관점에서 관상이 무엇인지, 관상과 신비 체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 관상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觀想)이란 말은 라틴말로 “콘템플라씨오”(contemplatio)라 하는데, 이 어휘는 “콘템플라리”(contemplari)라는 동사로부터 파생되었다. 놀람과 감탄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거나 관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동사는 “쿰”(cum)과 “템플룸”(templum)으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여기에서 “꿈”(cum)은 동시성, 공동성, 일치를 의미하는 전치사이고, “템플룸”(templum)은 창공, 눈에 보이는 하늘로 둘러싸여진 공간, 또는 신성한 대상에게 바쳐진 신전을 뜻하는 명사이다 . 이 두 낱말이 하나의 낱말을 형성하면서, 하늘 공간이나 신전에 거주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나, 점차 장소보다는 실재의 내부를 바라본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
고대 그리이스나 로마 시대에 사제들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신탁을 전하는 일이었다. 고대인들은 전쟁신, 화산신, 지진신, 홍수신, 가뭄신, 우박신 등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많은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이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주관한다고 믿었기에, 그들로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의 뜻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제들은 별자리, 새의 나는 모양, 꿈, 짐승의 뼈나 거북이 등을 태워보거나 짐승의 내장을 꺼내보는 등 여러 가지 점을 통하여 신탁을 알아내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서 몸과 마음의 정성을 다하였다. 예를 들면, 고대인들은 새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면 거기에 신의 뜻이 표시되어 있다고 믿었다. 있지도 않은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목욕 재계하며 얼마나 집중해서 새의 내장을 들여다 보았겠는가? 관상이란 말은 이렇게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 온 힘을 다해 응시하고 관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상”(contemplatio)이나 “관상하다”(contemplari)는 말들은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느님에 대한 바라봄을 가리키게 되고, 나중에는 신비 체험을 뜻하는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다.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중세 후기까지 관상과 신비 체험은 같은 의미를 지닌 용어들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근대 학문이 발전하면서 전문 용어들의 분화로 관상과 신비 체험이란 용어도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아직까지도 두 용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관상은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인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관상이라 이해할 것이다.
관상의 의미는 우리말의 “보다” 동사를 살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대단히 관상적인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을 보면, 한국인들은 육체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오감으로도 사물을 본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은 ‘본다’는 동사를 시각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청각에도 적용하여 ‘들어 본다’고 말하고, 후각과 관련해서는 냄새를 ‘맡아 본다’고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미각에도 ‘보다’ 동사를 적용하여 ‘맛을 본다’고 말하고, 촉각에도 적용하여 ‘느껴본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눈은 물론이고 귀, 코, 입, 촉각으로도 보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동사를 온몸에로 확장시킨다. 즉, 손으로 만져 보고, 발로 차보고, 머리나 팔, 몸 등으로 부딪치면서도 본다. 또한 상상해 보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사랑해 보고, 시도해 보고, 먹어보고, 마셔 보고, 가보는 등 한국인들은 지성으로도 보고, 감성으로도 보고, 의지로도 본다.
이상과 같이 한국인들은 온몸과 전존재로 사물들을 바라보는데, 물론 이러한 바라봄은 유비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동시에 내적인 바라봄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마음으로 본다’, ‘마음으로 들어 본다’, ‘마음으로 느껴 본다’, ‘마음으로 그려 본다’와 같은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내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내적인 감각 혹은 영적인 감각으로 바라보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라봄과 인식과 깨달음은 관상과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내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영혼과 전 존재로 바라볼 줄 알았던 관상적인 민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온몸과 전존재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듯이, 그리스도교 관상이란 육체적 감각과 영적인 감각을 통하여 온몸과 전존재로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상에서의 바라봄은 시각적 감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관상에서의 영적 시각은 신학적 제유(提喩)로, 영적 오감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면서, 알아듣고 깨닫는 것, 즉 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 라너는 인간을 “말씀을 듣는 자”로 규정하면서 “들음”, 즉 청각을 신학적 제유로 사용하는데, 그가 말하는 들음은 관상의 의미와 결코 다르지 않다. 결론적으로, 관상이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2. 신비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인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관상이기에, 관상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신비의 개념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신비’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개념들 중의 하나로, 칼 라너에 의하면, 이는 하느님의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느님의 가장 적합한 이름이다 . 즉, 신비는 창조된 모든 사물을 무한히 초월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존재로 머무시는 하느님의 신비적 본질을 제대로 규명해주는 그분의 이름이다.
그러나 신비는, 다른 모든 초월적 속성들처럼,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 어떤 개념이 정의된다는 것은 하나의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비가 정의되어 하나의 명제로 표현된다는 것은 신비가 다른 여러 범주적인 대상들 사이의 하나로 나란히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타자인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비는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어떤 타자가 아니다. 신비는 신비 체험을 하는 순간조차도 그 본질을 본래 파악할 수 없는 익명적이고 비주제적이며 무한히 거룩한 실재이다. 따라서 신비는 일시적으로 베일 속에 싸여 있다 나중에 확연히 인식하게 되는, 그 결과 더 이상 신비로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그런 수수께끼 같은 실재가 아니다. 신비는 지복직관 안에서조차 인간 존재에게는 끝까지 다 파헤쳐지지 않는, 변함없이 불가해한 신비로 남는다 .
이러한 신비가 하느님의 유일한 실재이며, 이 유일한 원초적 신비와 분리되어 있는 다른 신비들이란 있을 수 없다. 창조된 모든 존재자는 신비 자체와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절대 신비의 불가사의적 특성에 참여하게 된다. 유한한 존재자들은 이러한 관계 밖에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으며, 가장 하찮은 피조물에 대한 인식도 충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동일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 이런 의미에서 실재에 대한 모든 이해는 궁극적으로 늘 “하느님 신비에로 환원”(reductio in mysterium Dei) 된다. 따라서 유한자의 범주적 세계에는 절대적 신비가 복수로 있을 수 없고,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으로서의 하느님은 실로 유일한 “신비”(mysterium)로만 존재하게 된다 . 이와 같이 신비가 하나라는 신학적 사실은 관상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닭이나 연어 또는 꽃들 안에 있는 신비나 삼위일체 신비나 동일한 하나의 신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범신론과는 전혀 다르다. 신비는 그 본성상 절대로 범신론으로 흐를 수 없다.
신비는 초월적(trascendentale) 주체 밖에서 이 주체를 무한히 초월하면서(trascendente) 동시에, 익명적이고 비주제적이긴 하지만, 초월의 주체 안에도 현존한다 . 라너에 의하면, 인간은 신비가 관통하고 있는 존재, 즉 “호모 미스티쿠스”(homo mysticus, 신비인)이며, 신비적이지 않은 실재와 이해할 수 있고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실재에 몰두해 있을 때조차도, 늘 신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비는 운이 좋으면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도 언제 어디서나 신비를 살아간다” . 즉,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비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또한 거룩한 신비로서 “호모 미스티쿠스”인 인간 존재와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신비는 인간 존재와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과 대단히 가까이 있다.
정의될 수 없으나 하느님의 유일한 실재인 신비는 가장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명백한 실재이다. 불가해하면서도 명백한 이 신비야말로 무한한 바다로서 유일하고 영원한 평화이며, 바로 이 안에 인간 존재의 영원한 지복이 있다 . 이런 의미에서 신비는 인간 존재가 지향하는 유일하고 참된 대상이 된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뭉클한 체험을 한다. 가슴 뭉클한 이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비가시성: 가슴 뭉클함은 가시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병원에 가서 우리 가슴을 해부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물리적으로 알아낼 수 없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2) 비물질성: 감동적인 어떤 사랑 이야기를 잡지에서 읽었다고 가정할 때, 그런 경우, 인쇄된 글 안에 담겨 있는 감동은 이 잡지를 국립 수사 과학 연구소에 가져가 정밀 검사를 해도 과학적으로 검출되지 않을 것이다. 또 이 이야기가 실린 부분을 누군가 찢거나 태워도 종이는 찢어지고 타버릴망정 가슴 뭉클한 사랑은 찢어지지도 타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인쇄된 잡지 안에 분명히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지’라는 물질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3) 비범주성: 물리적인 사물들은 질량, 크기, 부피, 모양, 색깔과 같은 범주들을 지니고 있어 범주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이러한 범주들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100 g짜리 사랑, 1m짜리 사랑, 1,000 cc 사랑, 사각형 사랑, 옥색 사랑 등으로 구분하거나 나눌 수 없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범주 또한 지니고 있지 않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범주적인 것이다.
(4) 초월성: 가슴 뭉클한 사랑은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과 더불어 늙지도 않으며, 그 사람과 함께 죽지도 않는다. 가슴 뭉클한 사랑을 실천한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죽어 사라졌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살아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감동을 주고 있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여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실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물질적이고 비범주적이기 때문에 장소에도 갇혀 있지 않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실천한 사람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체험될 수 있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공간 또한 초월하는 실재인 것이다. 가슴 뭉클한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역사를 초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5) 초자연성: 가슴 뭉클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그 사랑을 전해주는 잡지도, 이를 통해 감동을 받는 사람도 모두 자연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 자연적 사물 안에 들어 있는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비범주적인 초월적 실재이기에 이 사랑은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실재이기도 하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6) 비주제성: 영화나 드라나마 소설이나 대화에 있어서 주제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 내용과 의미가 비주제적이라 말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분명하게 느껴지고 체험된다는 면에서 주제적이라 할 수 있으나,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말을 통하여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비주제적이라 할 수 있다.
(7) 익명성: 가슴 뭉클한 사랑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범주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비주제적이기 때문에 육체적 감각들로부터는 포착되지 않으며, 그러기에 육체적 감각들로부터는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익명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8) 존재론적 보편성: 인간은 선험적으로 가슴 뭉클한 사랑을 느끼면서 지향하도록 존재론적으로 창조되어 있다. 이 존재론적인 구조로 말미암아 인간은 누구나 가슴 뭉클한 사랑을 보편적으로 느끼고 체험한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존재론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한 사랑은 이상과 같이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범주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이고 비주제적이며 익명적이기에, 육체적 감각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도 없고 과학적 차원이나 의학적 차원에서도 그 물리적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나 체험적으로는 확실하게 존재하는 실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비주제적으로 존재하는 비가시적 실재를 “영”(spiritus)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영이라 규정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함은 또한 ‘거룩하다’[성(聖)]고 할 수 있다. ‘거룩함’은 일부 신학자들에게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라 여겨질 정도로 신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사랑은 존재, 일성(一性), 진성(眞性), 선성(善性), 미성(美性)과 같은 초월적 특성들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으며, 형이상학적 질서 안에서 언제나 일성, 진성, 선성, 미성과 일치해 있다. 이와 같이 일성, 진성, 선성, 미성이 내적인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동시적으로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상태를 ‘거룩함’ [성(聖)]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히브리말로 “카도쉬”(qādôš)라고 말하는데, 이 형용사는 많은 경우 하느님의 거룩함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즉,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거룩함은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카도쉬”(qādôš)라는 형용사는 어원적으로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카도쉬’는 속된 것, 즉 죄와 악과 어둠과 더러움과 추함과 거짓, 위선, 미움, 시기, 질투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깨끗하고, 참되고, 좋고, 아름답고, 옳고, 바른 것으로 가득찬 실재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슴 뭉클함은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사랑으로서 거룩하다고 규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함은 물질과 사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시간과 공간, 즉 역사로부터도 분리되어 있고, 범주들로부터도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선은 자연 안에 현존하면서도 자연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도 가슴 뭉클함은 ‘카도쉬’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의 정체는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는 영이면서 동시에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聖] 영, 즉 성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슴 뭉클한 사랑을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이라 규정하는 1요한 4,16이나 하느님을 영으로 규정하는 요한 4,24과 일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슴 뭉클함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범주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이고 비주제적이며 익명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2) 가슴 뭉클함은 사랑이며, 사랑은 하느님이다; (3) 가슴 뭉클함은 영이며, 영은 하느님이다; (4) 가슴 뭉클함은 거룩함이며, 거룩함은 하느님이다; (5) 가슴 뭉클함은 거룩한 영으로서 성령이다; (6) 가슴 뭉클함과 사랑과 영과 거룩함과 성령과 하느님은 동시적인 것이고 동일한 것이다; (7) 결론적으로 뭉클함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뭉클이시다.
이상과 같이 불가분리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가슴 뭉클함과 사랑과 영과 거룩함과 성령과 하느님은 한마디로 신비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이 신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신비는 하나의 명제로 정의할 수 없다; (2) 신비는 수많은 하느님의 이름들 가운데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3) 신비는 하나이다; (4) 신비는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범주적, 초월적, 초자연적, 비주제적, 익명적, 존재론적, 보편적 실재이다; (5) 신비는 무한한 실재로 머물면서 동시에 우주 안에, 즉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한다; (6) 신비는 유일하게 명백한 실재, 가장 확실한 실재이다.
3. 기초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관상과 신비 체험
관상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영적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에, 관상을 하면, 그 필연적 결과로 신비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상과 신비 체험의 이러한 불가분리적 관계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함으로써 그 신비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이 정의는 신비체험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 즉 ‘신비’라는 대상, ‘관상’이라는 방법, ‘사랑의 일치’라는 목적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상은 신비체험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비체험의 목적인 ‘사랑의 일치’는 관상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관상과 신비적 일치는 불가분리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신비체험의 방법으로서 신비적 일치를 필연적으로 귀결시키는 관상은 기초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이 크리스천 체험의 핵심에 자리하는 차원들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 체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가슴 뭉클한 사랑을 체험할 때, ‘가슴 뭉클한 사랑’이라는 체험 대상과 이를 체험하는 주체 사이에는 대상과 주체라는 거리 내지 간격이 사라져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하면 ‘가슴 뭉클함’과 ‘체험하는 나’가 불가분리적으로 일치된다는 말이다. 이는 체험 주체인 ‘나’의 밖에서 제3자적으로 발생한 가슴 뭉클한 사랑이 이를 체험하는 ‘나’에게 전달 혹은 양여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자기 양여된 이 사랑이 곧 하느님이기에 가슴 뭉클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이 자기 양여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신비이신 하느님을 관상하면, 그 하느님이 자기 양여되는 체험이 발생하게 된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 가슴 뭉클한 사랑이 거룩한 영으로서 성령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가슴 뭉클한 사랑에 대한 관상은 곧 성령에 대한 체험에로 귀결된다. 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한 사랑에 대한 관상은 또다른 차원에서도 성령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칼 라너는 초월 체험을 전개하면서 인간 주체에게 양여된 하느님을 성령이라 규정한다. 그런데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면, 관상 주체에게 가슴 뭉클한 사랑이 전달되고 이 사랑이 자기 양여된 하느님이기에, 라너의 초월 신학 안에서 비추어보면, 전달된 가슴 뭉클한 사랑은 자기 양여된 하느님으로서의 성령 체험이 된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은총과 구원 체험: 칼 라너는 초월 체험을 통하여 자기 양여된 하느님, 즉 인간 주체에게 전달된 성령을 은총이라 규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면서 체험한 성령은 곧 은총 체험이 된다. 그런데 은총 체험이 발생하면 구원 체험도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이는 신학적으로 볼 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가슴 뭉클한 사랑을 체험할 때에는 ‘가슴 뭉클한 사랑’이라는 체험 대상과 이를 체험하는 주체가 불가분리적으로 일치하게 되는데, 이 사랑 체험이 곧 성령 체험이고 은총 체험이기 때문에, 이 은총 체험을 통하여 가슴 뭉클한 사랑 체험의 주체가 성령과 불가분리적인 일치 관계에 들어서게 되고, 성령과의 이러한 일치 상태가 구원의 상태에 들어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면, 자기 양여로서의 하느님 체험과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을 통하여 은총 체험과 구원 체험을 필연적으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칼 라너는 이러한 자기 양여로서의 하느님 체험과 성령 체험, 은총 체험, 구원 체험이 본질적으로 신비 체험과 다르지 않다고 풀이한다.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계시와 믿음 체험: 성령과 은총과 구원으로 해석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계시와 믿음이라는 이중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가슴 뭉클한 사랑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곧 사랑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 신비이신 하느님의 현현이고, 하느님의 이 현현이 곧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며, 이 계시에 대한 동의와 수용이 믿음이다 . 가슴 뭉클한 사랑의 경우, 체험 주체 쪽에 전달된 사랑, 즉 자기 양여된 신비, 자기 양여된 성령, 자기 양여된 하느님이 계시의 동의와 수용으로서의 믿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계시와 믿음은 가슴 뭉클한 사랑을 관상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의 이중적 양식이다.
이상과 같이 기초 신학적인 관점에서 관상을 비추어보면, 가슴 뭉클한 사랑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관상의 주체가 필연적으로 관상의 대상인 사랑과 일치하게 되므로, 사랑에 대한 관상은 하느님의 자기 양여 체험,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 은총 체험, 구원 체험, 계시 체험, 믿음 체험, 즉 신비 체험과 불가분리적으로 통합되고, 이러한 체험들은 동시적으로 실현되는 가운데 그 경계마저 사라진다. 따라서 관상은 크리스천 체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4. 관상과 믿음의 필연적 인과성
관상은 크리스천 체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관상은 믿음 및 구원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관상은 하면 좋고 안해도 괜찮은 그저 좋고 유익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요청되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게 되면, 그 순간 신비가 관상 주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 신비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기에, 보고(videre) 믿는(credere) 행위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관상 주체는 신비를 바라봄으로써 신비 안에 있게 되고, 신비 안에 머무름은 신비에 대한 동의와 수용으로서의 믿음이 되기에, 관상하는 이는 신비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믿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바라봄, 즉 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런데 구원은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구원도 결국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관상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상은 믿음을, 믿음은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관상하면 믿지 않을 수 없고, 믿으면 구원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맺음말
인간 존재에게는 선험적으로 존재론적인 능력들이 주어져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육체적인 감각들과 영적인 감각들이 있다. 인간은 이러한 감각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는 “관상의 존재”(에쎄 콘템플라티부스, esse contemplativus), 즉 “호모 콘템플라티부스”(homo contemplativus, 관상하는 인간)이다. 관상하는 인간은 지복지관을 통하여, 성삼위께서 당신들의 완전한 사랑을 서로 관상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 즉 “데우스 컨템플라티부스”(Deus contemplativus, 관상하는 하느님)에 참여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지복직관과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을 지향하는 “관상하는 존재”로서 누구나 이 지복직관과 관상에로 불리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상하는 인간은 이 지상에서부터 선험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육체의 감각들과 영적인 감각들로 구성된 관상의 능력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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